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말씀하시면 심부름 정도는 다녀올 수 있습니다만."
"나는 이럴 때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는지 잘 몰라서 말이야." "크게 힘든 것도 아니고, 너무 어려워하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메구미 너도 나 같은 늙은이와 어울리는 건 재미없겠지만⋯⋯." "심부름이 아니라, 그 무언가를 같이 먹으러 가자는 뜻이었군요?" 고죠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을 텐데. 메구미는 좀 어렵다. 능구렁이 같은 놈들처럼 피곤하지는 않아도 어떤 의미에서는 더 까다롭다. 예를 들면 이럴 때. 갑자기 밥 먹자는 말을 듣고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모르겠다. 꼬맹이들도 가지각색이고 예상을 빗나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별로 개의치 않았음 좋겠는데. "부담 가질 것 없다. 다른 뜻은 없고 그냥 오랜만에 만나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으니 밥이라도 사게 해 다오." "제가 고죠 쌤 같은 분한테 익숙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어색해지네요. 음⋯⋯ 사 주시면 좋죠? 감사합니다?" "너에게 별꼴을 다 보이는구나. 사실, 나는 너희와 얘기하는 게 고죠를 상대하는 것보다 백 배는 더 어렵다." "그렇게 어려워하시면 오히려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데요. 아니, 농담이에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메구미가 나를 배려하듯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이 정도 컸으면 경계해야 하는 대상쯤은 이미 구분해 놓고 있겠지. 하지만 고등학생도 엄연히 아직 애인데 주책맞게 달라붙다가 불편한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싫지 않다면 됐다. "다른 애들한테는 물어볼 엄두도 안 난다. 나는 고죠와 형편이 달라서 뭐든 맡겨 달라고는 말할 수 없거든." "그게 보통 아닙니까. 고죠 쌤도 학교에서는 평범한 선생님이에요. 스즈카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럴걸요." "고죠도 그러냐? 그 놈 예전부터 씀씀이 하나는 컸잖아. 뭔가 사 달라 조르면 단호하게 안된다 말하기도 해?" "쓸 때는 화끈하게 쓰십니다. 저희들의 쉬는 것, 먹는 것, 가끔 입는 것도. 마땅한 이유가 없다면 볼을 꼬집히겠죠." "하하하!" "그렇게나 의외입니까." "무진장 새삼스럽지만 방금 자각했다. 고죠가 한 번쯤은 내게도 안 돼라는 말을 했을 법한데, 당장 떠오르는 기억이 없구나." 그동안 내가 고죠에게 빌붙어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제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쉬는 것, 먹는 것, 입는 것 등등. 그 중에서도 의식주 관련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작년만 해도 내가 생활했던 집은 고죠가 준비했고 마침 가전을 보러 간다기에 따라가 TV도 얻었다. 내가 생각해도 낯뜨거운 우연이다만 애초에 나는 억지로 끌려온 몸이니 억울함 때문에 도움을 받는다는 자각이 없었다. 내가 먼저 구걸이나 했담 모를까 그것도 아니다. 어마무시한 가격의 가전을 들이면서도 여유만만인 그 놈이 더럽게 부럽고 재수없어서 별로 미안하지도 않았다. 끌려왔건 어쨌건 편의를 봐주었는데 내 입장만 생각했다. 나야 고전에 잠깐 머무르고 다시 떠나면 그만이지만 녀석은⋯⋯ 지금도 시달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고. 닳는 것도 아니니 다음 번에는 까짓거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 줄 수도 있겠지. "인간이라면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도 누군가 내게 무엇이든 사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철저히 이용하려 들 겁니다. 갓난아기 때부터 그렇게 배우거든요. 가끔 생각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스즈카 씨도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어요." "딱히 내가 너희와 다르다고까지는 말하지 않겠다. 녀석에게 무엇을 받든 얼마나 받든 어차피 나는 몸으로 다 갚아야 돼." "음⋯⋯ 저는 스즈카 씨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보다 오늘 메뉴에 대해 얘기해 볼까요. 고전 근처에는 빠삭하시겠죠. 괜찮은 곳이 있으면 저희들한테도 알려 주세요. 다른 두 명은 막 상경한 참이니까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낯빛이 그리 바뀌는 게야. 내 말은 고죠도 만만치 않은 놈이란 거야. 내어준 뒤에는 어떤 식으로든 요구해 온다. 주로 노동력을. 네 눈에는 내가 날로 먹는 걸로 보이냐. 가게를 고르기 전에 먹고 싶은 걸 말해라." "영락없이 불건전한 이야기를 듣게 될 것 같아 주제를 벗어나려 했습니다만 그저 괘씸한 생각이었군요. 실례했습니다. 뭐, 어른들의 세계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있으니까요.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네요. 덮밥이나 라멘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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