메구미와 외출하는 날이다. 원래 쉬는 날의 내 계획은 기껏해야 오후까지 밀린 잠을 실컷 자는 것이 다였는데, 덕분에 오늘도 아침부터 꽤나 부지런을 떨었다. 화장하고, 와 실랑이해 가며 어떤 옷을 입을지 정했다. 준비를 마친 다음 막 기숙사를 나섰을 때였다. 하필이면 누구보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고죠의 눈에 띄고 말았다.

 "스즈카 고젠, 딱 걸렸어. 거기 서."

 "왜?"

 "이리 와, 가까이서 봐야겠으니까."

 "⋯⋯."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그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하는 수 없이 걸어갔다. 화장을 지우라는 둥 잔소리하려는 건 아니겠지. 보통 교사라면 쉬는 날까지 학교에 있을 필요는 없겠지만 고죠가 그밖에 고전에서 하고 있는 일들은 알 만하다. 요즘들어 교실에도 잘 안 나타나고.

 "아아, 맞아. 오늘 둘이 데이트한다고 했었지."

 "그래, 메구미랑 데이트한다. 멋대로 떠들어라."

 "말하지 않아도 멋대로 할 거야. 메구미였구나."

 "이미 누군지 알고 빈정댔던 게 아니란 말이냐!"

 모르면 말이나 말든가 왜 바쁜 사람 오라 가라야. 그대로 돌아서 가려는데 팔이 불쑥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무심코 사내 놈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허락했다. 뒤늦게 물러났다가 잠자코 지켜봤다. 두어번 휘감아 걸쳐 놨던 스카프가 어느새 리본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몰라도 꼬맹이는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나름 만족하며 고죠를 보고 씩 웃었다.

 "허허허."

 "하하핫."

 인정할게. 살짝 노티나긴 했어. 나오기 전에도 꼬맹이한테 혼났지 뭐야. 말하지 않아도 대충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저 웃을 뿐.

 "스즈카 씨."

 마침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메구미는 여느 날과 다름 없이 단정한 모습이었다. 다소 고상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취향의 출처가 누구인지 새삼 알기 어려운 건 아니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제 스승이 하도 정숙하게 입혀 놔서 눈꼴시려웠을 정도다. 같은 시절 고죠도 하는 짓은 양아치들과 다를 게 없었는데 겉모습은 말 그대로 도련님이었다.

 "나, 예쁘냐?"

 "네."

 허리에 팔짱을 끼며 자랑했다. 메구미한테 잘 보여서 기분 좋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쌤. 일이 생겼을 때는 연락해 주세요. 저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고생하면 면목없으니까요."

 "네가 어떻게 설득하냐에 따라 너그럽게 용서해 줄지도 몰라. 최대한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가지고 돌아와."

 메구미와 관련된 일이라면 사사건건 참견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생각해 보면 지금쯤 부자 관계처럼 되어 있겠지라는 내 예상과 달리 그다지 변한 구석이 없어 보이고 오히려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로 굳어진 느낌이다.

 "그냥 전화해요."

 "다녀와서 보자."

 그래도 한편으로는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어쨌거나 다른 누군가 끼어들 수 있는 부분이 아님은 분명하겠지.

 고전에서 시내까지 가려면 꽤 걸어야 한다. 중간에 보도가 끊어지면서 위험한 가장자리길로 안내하는 구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를 타는 것만이 대수는 아니다. 한편으로는 동행자와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역에서는 전철을 타고 또 다른 외곽 지역으로 이동해야 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를 때 숨이 차서 죽는 줄 알았다.

 "들어가기 전에 허락받을 것이 있습니다."

 "뭔데?"

 "안에서부터는 요비스테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양 없이 반말을 하겠습니다. 걱정 마요, 다시 스즈카 씨라고 불러 드릴 테니까."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평소와 똑같은 말투로 얘기하다가 우스운 꼴이 됐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메구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센터 안으로 들어섰다. 환영을 하는 건지 경계를 하는 건지 애매한 소리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 깜짝 놀라서 헛웃음이 나왔다. 로비에 들어서면 왼쪽 방향에 카운터가 있고 오른쪽 방향에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케이지가 가득하다. 아무도 없나 했더니 청소 도구로 완전 무장한 남자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반겼다.

 "후시구로 군, 와 줘서 고마워."

 "오늘은 여자친구도 데려왔네."

 "그간 별일 없으셨죠. 케이지 청소 중이구나. 저⋯⋯ 여자친구는 스즈카라고 해요."

 "스즈카? 되게 친숙한 이름이다. 실은 여기도 하나 있거든. 똑같은 이름의 퍼그가."

 "어이, 그런 건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돼. 하하하. 스즈카 양도 잘 왔어요. 고마워요."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 중 한 명이 보호소의 소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소장에게 직접 안내받아 간단한 서류를 작성했다.

 뭘 해야 좋을지 몰라 쭈뼛거리고 있으니 메구미가 나를 불렀다.

 "스즈카, 이리 와. 소독해야 하니까⋯⋯ 줘."

 "응? 뭐라고?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안 들려."

 "손."

 척.

 소독약을 꼼꼼하게 바르고 청소를 거들었다. 보호소는 보기 보다 넓었다. 로비부터 방까지 깨끗이 청소하는 동안 강아지들이 나 좀 보라는 듯이 꼬리를 흔들었다. 어떤 녀석은 내 손바닥 만해서 아무리 나라도 무시하기 힘들었다.

 "야⋯⋯ 안 움직이고 뭐 해. 강아지가 그렇게 귀여워?"

 "아, 아니야. 그냥 너무 작고 하찮아서. 불쌍해서 그래."

 어째선지 혓바닥을 깨물 뻔하고 강아지 쪽은 보지 않으려 애썼다. 청소 다음은 꼬질꼬질한 놈들을 씻기는 일이었다. 샴푸를 하고 있으면 어떤 놈들은 사람 같은 소리를 낸다. 시원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벅벅 긁어 주고 싶어도 갈수록 힘에 부쳤다. 어떡하면 눈이나 코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물을 가까이 대기만 해도 발버둥치니 꽉 붙잡아야 했다. 샴푸 짜고, 문지르고, 헹구고. 단순한 작업도 쉬지 않고 반복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윽, 건방진 녀석. 눈에 거품 들어갔잖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데도 푸드득 몸을 털어댄다. 양손에 장갑을 꼈기 때문에 급한 대로 메구미의 옷에 비비적거렸다. 목욕이 끝난 놈들을 궤짝에 넣으면 신기하게도 몇 분 뒤 뽀송뽀송해져서 나온다. 귀 청소 발톱 손질까지 하면 끝. 어떻게든 한 사람 몫은 해냈다.

 "킁킁. 향긋하구만. 나도 그렇고, 메구미 너도 그렇고."

 "이제 샴푸 냄새 풍기면서 애들이랑 산책하러 갈 거야."

 산책하러 갈 거야. 그 말을 알아듣고 여기저기서 문을 긁어댔다.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개를 데리고 나가는 것뿐이라면 어렵지 않으니까.

 "리드 줄은 되도록이면 J 자 모양으로 잡아. 너무 길게 늘어뜨리거나 놓치면 안 돼."

 "알았어. 근데 길게 해 주는 편이 애들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서 좋지 않아?"

 "그렇지만 지나가는 사람이 깜짝 놀랄 수도 있고 줄에 걸려서 넘어질 수도 있잖아."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네. 옛날에는 목줄 없이 그냥 마당에다 풀어 놓고 키웠으니까."

 "으음⋯⋯ 네 말은, 어렸을 때 봤다는 거지? 하하하. 그럼 저희 산책 다녀오겠습니다!"

 메구미가 서둘러 나를 데리고 나왔다. 이유는 하나. 내가 고등학생의 모습으로 늙은이처럼 말해서다. 이럴 때마다 당황하는 인간들의 꼴이 제법 볼 만하다.

 때 빼고 광낸 네 마리의 개들과 산책을 나섰다. 종종걸음으로 나아가면 실바람이 얼굴에 스치고 여름의 향수 같은 가볍고 산뜻한 향기가 코끝에 아른거렸다. 산책길은 몇 가지 코스가 있다. 푸른 옷을 입은 은행나무 가로수길은 커다란 차양 아래를 걷는 것처럼 시원했다.

 "메구미, 아까 네 여자친구라는 말에 왜 부정하지 않았냐."

 "다정하게 팔짱 끼고 있으면서 아니라고 하기도 뭣해서요."

 듣고 보니 그렇네. 메구미가 워낙 담담해서 납득해 버렸다.

 주택가에 들어선 뒤에도 지나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깐 멍해졌던 것 같다.

 "스즈카 씨."

 "으, 응? 왜?"

 "아까부터 무얼 넋 놓고 계세요. 제대로 주변을 살피면서 걸어야⋯⋯ 어어."

 "어어어어, 이봐, 류! 갑자기 어디로 끌고 가는 거냐! 멈춰! 메구미! 아아악!"

 하마터면 정면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조자룡처럼 기운이 펄펄 넘치는 류의 이유 모를 전력 질주가 시작된 것이었다.

 어떻게든 멈춰 보려 했지만 한참을 더 끌려왔다. 다행히, 류가 질주를 멈췄다. 리드한 건지 반대로 당한 건지 모르겠다.

 우리는 또 하나의 작은 맹수와 마주쳤다. 도심의 외로운 하이에나. 사료 포대 주변으로 몰려든 길고양이들이 눈을 부릅뜨며 경계하고 있었다.

 "헉⋯⋯ 헉⋯⋯ 아이고 나 죽네. 뭐야, 고양이냐. 이 놈. 겁주지 마. 새끼도 있잖아."

 "스즈카 씨, 괜찮아요? 미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류는 산책 중 가끔 이렇게⋯⋯ 헉."

 "메, 메구미. 여기 분위기가 왜 이러냐.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고양이들은 털을 바짝 곤두세웠다. 하악질을 하는 놈도 있었다. 류에게 끌려온 다른 녀석들까지 무리 본능에 따라 으르렁거리기 시작했고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고양이들이 뭉툭한 발 속에 숨겨져 있던 날카로운 발톱을 꺼내 달려들었다. 개들도 무시무시한 송곳니를 무기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놈들아 싸우면 안 된다! 거기! 핡퀴지 마! 냥냥 펀치 그만두라고!"

 "대체 몇 마리야 너네! 비겁하잖아! 알았어! 미안해! 갈게! 갈 테니까!"

 상대는 길고양이. 이쪽도 기껏해야 스패니츠, 포메라니안, 말티즈, 치와와다. 코딱지 만한 놈들이 어쩜 그리도 살벌한지 개판 오분 전은 당연지사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메구미와 나도 냥냥 펀치에 당했다. 발톱에 옷이 찢어졌다. 별것 아니지만 피까지 봤다. 네 마리를 양팔에 하나씩 끼고 줄행랑친 뒤에야 겨우 일단락지을 수 있었다.

 "메구미 너만은 알았으면 한다. 나는 이제 정말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아. 더는 옛날처럼 지저분하게 싸우기 싫고 그런 광경을 지켜보기도 싫어."

 "원하지 않는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을 막을 수 있을까요. 모르겠어요. 그냥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당신을 데리고 도망쳐야 할지도요."

 그렇게 계단에 주저앉아 탄식했다. 나름 진지했지만 입 꼬리가 씰룩거리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겠다 큰 소리로 웃어제꼈다.

 산책을 마치고 소장에게 보고하면 우리 임무는 끝난다. 욕심부리기에는 지쳐 버렸고 통금 시간이 지나기 전에 들어가려면 여유부릴 틈이 없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도 정말 수고 많았어 후시구로 군."

 "면목없습니다. 책임지고 잘 리드했어야 했는데 다치게 하고⋯⋯."

 "그 애들은 걱정 마. 다행히 조금 까진 것뿐이니까, 금방 나을 거야."

 메구미와 소장이 그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카운터에 앉아 있는 고양이와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 요 앙큼한 녀석이 먼저 시작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깔보질 않나 사람이 웃는 것마냥 눈을 찡그리질 않나. 어딘가에서 들어 본 적 있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건 상대에게 도전하는 행위라고. 생각해 보면 그건 개에 대한 설명이었고 고양도 같은지는 모르겠다. 녀석의 유리알처럼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가 왠지 도발적으로 느껴졌다.

 "가자, 스즈카. 왜 그래?"

 "이렇게 생긴 고양이는 처음 봐서. 귀가 안 보이길래 학대라도 당한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털 속에 작은 귀를 감추고 있더라고."

 "고죠는 스코티시 폴드야. 다른 고양이들이랑 달리 얘네는 귀가 이렇게 접혀 있어. 강아지 같기도 하고 곰돌이 같기도 하고. 귀엽지."

 "세상에. 네가 이름을 지었구나. 하하하. 어울린다."

 "그러니까. 얘를 봐, 하얀 털에 눈이 되게 예쁘잖아."

 연필통에 볼펜과 꽂아 놓은 장난감을 발견했다. 강아지풀처럼 생겼다. 이것을 고양이 앞에 가져가 살랑살랑 흔들면 기회를 엿보다 낚아챈다. 고양이라 하면 뾰족한 귀부터 떠오르는데 접혀 있는 녀석들도 있었다니.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저기⋯⋯ 메구미⋯⋯."

 "안 돼."

 내 말은 고양이 간식 있으면 하나 달라고. 어쩌면 메구미가 나보다 앞서 내 마음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는지도.

 "왜? 이름 때문에?"

 "그게 다가 아니야. 너한테는 아직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나는 말이야, 가끔 옛날에 죽은 놈들이 뻔뻔하게 살아 돌아올 것 같은 기분을 느껴."

 사후세계가 있든 없든, 환생을 하든 말든, 나는 어떤 인간도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 본 적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린다면, 내 가슴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원한. 그거라면 나도 지지 않는다. 내게 두고두고 갚아야 할 빅엿을 선사하고 백년도 안 돼 죽은 놈들. 쉽게 용서될 리가 없다. 그래서 다시 나타나기만 해 보라고 이를 갈기도 하지만, 이제라도 나한테 잘 보이면 봐줄 수도 있다. 온종일 개를 돌보고, 이제는 강아지풀 따위를 흔들어대며 고양이랑 놀고 있다. 적어도 오늘 내가 귀여운 것에 얼마나 관대해질 수 있는지만큼은 확실하게 알았다.

 저녁이 되자 전철이 혼잡해졌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는 메구미와 딱 붙어 있어야 했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어서 노을색 풍경만 바라봤다. 그러다 누군가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두 사람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 한 남자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도쿄에 오면 나도 예민해져서 섣불리 판단하긴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메구미를 붙잡고 속닥였다.

 "나를 쳐다보고 있어."

 "인간이 다 그렇죠 뭐."

 이유를 막론하고 주술사들은 어디서든 나를 죽이려든다. 실제로 내게는 위험한 상황이다. 모를 리가 없는데 뜻밖에 농담을 하니 맥이 풀리며 웃음이 나왔다. 한 번쯤 안전을 핑계 삼아 달라붙는 것 정도는 사양 않기로 할까.

 메구미에게는 눈웃음으로 아부하고 그대로 안면을 바꿔 남자를 노려봤다. 기분 나쁜 주력이구만. 주술사인가. 아니면 나를 인지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가진 비술사인가. 다행히 놈도 다른 생각은 없는지 내 눈을 피했다.

 예상은 했다. 보통은 주술사라도 둘 이상 떼거지로 덤벼들지 혈혈단신으로 나를 노리고 다가올 만큼 배짱이 두둑한 놈은 많지 않다. 아무나 이 몸에게 시비를 걸 수는 없다는 거다. 데이트 중이라면 내가 더욱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메구미. 아직도 샴푸 냄새가 난다. 너랑 나랑."

 "풉, 그러게요. 도착하기 전에 다 없어지지는 않겠네요."

 조금 쑥스러웠지만 역에서부터는 평소처럼 웃고 떠들었다. 예전에 극장 가서 봤던 영화부터 최근에 본 개그 프로까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녀석이랑 나한테 무슨 할 얘기가 있을까 싶었는데 맘껏 떠들었더니 후련했다. 마침 산골바람이 불어서 기분 좋았다. 어느덧 기숙사 앞. 여전히 짙은 샴푸 향에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또 웃음이 터져나왔다.

 "덕분에 아쉬움 없는 하루를 보냈다. 하고 싶은 일이 남았다면 거절하지 않겠다만. 어찌 할 테냐. 들어갈래?"

 "그랬다가 시도 때도 없이 여자 기숙사에 드나드는 놈이라고 소문나면요. 제가 여자들을 전부 적으로 돌리길 바라십니까."

 "다시 말하면 내가 너를 독차지해도 불만이 나오지 않는단 얘기니까 나쁘지 않구나. 알아, 밤중에 사내 놈과 마주치면 무섭겠지."

 "전혀 모르고 계십니다. 제가 두려운 건 그녀들을 겁주는 게 아니라 바로 그녀들이에요. 저 하나 처리하는 것쯤 일도 아니거든요."

 메구미가 다른 녀석들과 있을 때는 어떤 느낌인지 몰라도 내가 기억하는 어렸을 때보다는 확실히 밝아졌다. 알고 보면 이렇게 농담도 잘 하고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을 즐겁게 할 줄 안다. 무엇보다 이런 나와도 그런대로 죽이 잘 맞는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듯해서 나는 메구미에게 가까이 와 달라고 손짓했다. 녀석이 조금 다가오면 한 번 더. 그리고 무언가 속삭이려는 척하다 뺨에 입을 맞췄다. 놀래키고 싶은 맘도 있었는데 그러기에는 살짝 부족했던 모양이다.

 "다른 애들한테는 하지 마요."

 삐딱한 말투다. 내가 꼬맹이들을 편하게 대하는 건 사실이고 그게 당연한 것이지만 누가 들으면 아무한테나 하는 줄 알겠다. 속으로 투덜대며 메구미의 어깨를 움켜쥐고 나를 보게 했다. 그의 시선이 내 입술을 훑고 올라왔다.

 "귀여우면 단 줄 알아."

 "네?"

 유지도 노바라도 좋아하지만 걔들한테는 뽀뽀 안 해 줘. 어리니까 그 정도는 누구라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야 뭐야. 가벼워 보여도 신중히 행동하는 것이다. 반대도 마찬가지. 나는 이미 다른 애들이 모르는 많은 걸 메구미에게 허락했다.

 "이제⋯⋯ 네가 반말하는 것도 좋다. 메구미."

 "근데 왜 울 것 같은 표정이야. 같이 들어갈까."

 "안 돼. 농담이었다는 거 알잖아. 응큼한 녀석."

 "응큼한 게 아니라 건강한 겁니다. 당연한 거죠."

 아무렇지 않게 반말도 하면서 또래 여자애와 마주보는 건 아무래도 부끄러운지 정작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어색하다. 그래도 메구미가 여자를 이렇게 대하는 건 본 적 없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만족했다.

 "괜찮으니까 빨리 들어가 버려. 내일 지각하지 말고."

 "너⋯⋯ 너나 일찍 자라 바보 녀석아! 따라오기만 해!"

 내가 지각을 많이 하긴 했지. 벌써 몇 번이나 벌도 섰지. 그 놈의 스마트폰 때문에. 민망할 때는 웃으면 된다. 메구미가 멀어지는 걸 보고 나도 들어왔다. 조만간 또 같이 갈 수 있을까. 놀러가고 싶다. 까짓껏 착한 일 하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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