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놀러 가자⋯⋯ 오랜만에 듣는 말이네요.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 그냥 왠지 모르게 말이야. 좀 답답한 거 같기도 하고." "저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될 겁니다. 고죠 쌤과 얘기해 보세요." "으응, 알았다. 그 놈에게 무슨 얘기를 한들 어차피 진지하게 듣지 않겠지만 말이야." "진지하게 듣지 않는 겁니까. 두 분 사이, 그 정도 의리는 있을 텐데요. 제가 아는 한." "잘못 알고 있는 게야. 반대로 더 상할 의도 없어. 어쨌든 방해해서 미안하다. 갈게." "오해하셨습니다. 오늘은 어쩐지 다른 것 같아서⋯⋯ 저 같은 놈으로 괜찮으십니까?" "네가 필요해서 너한테 얘기한 건데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당연히 괜찮지. 이상한 녀석." "스즈카 씨도 마찬가지잖습니까. 저도 그날은 제가 필요해서 같이 먹겠다 말했던 겁니다." "⋯⋯." "⋯⋯." "그⋯⋯ 뭐냐. 분위기가 이상야릇하구만. 풉.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교복 갈아입고 와." "아, 그러고 보니. 교복 입고 있었죠. 갈아입을 틈이 없었어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이맘때쯤 이런 날이 종종 있다. 가벼운 고민 정도는 늘 있고 그냥 바람이나 조금 쐬고 싶었다. 시내로 이어지는 내리막 차도의 가장자리. 가드레일 너머를 멀리 보면 복잡한 도심을 어느 정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이 도로는 고전에서 전세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차의 왕래가 적다. 그래도 메구미가 바깥 쪽에서 걷고 있으니 신경 쓰인다. 팔을 잡아당겨 안쪽으로 보냈더니 나를 흘깃 쳐다보고 슬쩍 빠져나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메구미가 원한다면 그냥 가만히 있을까. 어려도 사내 놈이니 가끔은 괜찮겠지.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메구미와 단둘이서 외출한 적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예전부터 외출할 때도 대부분 고죠나 츠미키가 함께 있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분이다. 메구미가 어떻게 생각할런지는 모르지만 나쁘지 않다. "혹시 다른 일정이 있는 건⋯⋯ 관두자. 가서 공부해.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일정이라 하시면, 네, 있습니다. 스즈카 씨도 알고 계시죠. 매일 똑같다는 거." "바쁘신 몸이었구만. 미안해서 어쩌누. 나야 좋지만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저도 학교 안에만 있고 싶지는 않아요. 다녀와서 밤을 새야 한대도 상관없어요." 메구미의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내가 바란 건 기껏해야 산책. 근처 한 바퀴 빙 돌면 만족이었다. 반시간으로 충분하다. 꼬맹이에게는 충분히 지루한 시간이랄까 애초에 즐거울 일이 뭐 있냐만은. 메구미에게 더 놀아 줄 의향이 있다면야. "별 걱정을 다 하는구나. 너는 내 손모가지를 걸고 늦기 전에 들여보내 줄 거다." "당신도 일단 학생 신분이에요. 통금 전에 저랑 기숙사로 돌아가셔야 되거든요." "젠장, 돌아가고 싶지 않아. 메구미 네가 나를 늦기 전에 데려다줘야 할 것 같다." 곧 여름이라고는 해도 교복 외투를 계속 걸치고 다녔더니 셔츠만으로는 썰렁하다. "이럴 거 같아서 가져왔어요. 제 옷이지만 걸치세요." "고맙다. 근데 커도 너무 크잖아. 바보 같아 보일 거야." "당신의 작은 몸을 탓하십시오. 남의 옷 탓하지 말고요." 메구미가 입었을 때도 헐렁해 보였는데 내가 입으니 소매가 손을 다 가려 손톱밖에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두 팔을 흔들자 펄럭펄럭 소리가 났다. 요즘 애들은 큰 옷을 좋아하는 것 같다. 전통 복식에 익숙한 나도 품이 넓으면 좋긴 한데 어떤 멋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손은 보이게 기다란 소매를 두 번 접어 올렸다. 옷에서 교실 냄새가 났다. 킁킁. 게다가 이거. 빤질빤질한 감촉이 떠오르는 냄새는 정말이지 익숙하다. 어제도 맡았고 엊그제도 맡았고. 바로 알 수 있었다. 문제집 위로 쓰러지면 코끝에 아른거리는 그⋯⋯ 고등학생의 향취랄까. 눈물겹다. 오랜만에 나왔다 해도 특별한 일은 없다. 메구미에게 산책하고 싶다 했더니 녀석도 같이 걸어다니며 구경하는 정도로 어울려 줬다. 제법 걸었다. 꼬르륵. 꽤 좋은 울림이다. "가끔은 기분 전환이 필요한 것이로군. 며칠 동안 입맛이 없었는데 돌아다녔더니 배가 고프다." "그렇네요. 어차피 기숙사로 돌아가면 식사가 늦어질 테니 오늘은 그냥 밖에서 먹고 들어가요." 도시에 노을이 깔렸다. 퇴근길 직장인들과 방과후 활동을 마치고 하교 중인 아이들에 의해서 거리가 활기를 띠었다. "그나저나 고등학생 양아치들이 많구만. 수업 끝났으면 후딱 집에 들어갈 것이지 모여 앉아서 뭐 하는 거야. 저 담배 태우는 거 봐라." "양아치라고 부르면 안 돼요." "머리 노랗게 물들이고 짤랑짤랑거리며 이마에 문제아라 써 붙이고 다니는 놈들을 요즘에는 뭐라고 부르냐? 고삐리? 야, 고삐리들아!" 담배는 안 된다 쓴소리 좀 하려고 했는데 메구미가 뒤에서 나를 확 끌어안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놔 줬다. "스즈카 씨. 가지 마요." "괜찮아. 잠깐 얘기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간단한 문제다. 내가 꺾을 수 있어." "가을의 갈대는 구부러져도 꺾이지 않는다죠. 여름 갈대는 구부릴 줄도 모른답니다. 다그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후회는 가장 확실한 교훈이에요. 스스로 뉘우치는 것만큼 훌륭한 반성도 없잖아요. 내버려둬요." "으으." "우와. 큰일났어요. 얼른 고개 숙여요. 됐으니까 고개 숙이고 너를 봐 너를. 너 나랑 동갑이잖아. !" "음⋯⋯ 그러네. 지금은 나도 고등학생이구나. 심지어 나는 1학년인데 쟤들은 더 많아 보이네. 풉! 아하하!" 어쨌든 실컷 놀았고 재밌었다. 뭘 먹으면 잘 먹었다고 전국에 소문이 날까.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예전부터 단골이었던 가게 중 하나를 골라 느긋하게 저녁을 먹었다. 밥도 맛있었다. 다 좋았다. 그런데 가게를 나와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부터 자꾸만 신경에 거슬리는 게 있었다. 말하자면, 불필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뜬금없이 미행이라니 지나친 생각인 것도 같지만 내 감각은 그 옛날 언제 뒤에서 칼 맞을지 모르는 시대부터 철저히 단련되어 왔기 때문에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과연, 저 녀석들인가. 여남은 거리에 메구미 또래 사내 놈들이 나를 보며 쑤군거리고 있었다. 나는 메구미를 살며시 잡아당겨 멈춰 세운고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메구미, 미안하지만 심부름 하나 해 다오. 저쪽 편의점에서 뭐냐⋯⋯ 박하사탕을 사와라." "식후에 박하사탕 찾는 건 뭐랄까, 진짜 할머⋯⋯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디 가시면 안 돼요." "오냐." 메구미는 기꺼이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멀어지길 기다리다가 들리지 않겠다 싶을 때 돌아섰다. "어이, 거기 너희들. 할말 있음 지금 해라." 미안, 메구미. 이번에는 못 참아. 사내 놈들이 다섯 씩이나 무리짓고 있으면 십중팔구 내게 좋지 않은 일이고 본능적으로 경계하게 된다. "아, 웃겨. 말하는 게 할머니랑 똑같아." "있잖아, 너. 후시구로 군의 여자친구야?"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떠벙이 놈과 다른 떨거지들이 다가와 두런거렸다. 설마했는데 녀석들은 메구미를 아는 듯했다. '제 입장도 조금 생각해 주세요.' 메구미의 말이 떠올랐다. 밖에서도 말투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나지만 이렇게 되니 아무래도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갑자기 아무 말도 안 하네. 무시하는 거야? 여자친구 아냐? 말해 봐. 무슨 말이든 좋으니까. 귀엽던데." "뭐 하냐." 떨거지들의 눈이 어쩐지 다른 곳으로 가 있다 했더니 놈들에게 넌지시 말하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메, 메구미. 왜 이렇게 빨리 왔어? 그보다 미안해. 친구들인 줄은 몰랐어.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했구나. 괜찮아, 무시해도. 얘들하고는 중학생 때 몇 번 치고받았던 게 다거든. 잘했어." 나를 우습게 봤는지 꾀송거린 모양이다. 깜찍하고 괘씸했다. 내가 꼬맹이의 연기 따위에 속을 리 없잖은가. "빌어먹을 애새끼들." 떠벙이 앤생이 얼간망둥이 다 모여 나를 애워싼 가운데 하나가 무슨 생각인지 내 어깨에다 손을 척 올렸다. 발끈해서 손목을 꽉 그러쥐었다. 고놈 입에서 끙 신음이 터져 나왔다. 더욱 힘이 들어가자 우두둑 으스러졌다. 인내심 없는 꼬맹이가 더는 참지 못하고 악 비명을 질러댔다. "기지배가 무슨 짓을⋯⋯ 뼈가 틀어진 것 같아. 오늘은 그만 됐어. 가자. 후시구로 너 이 새끼! 두고 봐!" "야 이 놈들아! 담배는 다 내려놓고 가라! 나중에 후회한다! 고민 있으면 얘기해 인마! 도와줄게! 거 참!" 지켜보고 있던 놈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어쩔 줄 몰라하더니 손목 병신을 따라 우르르 달려갔다. 눈물이 쏙 빠지게 아프겠지만 교훈을 주기 위해 그 정도의 잔인함은 필요했다. 치료만 제때 받으면 크게 고생하지는 않을 거다. "왜 저한테 화풀이인지 모르겠네요.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네가 상대할 가치도 없는 놈들이야. 이제 쌈박질은 그만뒀지?" "당신이 하지 말라면 안 할게요." "옳지, 옳지. 착하다. 그럼 됐어." 나는 주책이라는 걸 알면서도 메구미의 뺨을 어루만졌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녀석도 개의치 않고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메구미가 멀어져 가는 놈들을 돌아보더니 내게 물었다. "쟤들한테 뭘 붙여 놓으신 거예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나는 콧방귀를 뀌고는 대답했다. "내 식신이다. 그냥 혼 좀 내 주려고." 메구미가 그렇듯이 나도 전투를 위한 식신만 취급하지는 않는다. 달라붙으면 근육통에 시달리거나 악몽을 꾸는 정도다. "4급 주령 정도가 큰 문제를 일으키진 않겠지만 나중에 책을 잡힐 수도 있어요. 스즈카 씨도 그러지 마요." "쳇." "그리고 손목을 꺾어 버릴 것까지는 없었어요. 이번 일은 저쪽이 먼저 도발해 온 거니까 눈 감아 드릴게요." "알았다." "얌전해서 좋네요." 쓰담쓰담. 칭찬받았다. 고개를 들면 거기에도 꼬맹이가 있을 뿐인데 묘한 기분이었다. 사실 나도 응석부리는 건 싫어하지 않는다. 그래, 가끔은 내가 작아지는 것도 좋겠지. 나는 장난꾸러기처럼 익살스럽게 웃었다. 메구미의 얼굴에도 나와 닮은 웃음이 드리웠다. "자, 손 잡아요. 사탕 사 먹으러 가야죠." "너, 너 지금 나를 꼬맹이 취급하는 거냐!" "제가요? 스즈카 씨가 부탁했던 거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뭐, 좋아. 그럼 가자." 어쩌다 보니 손을 잡았다. 아까 들었던 후시구로의 여자친구냐는 말이 어쩌면 그렇게 황당하기만 한 소리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닭살을 떨고 있었다면. 실제로 내가 메구미의 여자친구처럼 보였을 것 같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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