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노바라가 누구보다 일찍 교실에 도착했고 내가 다음이었다. 이어서 유지, 메구미까지, 모두 수업 시작 전 자리에 앉았다.

 "후시구로. 뭐냐, 그 얼굴은. 한심해라아."

 "시끄러워, 쿠기사키. 말 안 해도 알거든."

 메구미의 상처를 보고 앞서 유지의 언짢은 표정도 봤지만 노바라에게는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남자들끼리 주먹다짐 정도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녀는 빈정거리면서도 재밌다는 듯이 낄낄낄 웃었다.

 나는 뺨으로 나왔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소리를 전혀 내지 않으면 대부분의 인간들은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주술사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을 때 고맙게도 메구미는 내 그릇의 뺨을 먼저 쳐다본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눈과 입이 전부인데 가끔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오늘 아침과 같은 일이 벌어진 다음에는 서로의 심정을 이해하기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스름이 물러가고 눈부신 태양이 교실 안을 비추었다. 바람이 열어젖힌 창문을 넘어 부드럽게 스쳐지나갔다. 일난풍화한 날. 발소리가 교탁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선생님까지 더해져 교실 안 모든 존재가 빌어먹게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다들 책 펴. 노바라가 보기의 글을 읽어 보렴."

 "어라, 오늘은 좋은 아침팬지 그런 거 안 해요?"

 "읽어."

 "네, 네애."

 노바라의 목소리를 듣는 동안에도 이글거리는 태양이 소리를 내는 듯하고 쓰르라미가 계속 울어댔다. 다른 학년의 누군가 늦잠이라도 잔 것인지 복도 밖에서 쿵쾅거리며 멀어져 갔다. 그야말로 평소와 다를 것은 없는 듯했다.

 "메구미는 얼굴이 예쁘게 물들었네. 괜찮니."

 "묻지 마세요."

 때로는 고죠가 안대로 눈을 가리는 게 두려울 정도로 답답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이전에 뭘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으니까. 보기의 글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어느새 노바라의 선율은 여름의 중창곡에서 자연스레 빠졌다.

 "다 읽었는데요."

 고죠는 칠판을 향해 돌아섰다. 그래도 여전히 눈이 가려진 상태로 걸어다니고 밥을 먹고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는 그에게 안대를 벗을 필요는 없었다. 그것이 녀석의 턱 밑으로 내려오는 순간에는 초조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분필 홀더가 안 보이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홀더인지 깍지인지 하는 물건을 지난 시간에 내가 창밖으로 휙 던져 버렸단 사실을. 그냥 고죠를 조금 골탕먹이고 싶어서 그랬다. 오늘 같은 사단이 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지금 찾으러 갈 수도 없고 후회해 봤자 늦었다.

 "혹시 너희들 중에 누군가 장난친 거야?"

 "⋯⋯."

 "으응, 그런 건 아니지? 걸리면 혼난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찾으러 가긴. 잊어버려. 처음부터 그런 물건에는 손 댄 적 없다고 생각해.

 "칠판을 보자. 보기에서⋯⋯ 아, 부러졌네."

 거구의 사내가 아귀센 손으로 사시랑이 같은 분필을 쥐고 있다. 위태로운 건 당연하고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는데도 부러질 때 큰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다.

 "자, 다시 보자. 보기에서 설명하고⋯⋯ 아."

 새로 꺼낸 분필도 얼마 못 가서 똑 부러졌다. 고죠는 등을 보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두동강난 분필을 칠판 받침대에 내던지며 말했다.

 "그만둘까. 응, 수업 끝. 자습이다. 문제집 꺼내."

 "엥."

 "쌤도 수업하기 싫은 날 있어. 왜, 더 듣고 싶어?"

 "아니요."

 유일하게 사건의 전말을 모르는 노바라를 끝으로 더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일 교시 수업은 자습이 됐고 아이들이 문제집을 꺼냈다.

 "쌔앰. 어디까지 풀어요?"

 "아, 그렇지. 일단⋯⋯ 그래, 단원 평가만이라도 풀어 봐. 아직 응용 문제는 어려울 테니까. 다 푼 사람은 얘기해."

 고죠는 햇빛 드는 창가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뜻밖에 안대를 내리기에 무엇을 보려나 했더니 언제나 변함없는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하늘에 구름이 천천히 지나가는 게 보일 정도였다.

 "하⋯⋯."

 고죠가 한숨을 쉬었다. 침묵이 흐르는 교실은 그 작은 소리도 지근에서 들리는 것 같았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 풀었습니다."

 "역시 메구미가 빠르네."

 "저는 이제 뭘 하면 됩니까."

 "그럼 응용 문제 1번 풀어 볼래?"

 고죠는 자기 책을 가지고 일어나 천천히 걸었다.

 "풀었어요."

 "그래, 답은?"

 "2번이요."

 고죠가 메구미의 대답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할 수 있으면 10번까지 풀고 답 불러 봐."

 약 5분 후, 메구미가 답했다.

 "2번부터 5, 3, 1⋯⋯."

 고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끄덕끄덕. 끄덕끄덕.

 "잘한다 우리 메구미. 이참에 서술형도 풀어 봐."

 메구미는 미간을 좁히면서도 얌전히 말에 따랐다.

 "풀었습⋯⋯ 왜 이러세요."

 그새 못 참고 메구미의 책상으로 간 고죠는 그가 적어 놓은 답을 확인했다. 그런 다음 또 페이지를 뒤로 넘겨 문제 하나를 가리켰다.

 이번에는 메구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들었다.

 "거기까지 진도 안 나갔어요."

 "못 풀겠다고 하진 않는구나."

 어떤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이전 문제들보다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메구미는 금방 답을 써냈다.

 고죠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메구미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메구미의 표정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메구미는 좀 쉬어도 돼."

 남은 시간은 평범하게 각자 문제집을 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수업 미리 준비해 놔."

 오늘 내게 가장 큰 걱정거리는 등교 후에 벌어질 일들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만약 첫 수업이 조용히 지나간다면 조금은 마음을 놓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고죠는 그런 얄팍한 속내를 훤히 읽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수업 막바지에 그런 생각이 자신에게 결코 이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고죠가 교실을 나갈 때. 나는 봤다. 나를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더니 그대로 고개를 돌리고는 가 버렸다.

 "뭐야, 오늘 분위기 겁나 썰렁해. 쌤은 왜 저러신대?"

 "그, 그러게. 쌤도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 보다."

내게만 들리도록 지금부터의 계획을 물었을 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모든 수업이 끝났지만 내게는 어떤 계획도 없었다.

 방과후 자습 시간, 나는 머리가 새하얀 상태로 교실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힘없이 터덜터덜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메구미가 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사자의 입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나는 메구미를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차 내 편이 아니다. 어쩌다 고죠보다 고죠의 마음을 생각하는 녀석이 됐는지 모르겠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메구미뿐이었다.

 "그래 줄래? 가서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겠어."

 불처럼 화를 낼까. 얼음처럼 냉정할까. 어느 쪽이든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자신의 생각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참, 유지도 있지. 오해는 풀어야 하지 않겠냐."

 "이타도리 쪽은 걱정 마요. 제대로 얘기했으니까."

 나는 그럴싸한 계획 하나 생각해내지 못했는데 쉬는 시간에 저쪽 문제를 간단히 해결해 버리다니. 내가 하필이면 고죠의 제자 중에서도 메구미를 건드려서 위기에 처한 것은 사실이나 한편으로는 메구미라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넌 괜찮아?"

 "네. 그럼요."

 아침부터 막막해서 한 번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나보다 훨씬 침착해 보이지만 메구미도 놀라고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심지어 맞기까지 했다. 어쩌면 태연한 척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치료해 줄까?"

 "아이, 됐어요. 가요."

 내가 의지하는 것처럼 내게는 조금 투덜거려도 될 텐데. 그는 입술이 피떡이 되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손사래를 칠 뿐이었다.

 문앞에서 메구미의 안색을 살핀 뒤 노크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고죠는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고죠, 아직 학교에 있었구나.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야. 네가 나 대신 남아 볼래?"

 "바쁘지 않다면 잠깐 앉아서 얘기 좀 하자."

 각오하고 왔으니 살살해 달라고 눈빛으로 애원했다. 고죠가 안대를 쓰지 않아 어떤 상태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육안은 다른 무엇에도 빗댈 수 없지만 보통 맑은 하늘이라고 말하는데 오늘은 더 차가운 파란색으로 보였다. 얼음같은.

 나는 메구미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생각했다. 마사미치에게 불려갔을 때는, 녀석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자신에게 편한 쪽으로 넘겨짚은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미쳤어, 미쳤어. 스즈카 고젠. 생각의 올가미에 발버둥치고 있을 때 메구미가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의연했던 얼굴에 불안과 같은 감정이 희미하게나마 비치는 것을 보고 조금은 정신이 들었다. 내가 이럼 안 된다. 알고는 있지만.

 고죠는 맞은편에 앉아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아침에는 미안했다, 고죠. 잠결에 전화기를 착각해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그래, 나는 어제 메구미 방에서 잤다. 그건 시인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계속 캐묻는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문득 메구미가 나를 돌아보았다. 어째서인지 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내 말이 의외였던지 조금 놀란 듯하고, 한편으로는 화가 난 듯 보이기도 했다. 분명한 사실은 썩 좋은 표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죠의 시선이 메구미에게 향했다.

 "라는데, 메구미. 어떻게 생각해. ‘어젯밤에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끝.’ 너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지 않아?"

 "⋯⋯그렇네요.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진 주령에게는 인과 관계가 무엇인지 친절히 설명해 줘야 하는 걸까요."

 "참아, 참아. 메구미도 피곤하잖아.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선생님의 눈을 피해서 그 사이 둘이 얼마나 애틋한 관계가 됐는지, 손은 잡았는지, 키스는 했는지 등등 나중에 천천히 들려 줘도 돼. 되도록이면 빨리 끝내고 싶단다. 어른들끼리."

 "말씀드릴게요. 애틋한 관계라 말할 건 아닙니다만, 잡았습니다. 했습니다. 그렇담 어쩌실 겁니까. 제가 없는 곳에서 제 미래에 대해 우아하게 뒷담화라도 나누실 겁니까. 저에게 들려줄 만한 얘기가 아니라면 그녀에게도 하지 마십시오."

 "왜 이렇게 마음을 몰라 주니. 도망치라는 게 아니야. 자리를 피해 달라는 거지. 메구미가 부탁을 들어 주지 않으면 선생님은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부터 그녀와 내 이야기를 시작할 거야. 네가 모르는 과거부터 불과 얼마 전의 일까지 말이야."

 "과거는 모릅니다. 솔직히 최근 일도 모르고요. 선생님과 스즈카 씨가 작년에 한 번 만남을 가졌고 그날 귀가하지 않으셨다는 것 정도만 압니다. 그래서요. 또 뭘 하셨는데요. 비밀 연애라도 하셨나 보죠. 제가 고전에 온 뒤에도 만나셨나요."

 "스즈카 고젠, 정말 너무한다. 적어도 제자 앞에서는 내 체면도 생각해 줘야지. 이제 부끄러워서 애들 얼굴을 어떻게 봐.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한 거야. 메구미가 전부 알고 있잖아. 흑흑흑. 흑흑. 하핫. 하하하. 하하하핫!"

 처음에는 세게 나가서 몸부터 사린 다음 때가 되면 굽혀야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인간들이 작정하고 비꼬는 말투를 써대기 시작하면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어서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대로 두 남자 사이에 끼어들었다가는 다칠 것 같았다.

 분명히 메구미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도 있었지. 작년에 고죠와 만나서 술을 마셨다고. 그것 외에는 얘기하지 않았다. 얘기할 이유도 없다.

 "뭐, 들킨 건 어쩔 수 없으니까."

 훌쩍이는 시늉을 했다가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도록 웃어제꼈다가. 다시 얼음같은 눈으로 차갑게 홉떠보며, 고죠가 말했다.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야."

 살았구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제자들이 너무 우수해. 선생님 할말이 없어."

 메구미가 눈썹을 찌푸리며 고죠에게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혹시, 아까 수업 시간 때⋯⋯."

 고죠는 말없이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침묵이 흘렀다. 그는 테이블 한편에 있는 커피 포트의 전원을 눌렀다. 그러자, 메구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계속 문제를 풀게 했습니까. 혹시라도 제가 다른 일에 몰두하느라 본분을 잊지 않았나 확인하려고. 오로지 그 걱정뿐이라는 말씀이죠."

 "맞아. 내가 너에 대해 달리 무슨 걱정을 하겠어."

 "그것 참 '선생님'답네요. 차라리 화를 내든가요."

 "못 해, 우리 메구미한테. 유지처럼은 할 수 없지."

 나는 두 남자의 눈치만 살폈다. 메구미가 고죠를 바라보며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을 마친 그는 고죠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안대, 왜 벗었어요. 평소처럼 쓰는 게 좋잖아요."

 메구미는 꽤 자신있어 보였다. 이를테면 고죠와 나의 질긴 인연을 가볍게 비웃을 만큼 그에게서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히 나보다 고죠를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난  9년이 그렇다.

 고죠는 턱 아래의 안대를 만지작거리다 메구미의 말을 이해한 듯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시선을 정면에 둔 채. 메구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이윽고 두 남자의 시선이 같은 높이에서 딱 부딪혔다.

 "실은 당신도 그렇게 불평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아닌데? 나는 오늘도 네가 너무 너무 귀여운데?"

 포트의 불이 꺼졌다. 부글부글 끓는 소리만 들렸다. 그냥 소리일 뿐이지만 누군가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들려서 어떤 말보다 이해하기 쉬웠다. 고죠가 두 개의 컵에 커피를 따랐다. 메구미 것 하나, 자기 것 하나. 내게는 당연한 듯이 주지 않았다. 메구미가 테이블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고죠 대신 그의 컵에 설탕을 때려넣고 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고죠도 마찬가지. 딱 한 모금만 마시고는 컵을 내려놓았다. 문득 어지럽고 멀미가 났다.

 "저기요, 스즈카 씨."

 흠칫, 어깨가 들썩였다.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나의 불안은 이미 최대치에 도달했으므로 오히려 더는 불안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느낌도 없었다. 다만 아까부터 땀이 나서 흥건해진 두 손으로 교복을 꽉 움켜쥐었다. 내게 말하면서도 시선은 고죠에게 두고 있던 메구미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오늘 낮에 보았던 것과 같은 눈빛. 바로 전에도 봤다. 눈동자 색만 다를 뿐 그것으로부터 느껴지는 한기는 스승과 비교해도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옆에서, 앞에서, 소리 없이 나를 옥죄어 왔다.

 고죠는 말할 것도 없고 메구미의 옆도 더는 안전하지 않았다. 나는 주춤주춤 도망치다 팔걸이에 등을 부딪혔다.

 "하하하. 어디 가. 잘못한 건 알아?"

 "주술사 상대로, 담력도 좋습니다?"

 고죠는 물론 메구미까지 삐딱하게 앉아 등받이에 기댔다. 더할나위없이 여유로운 태도였다. 굳이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그들과 나의 거리는 충분히 가까웠다. 그들이 손을 뻗지 않았어도 나는 이미 붙잡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망칠 생각일랑 접고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자신을 타이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뜸들이지 말고 한번에 덤벼!"

 나는 팔다리를 쭉 뻗고 소파에 몸을 늘어뜨리며 외쳤다. 나, 스즈카 고젠. 다른 이름은 다테에보시. 한때 인간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으나 주술사들과의 끈질긴 악연과 뜻하지 않은 강생으로 현시대를 살게 되면서 온갖 굴욕을 겪어야 했다.

 상대는 주령을 퇴치한단 명목으로 시도 때도 없이 덤벼드는 주술사들이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협박을 하든 고문을 하든 비웃어 줄 여유가 생겼다. 고죠 사토루와 그의 제자라. 소름끼칠 만큼 재밌구만. 뭐든 상관없다. 죽기 살기로 버텨 주마.

 아무리 놈들이 주술사이고 이곳이 고전이라지만 나로서는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옷주머니에 주부를 넣고 다니거나 근처 서랍을 열기만 하면 주령 한정 고문 도구가 들어 있는 게 보통 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나를 겨냥해서 무언가 불미스런 목적으로 준비해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고죠와 메구미는 언제라도 이런 상황이 올 수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내가 진작에 도망치길 포기한 이유다.

 "시작부터 의욕만만이네. 오랜만인데 괜찮겠어?"

 "와, 이렇게까지 밝히실 줄 몰랐어요. 그럼 갑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시야가 온통 하얬다. 메구미는 천사처럼 빛을 받으며 내 이마에 주부를 붙였다. 한 장뿐일 거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곧이어 메구미가 주부 한 뭉치를 몽땅 뿌렸다. 고죠가 서랍에서 꺼내든 정체불명의 이상한 물건도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스물스물 다가왔다. 웬만한 주구와 주물을 다 겪어 봤지만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기괴한 물건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모자이크 처리해서 가려야 할 것 같았다. 결국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릇 안의 나는 너무 늙었고 더 이상은 이런 수준의 짜릿한 경험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군가 지나가다 이 소란을 듣는다면 절대 휘말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의미로. 물론 완벽한 착각이다. 예까지 와서 뭘 가리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는 차라리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그래도 일단 살아야지 않겠는가.

 정신이 아찔했다. 발악하며 소파를 긁어댔다. 아무리 질긴 가죽이라도 내 손톱에 찢어졌을 것이다. 시야가 혼탁해졌다. 나는 그릇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러자 대답이 돌아왔다. 진짜 대답한 건지 환청을 들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난 기억속에서 다시 한 번 내게 똑똑히 말했다. ‘후회할 거예요’. 그녀의 말이 한동안 귓가를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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