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지금 회피부득의 운명과 마주해 있다. 더는 외면할 수도 미룰 수도 없으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진작 결심했다. 이를테면 처음부터 이미 스스로 결정을 내린 일이었다. 단지 내가 너무 안일했다. 지금까지 그랬듯 이번에도 때가 되면 홀가분히 그를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여기서 다시 게으름을 피웠다간 이성적인 판단이든 무엇이든 흐지부지될 뿐만 아니라 완전히 꼬여 버릴지도 모른다. 내 인생은 꼬여 봤자지만 그의 인생은 가문부터 시작해서 다른 이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리 되면 더는 둘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된다. 심지어 꼬맹이도 있으니.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할 것이다. 과거에 대한 미련은 하물며 언제 어떻게 튈지 모르는 변덕스러운 감정 따위 중요하지 않다. 안 그러냐, 고죠. 너도 충분히 놀았겠지. 허무하나 별 수 없는 일이다. 빌어먹을 인생이란 다 그런 거잖아. 원래대로 돌아가자. 그리 당당하긴 어렵더라도 나는 분명히 말했다. 연애든 결혼이든 마음대로 하라고. 그러니 배신이 아니다. 원망한들 어쩌겠는가. 나는 괜찮다. 아무렇지 않을 테다. 고죠가 매정하게 돌아서도, 다른 년을 만나도, 뭐 어떠냐 이 말이다. 여하한 아무데서나 할 얘기는 아니므로 만날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으나 기별도 없이 그를 찾아갔다. 막 모퉁이를 돌 적에 그가 보였다. 고전 관계자로 보이는 계집과 함께 있었다. 둘이 딱 붙어서 전화기 화면을 들여다보는데 뭐 그리 재미나는지 주변의 눈치라고는 전혀 보지 않고 꼴사납게 시시덕거렸다. 발소리가 들리자 계집은 드디어 떨어진다. 고개를 까딱이며 겉치레 인사나 해대고는 홀랑 내뺀다. 고죠 이 놈도 그렇다.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었나. 누가 보면 꽃밭이나 뒹군 줄 알겠다. 두꺼운 낯짝으로 배시시 웃더니 나까지 살살 꾀어내 데리고 들어간다. 고죠가 사뿐사뿐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한편 머리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하니 있던 나는 심장이 철렁했다. 어느새 내 안에 무언가 역류하고 있었다. 피보다는 신물 같은 느낌으로 본능에 의한 반응이라 멈출 수 없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뜨거웠다. 뱃속에서 창자가 뒤틀렸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인내하면서 고죠의 품을 빠져나왔다. "가야겠다." "왜? 싫었어?" 하필 지금. 만지지도 못하게 하던 놈이 갑자기 변덕을 부린담. 저가 몹쓸 짓이라도 한 줄 알고 얼른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고죠였으나 그는 역시나 이상한 낌새를 채고 방에서 나가려는 나를 꽉 붙든 채 놓아 주지 않았다. 보아하니 잘못할 뻔한 것은 그새 잊었다. 그냥 좀 아리송한 듯 입 꼬리를 슬쩍 올리다, 하, 너털웃음을 짓는다. "기다려. 스즈카. 알겠으니까." "다음에 얘기하자. 제발, 놔라." "오해하고 있는 거잖아. 괜찮아." 그렇다 해도 나는 숨을 생각뿐이다. 머리로도 힘으로도 당해낼 수 없으니 당장 끓어번지는 독기를 써야 했다. 고죠가 내 손에 왁살스럽게 떠밀렸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데 어찌나 독기가 강했는지 퍽 하며 나까지 뒤로 휘청했다. "놓으라 했잖아! 바람둥이 놈아!" "나는 바람 안 폈어! 누구랑 달리!" 나는 꼬맹이가 아니지만 일단 지금은 고죠의 제자다. 학교에서 교사와 제자가 사랑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 잘났다고 큰소리다. 지난 10 년 동안 속에서 꺼내지 못했던 오만 복장거리가 부끄러움마저 가려 버린다. 고죠도 잊은 게 아니다. 메구미와의 일. 그보다 한참 전, 자기가 피 흘리며 죽어 갈 때, 내가, 말 그대로 적과의 동침을 저질렀던 일. 그래도 덤빌 테면 덤벼다. 나는 네가 여자랑 뒹구는 소리를 같은 방에서 다 들어야 했던 적도 있는데. 해 볼 테냐. 언제든 찌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까지 들춰냈다간 그때야말로 끝이다. "그러시겠지. 애초에 너랑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아무 사이도 아니구나. 그럼 붙잡고 늘어질 이유가 없네." "차라리 대놓고 놀든가. 그게 너잖아. 이제껏 그래 왔잖아." "하하하. 맞아. 아니면? 나도 너처럼 10 년을 허비해야 했어?" "말해 봐라. 그냥 말해. 저 년이랑 한 번이라도 한 적 있냐." "했다 해도 이제 와서 어쩔 건데. 너는 그때 어디 있었는데." 조금만 흥분해도 병자의 몸은 버티지 못한다. 벌써 숨이 찬다. 이대로 끝이라 해도 한심한 꼴을 보이긴 싫다. 어차피 더는 싸울 수도 없다. 예전에 싸웠던 거랑 비교하면 시작도 안 한 수준인데. 벌써부터 뿌옇고 캄캄하고 야단이다. 나는 마지못해 고죠에게 미안하다 사과했다. 목이 매여 똑똑히 말하지도 못하고 쓸쓸히 돌아섰다. 그만도 좋으련만. 붙잡혔다. 고죠가 나를 소파로 끌고갔다. 긁힌 상처가 아물기 전이다 보니 놔준 것이 내던진 것처럼 됐다. "나랑 어울리는 게 예전만큼 재미없지?" 고죠는 다만 여유롭게 내 옆에 앉았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이제 좀 재밌어?" 그가 대답 없는 내 옆얼굴을 보며 물었다. "⋯⋯." 오늘 내가 고죠를 찾아온 이유는 관계를 끝내기 위해서다. 점잖게 얘기한 뒤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는 상태로 헤어지면 더할나위없고 싸운다고 해도 별 수 없다. 여기까지 오면서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 정도는 해 봤다. 아무래도 준비를 더 단단히 하고 오는 것이 좋겠다. 별 것 아닌 척했지만 정신이 아찔했다. 질식할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자 밉상스런 입술이 보였다. 눈을 둘 곳이 거기밖에 없긴 한데. 거시기하다.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건지, 정신이 나가 버린 건지. 참을 수 없이 꼴린다. 속에서는 이미 안달이 났다. 고죠가 어물거릴 때 그건 줄만 알고 움찔했다. 아니 속은 게 맞다. 마음이 조금 풀린 모양. 슬근슬근 다가와서 키스하고는 쪽 하며 떨어졌다. "나, 기다렸어. 좀 더 있다 가면 안 될까." "고죠. 내가 무슨 얘기 하러 왔는지 아냐." "모르겠는데. 끝내자는 말이라도 하러 왔나." "맞아. 하나 그 얼굴이 내 마음을 바꿔 놓았다." "도대체 몇 번째야. 그럼 우리 아직 괜찮은 거네." "괜찮은 거냐."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는 네 표정만 봐도 다 알아." 나는 아이처럼 고죠의 품을 파고들었다.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클클 웃으며 내 머리를 떼어 놓는다. 어쩐지 망가진 기계 같다. 왜 이리 뻣뻣하냐 물으니 너야말로 겁먹지 않았냐 하고 다정하게 쓰다듬는다. "그 계집애는 뭐냐." "이지치랑 친한 동료. 걔가 철야하다 잠든 사진을 본 거야. 나한테 너무 심하게 부려먹는다고 웃으면서 눈치 줬어. 이지치 구운 허당 같은 데가 있지마안 이렇게 열심히라구용 하면서. 걔 좋아하나 봐. 웃기지도 않지. 내가 훨씬 전부터 이지치랑 알고 지냈는데. 너도. 너도 그래. 딱 보면 모르냐. 나랑 그 여자랑은 아무것도 없어. 아유, 진짜." 아무것도 없다고 보기에는 친해 보였다만. 사실 고죠는 여자에 한해서 호감이 없을 때 오히려 상냥하게 군다. 반대로 자기가 편하게 느끼고 좋아하는 여자한테는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구석이 있다. 알면서도 거기까지 생각 못했다. "스즈카.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 고죠가 말을 꺼낼 때 그리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평소와 달리 약간 긴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가져왔다. 아담한 크기의 금속 상자. 세월의 흔적에 가려졌으나 무늬나 장식이 또렷이 보였다. 꽤 값비싼 사치품이었을 것이다. 안에는 뭐가 들었는지 더욱 궁금해졌다. "무슨 얘기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냐." "막상 말하려니까 부끄럽네. 열어 봐." 장신구 아님 열쇠.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상자를 열었다. 그럼 그렇지. 상자만큼 오래된 반지였다. 다이아 박힌 백금 반지.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여염집 아씨가 단지 멋을 부리기 위해 손가락에 낄 만한 반지는 아니었다. "아무리 너라도 처음 볼걸. 할아버지 시대보다 뒤에 만들어졌어. 우리 가문 유산 중 하나야. 보다시피 한쌍. 즉, 결혼 반지인데. 이건 결혼 전에 껴. 예물보다 의식 용품에 가깝달까. 좀 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생각하면 돼." "드디어 결심이 섰나 보군. 결혼하는 거냐." "아니, 아니야. 나는 약혼하려는 거야. 너랑." "응?" "그러니까 약혼을⋯⋯ 너를 납치한다든가 어떻게 해 버릴 생각 없으니까 걱정 마. 지금은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한 물건일 뿐이야. 제대로 몰입하려면 이게 필요해. 그냥, 하루만 끼고 있어. 내 약혼자 역할이 되어 달라는 거야." "고죠, 당최 네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약속했잖아. 부탁 하나 들어 주기로. 잊은 건 아니지. 그때부터 계획해 온 일이야. 마침내 때가 됐어. 스즈카 네가 해 줄 일은 하나야. 본가의 어른들이 쓰러지지 않게 내 옆에서 양쪽의 이견을 잘 조율해 주기만 하면 돼. 어때." "농담하는 거지. 장난이 조금 지나치지 않으냐." 고죠가 내 손을 잡을 때는 마땅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까딱하면 을크러질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보일 정도로 차이가 난다. 그러나 함부로 떨어치지 못하게 손아귀에 울끈 힘을 주는 고죠다. 이게 정녕 같은 사람의 손이란 말인가. 입으로 가져가 꿀꺽 삼킨대도 이상하지 않겠다. 그럼에도 부둥켜 잘근잘근 주무르며 그는 시름을 토했다. "생각해 봐. 너한테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 사토루는 평범한 남자야. 사토루 군도 사랑하지 않는 여자랑 평생 함께하고 싶지는 않아. 거절하면 다음에는 정말 결혼할지도 몰라. 더는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도와줘. 나를 지켜 줘." 암만 잘났어도 가문도 등지고 다 져버릴 수는 없다. 오로지 자기 평안을 위해 싸우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 혈혈단신으로 어쩌랴. 이렇게도 다랑귀를 뛰니 나중에 모른 체하더라도 일단 달래는 수밖에 없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진정하거라. 네가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 알겠다. 이해해. 네 할아비도 처음에는 그랬어. 결혼하기 싫다고. 콱 죽어 버리겠다고까지 했다. 하나 그때뿐이야. 결국에는 너도 적응할 거다. 살다 보면 깨닫게 된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고죠가 자식을 얼마나 끔찍이 여겼는지 아느냐. 그래도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명분은 내가 아니라 지금 고죠를 말릴 수 있는 사람에게 있다. 나다. 나는 말하면서도 가슴을 졸였다. 과거에 큰 화를 입은 적도 있고 하니 아직 닥치지 않은 일도 빤히 보이고 겁을 집어먹을 따름이다. 그예 고죠가 손을 놓았다. 울화만 가득해서는 내 팔뚝을 소리도 나지 않게 팔싹팔싹 내리쳤다. 그리고 거반 목 놓아 울듯이 나를 타박했다. "거짓말쟁이! 배신자! 어떻게 진정해? 어떻게 네가 본가의 영감탱이들이랑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어? 내 심정이 어떨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어? 너야말로 왜 그렇게 태연한데? 좋아한다면서! 왜 나를 보내지 못해 안달이냐고!" "아! 아! 아파, 이 놈아. 지금은 나를 원망해도⋯⋯." "할아버지는 원망 안 했을까? 죽는 순간까지 원망했을걸? 스즈카 고젠. 어디 변명해 봐. 증거도 있거든. 가서 네 눈으로 직접 보는 거 어때. 할아버지 유품 전부 남아 있어. 할아버지가 너를 무덤까지 끌고 들어간 이유.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목숨 걸고 맹세했잖아! 맹세를 어긴 벌로 봉인됐던 거지. 어렸을 때는 이해가 안 됐어. 할아버지가 왜 화났는지. 왜 너한테 그렇게까지 했는지. 이제 나도 이해해." "그런 건 이해 못해도 된다. 네 할아비의 흑역사를 왜 지키고 앉았냐. 갖다 버려라. 태워 버려. 망측해서 원." 끝내 사토루까지 알게 된 진실은 내가 혼인하라 고죠를 몰아붙였고, 이별은 없다 맹세했고, 그 맹세를 지키지 않았다는 거다. 허면 내가 왜 그랬는지도 알 것 아니냐. 백 보 양보해서 모른다 치자.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것 같다. "할아버지를 두둔하는 건 아냐. 솔직히 정상이 아니잖아. 너를 봉인하신 뒤에 특히, 머리가 좀, 힘드셨던 것 같아. 나는 할아버지랑 다르니까 걱정 마. 끝까지 정신줄 놓으면 안 되지. 알았어. 선택하게 해 줄게. 나랑 약혼하든지. 죽든지. 발버둥쳐 봤자 너는 내 거야. 죽어도 고죠 가의 귀신으로 죽어. 내 살이 썩어 문드러져도 절대 나를 못 떠나." 아무래도 사토루가 낼 만한 목소리는 아니다. 대체 유품 속에 뭐가 있을까. 얼마나 더 괴망스러운 게 있을까. 화가 단단히 났을지언정 당주님께서 길거리 양아치마냥 죽이네 마네 하는 심정을 끄적여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남보기 부끄러운 일기나 편지겠지. 고죠가 나를 봉인하고 죽기 전에 썼던 글을 전부 모아 놓으면 한두 개쯤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병이다. 후손조차 두둔하지 못할 만큼 심각한 병. 절대 사토루가 감정이입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다급한 마음이 어떤 명분보다 앞섰기 때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선언했다. "약혼하자."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하하하. 물론이지. 고마워." 하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내 뺨에 그의 뺨, 안대, 귀가 닿았다. 코끝에 아른거리는 달달한 것. 과자보다 부드러운, 맑은. 약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마실 수 있는. 물을 올리며 옆에 준비해 놓을 법한 것들이었다. 말린 과일. 하나는 알겠다. 사과. 그리고 허브. 아니. 꽃이나 열매다. 사토루가 기분 전환을 위해 마신 따뜻한 차의 냄새였다. 유리병에 찻잎, 꽃잎, 말린 과일 따위가 담겨 있었다. 간식과 음료를 구비해 놓은 테이블 한편. 방에 들어올 때는 경황도 없었고 간지러운 냄새라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 맡아 보면 품격이 다르구나. 향긋하다. 나는 고죠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차피 결혼은 해야 된다." 못 들은 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참 나⋯⋯ 질투나 하지 말든가." 내게도 물러날 수 없는 일이 있다. 수백 년 전에도 다르지 않았다. 화를 내 봤자 어쩔 수 없다. 고죠도 아는지 얌전히 내게서 떨어졌다. 어쨌든 지금은 저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므로 그다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있잖아, 스즈카. 지금 껴 보자." "기다려라. 아직 엄두가 안 난다." "뭐가 그렇게 복잡해. 손 이리 줘." "그, 그만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냐." 고죠는 그새 자기 반지를 꼈다. 나만 받아들이면 되므로 거의 막무가내였다. 아무리 눈속임을 위해서라지만 이리 멋대로 굴어도 되는 거냐. 그래도 내게는 눈물겨운 순간인데 손은 내가 내놓고 싶어야 내놓는 거지. 놓지 않겠다고 손가락에 힘을 주어 꾹 찍어 누르는 통에 나는 아아 하면서 맥없이 끌려가 반지가 끼워지는 걸 지켜봤다. "어울려." 뺄까 봐서인지 그가 단단히 깍지를 꼈다. 나는 넋 놓고 있다가 기가 막혀 허허 웃었다. 물론 옛날 같으면 벌써 시집가 살림을 꾸렸을 나이다. 그래도 지금은 계집애의 손일 뿐인데 다이아 반지라니. 이쪽저쪽 깍지 낀 손을 뒤집어 가며 번갈아 보았다. 사토루 손. 내 손. 반지 한 쌍이 수면 아래서 보는 물결처럼 반짝였다. 가슴이 아릿했다. 하루가 지나면 더는 내 손에 끼워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격이 있는 다른 이에게 전해지겠지. 정말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뿐이라도. 허탈하면서 웃음이 났다. 그동안 내가 고죠에게 모질었고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나는 고죠의 손등에 입맞추었다. 그가 조금 머뭇거리더니 나를 따라 내 손등에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이제 됐다. 나는 반지를 상자로 돌려놓았다. 고죠가 못마땅하게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차나 한 잔 얻어마시고 싶다. 포트를 켜자 그가 알아서 두 잔 준비했다. 우리는 서로 기대었다. 여러 가지 맛과 향이 섞인 차도 나쁘지 않았다. 언제나 차보다는 과자나 사탕 냄새를 풍기는 고죠도 그렇다. 달달하고 어지러워도 왠지 마음이 놓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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