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죠는 지금 아무래도 나를 보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며칠 간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 한두 번 마주쳤을 뿐이다. 연락이 뜸해져 대화를 거의 나누지 못했다. 그가 나를 피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내 생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

 나를 향해서 전과 같이 웃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 한 번은 내가 간절해져서 고죠를 붙잡았다. 그는 조금 당황한 듯했고 내 말을 멍하니 듣고 있다가 내게 사과하며 자리를 피했다. 그의 팔이 손에서 빠져나갈 때 확신했다.

 내 잘못인가. 사실, 잘못한 것은 너무 많다. 그러나 최근에 갑자기 고죠가 변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제자들이다. 유지가 사귀게 되고부터 둘만의 세상에 빠져 즐거워하는 모습을 웃으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몇 번인가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고죠가 전화를 받는다 쳐도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고단한 해가 뉘엿뉘엿 이울었다. 들불처럼 타오르는 노을빛이 어스레해지고 안개처럼 습습한 바람이 불었다.

 방과후 저녁을 먹고 곧장 유지의 훈련을 시작했다. 유지는 금방 배운다. 메구미처럼 이해가 빠르다기 보다는 도저히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예리한 신경 그리고 초월적인 감각을 가진 녀석이다. 마치 짐승처럼.

 분명히 고전에 오기 전에는 검을 쥐어 본 경험도 없었을 텐데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힘은 말할 것도 없고 무인으로서 거의 완벽에 가깝다. 시작은 목도였지만 한 시간도 채 지나기 전 의미가 없다 느꼈다. 굳이 가르칠 필요 있을까. 혼자 둬도 알아서 잘 할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 유지, 네 문제가 뭔지 알아냈다. 겨우."

 "그쵸! 있죠! 문제가 없을 리 없잖아요! 뭔데요?"

 "너 말이야. 아까부터 방어를 전혀 하고 있지 않아."

 "방어요? 저어, 아까도 지금도 계속 하고 있는데요?"

 "그건 공격이지 멍청아. 내가 너를 공격할 때 너도 공격으로 맞선 거야.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맥락은 같아도 엄연히 달라. 알겠냐. 검은 네 손에 들려 있지만 무엇을 벨지 아무도 모른다. 자신을 지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고."

 뭐라도 가르칠 게 있으니 그나마 체면은 살렸다. 갑자기 큰소리를 내서일까. 현기증이 밀려왔다. 나는 미간을 잡고 말했다.

 "공격에 공격으로 너 자신을 방어하긴 쉬워. 그러나 방어는 네가 베고 싶지 않을 때도 마땅히 해야 하는 거다. 무슨 말이냐면⋯⋯ 너는 이 몸에 상처내기 싫잖아. 어떻게 나를 지킬 테냐. 적당히 봐주면서 휘두르는 건 소용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다시 해 볼게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머뭇거리면 안 돼."

 나는 검을 고쳐잡았다. 칼날에 붉은 하늘이 비쳤다. 까딱하면 머리가 댕강 잘려서 정말 붉은색으로 물들게 될 것이다. 그만큼, 유지 상대로는,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 녀석과 격돌한 상태에서 재빨리 빠져나오며 어깨를 부딪혔다. 유지도 이건 예상 못했는지 어어 하며 한쪽으로 기울었다. 이때 뒤에서 발로 엉덩이를 밀어 버리면 끝이다.

 "이거 참, 위험하구만. 하마터면 안길 뻔했잖아. 몰라도 나를 품에 안을 날은 아직 멀었어. 꼬맹아."

 "스즈카 쌤, 그런 식으로 놀리지 좀 마요. 귀엽지만요. 그래서 안 된다고요. 괴롭힘 당할 거예요. 남자들한테."

 "놀리는 거 아닌데. 풉, 걱정 마라. 네 여자 친구 몸은 잘 간수할 테니까. 늑대들이 넘보지 못하게 하면 되는 거지."

 "그보다 절대 머뭇거리면 안 된다니. 후시구로나 쿠기사키랑 훈련할 때도 그게 안 돼요. 하물며 제 여자 친구잖아요. 저기, 말 나온 김에 좀 어때요? 어⋯⋯ 긴장하거나 화들짝 놀라거나 하지 않아요? 아무리 제가 남자 친구고 이게 훈련이라도, 이런, 칼 같은 거 들고 막 달려드는데, 제가 무섭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어우. 닭살 돋는다고 팔뚝을 벅벅 긁으면서도 속으로 웃지 않을 수 없다. 훈련 감독으로서 한마디 하긴 해야겠는데. 병약한 여자 친구가 놀랄까 봐 못하겠다는 놈에게 무슨 충고를 해 주면 좋을까. 자식들. 귀엽다, 귀여워.

 "어쨌든 도 훈련을 받고 있잖아. 너한테 대련 상대가 되어 달라고 하면 어쩔 거냐."

 "아, 안 해! 안 할 거야! 나⋯⋯ 저는 숨을 가쁘게 쉬기만 해도 심장이 철렁해요."

 어우우. 이것도 어떤 면에서는 몸서리가 쳐지는 달달함이다. 몰래 보고, 대놓고 보고, 그러면서 누구보다 잘 알게 됐지만, 사랑이 눈을 가려 버렸다. 정작 뱃심 두둑한 호인인데 말이지. 나중에 제 여자 친구한테 놀라서 벙찔 녀석의 얼굴을 생각만 해도 우스워 죽겠다. 두고 봐라 이 놈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게야.

 " 보기 보다 약하지 않아. 언젠가 너희 꼬맹이들이 주저앉아 울고 있을 때 혼자 서 있을지도 모르지. 그거랑은 상관 없이, 지금은 극성맞은 남자 친구인 네 덕분에 녀석의 세상에 너 없는 곳이 없다. 나까지 꿈에서 너를 볼 지경이야. 그런 나를 왕따시키겠다는 거냐. 나는 너 때문에 더 고달파졌어. 그러니까 책임을 져라 이 말이야."

 "네, 노력은 해 볼게요. 물론 저는 스즈카 쌤이랑, 누구랑도, 두고 바람 피우지 않아요. 둘이 상관없다면 좋을 대로 하세요. 제가 세상 모르고 자는 동안에요. 대신 질투하면 안 된다든가 저희한테 무리한 요구 하지 마요."

 "질투가 나도 참겠다는 거냐."

 "전부터 그랬어요. 한테는 쌤의 일이 자기 일만큼이나 중요하거든요. 그리고 저도 알아요. 전학 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아직은 낯설고 무서워서 저한테 더 의지하는 거겠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저 없이도 잘 해낼 거예요."

 "글쎄, 그건 또 다른 얘기인데."

 지금은 서로 비슷한 입장이고, 성격도 잘 맞고, 이해관계가 적절하게 맞물리는 녀석들끼리 아주 잘 만났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꼬맹이들었다면 마음을 좀 더 느긋하게 먹어도 된다는 말을 해 줄 수 있었겠지만 둘 다 그런 여유는 없고 기다릴 필요 없다. 지나치게 의지해도, 집착해도, 전부 소진될 때까지 마음을 쏟아붓는 게 차라리 낫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지치기도 했지만 유지 녀석에게는 딱히 가르칠 게 없으니 나도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나머지는 주력인가. 주력을 다룰 줄 알게 되면 메구미를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거다. 뭐, 그건 고죠가 알아서 하겠지.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 쉬려고 계단에 앉았다. 유지가 내 옆에서 잠시 눈치를 보더니 내게 말했다.

 "저, 한테 들었어요. 술식이라고 하나요. 쌤이 가진 능력에 대해서. 도 잘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뭔가, 굉장한 느낌이던데요. 이미 모두의 앞에서 일어나 버린 일을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던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일이 가능하면 저도 스쿠나의 손가락을 삼키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내 마음대로 너희들의 운명을 주무를 수 있다면 참으로 편하겠구나. 세계 정복도 벌써 천년 전에 끝냈겠지. 운명은⋯⋯ 비유하자면, 아주 견고하게 설계된 빌딩이다. 작은 물건이나 가구를 옮기는 건 일도 아냐. 하지만 예를 들어서 건물을 지지하는 기둥을 쑥 뽑아 버리면. 어떻게 되겠냐. 네놈들은 철저하게 인과에 얽매여 있는 존재다."

 꼬맹이 녀석이. 무릎을 끌어안고 턱을 묻는다. 어쩜 하나같이 이리 똑같은지. 작년 유타에게 했던 말을 거의 그대로 반복했다. 녀석들에게 나는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이미 끝난 것도 앞으로 예정된 것도 바꿀 수 없다. 유타가 모두 이겨내고 훌륭하게 성장했으니 유지도 하다못해 자신의 선택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 믿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운명은 스스로 움직인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런 면에서 빌딩보다 나무라 표현하는 게 맞겠군. 운명이 나무의 뿌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보자. 그 뿌리는 고구마 줄기처럼 다른 뿌리들과 이어져 있어. 그게 인과다. 인연이라 볼 수도 있지. 잔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굵은 원뿌리가 나오는데, 원뿌리는 또 다른 원뿌리의 잔뿌리고⋯⋯ 어쨌든. 모든 것의 근원인 뿌리를 무리하게 쳐내면 나무는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 너희 인간들도 마찬가지야."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거예요?"

 "이해하지 못하는 거냐, 이해하고 싶지 않은 거냐. 내 술식은 결코 편의를 위한 게 아니야. 나도 너희를 돕고 싶지만 잘못 건드렸다가 병들기 시작하면 치료법도 없어. 상처는 알아서 아무는데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겠냐. 너뿐만 아니야. 너와 이어진 녀석들에게서 빼앗는 것이기도 하다. 네가 아무리 바보 같은 짓을 했더라도 최선의 방법은 그냥 내버려 두는 거야. 위로 뛰면 머리를 박고, 아래로 뛰면 무릎을 찧고, 어찌 해 볼 수도 없는 최악의 딜레마지. 게다가⋯⋯ 다 떠나서, 스쿠나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것 같으냐. 술식을 쓰기 전에 내 목이 먼저 날아간다."

 "제가 억누를 수 있어요.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요. 아니면, 그때 그 이상한 방에 들어가서, 묶여서라도⋯⋯."

 "안 돼.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해. 나도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살아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라. 애송아."

 "하지만 스쿠나가 해치면요. 더 많은 사람들을 해치면요."

 "주술사들이 알아서 판단하겠지. 나는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는다."

 그래도 조금은 희망이 담긴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어느새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다시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무러한 꼬맹이를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 현실을 바로 보되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걸 일깨워 주는 것이 어른이기도 하다.

 "이건 도박이나 다름없어.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지만 아무도 모르지. 판돈은 너다. 이타도리 유지. 누군가는 네게 주어진 결말이 지옥뿐이라 말하겠지. 그러나 고죠의 욕심이 정말 그 정도라고 생각한다면 너는 네 선생을 아직 모르는 거다. 너를 살린 것도, 목숨을 건 도박판 위에 올려 놓은 것도 녀석이지만, 결국 고죠가 원하는 건 너야."

 "저는 그런 얘기 처음 듣는데요⋯⋯ 만약에, 저 때문에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 그때는 고죠 쌤도 위험해질까요. 반대로 제가 스쿠나의 손가락을 전부 삼켜서, 그래서, 계획이 성공한다 쳐도. 고죠 쌤은 괜찮은 거예요?"

 "뭐, 적어도 웃고 있겠지."

 "예?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나는 유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무서워졌는지 유지가 입을 다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숙연해졌다. 지금은 다른 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머릿속이 희뿌연 연기로 가득하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소리 없이 사라진다.

 가끔은 그냥 멍하니 있고 싶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나서기도 싫다. 그러나 교대하지 않고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면 현실 감각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심할 때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애초에 왜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도 잊어버린다.

 "스즈카 쌤은 어때요."

 "나 말이냐."

 "저한테라도 말씀해 보세요. 요즈음 저랑 훈련할 때 빼고는 안 나오시잖아요. 왜 거기에 숨어 있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왜였더라. 피곤해서, 귀찮아서,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나지 않는다.

 "랑 얘기할 수 없을 때는 솔직히 쓸쓸해요. 좀 더 같이 있고 싶죠. 그래도 한편으로는 불안해요. 스즈카 쌤이 없으면요. 그렇게 갑자기 저희들 앞에서, 아니, 고죠 쌤 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리시면 안 돼요."

 "아⋯⋯ 미안하다."

 시야가 뒤틀려 보인다. 하늘이, 나무가, 본모습을 잃었다. 잠든 것처럼. 죽은 것 같기도 하다. 유일하게 변함없는 것은 유지다. 살아서 꿈틀대는 것.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질감이다. 이토록 살갑게 웃고 있는데. 낯설고 불쾌하다.

 "유지, 부탁이 있다."

 "네, 말씀하세요. 쌤."

 "언제든 돌아와도 좋으니까,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잠시만 스쿠나와 얘기할 수 있게 해 다오."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스쿠나는 제가 무슨 짓을 해도 무시해 버리거든요. 어쨌든 해 볼게요."

 유지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끙 앓는 소리까지 내 가며 애쓰더니 찜부럭한 얼굴로 한숨을 내쉰다. 확 찔러 버릴까라는 표정이다. 자신의 눈 밑에 있는 또 다른 눈을. 정말 찌르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겠다.

 "나와 주겠어? 영감?"

 "전혀 반응이 없어요."

 "내 영감이 보고 싶어 그래."

 "더⋯⋯ 조금만 더 해 보세요."

 "뵙기를 청하옵니다. 스쿠나 님."

 더럽게 치사하다. 그래도 닳는 것 아니니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이쯤이면 됐을까. 유지가 조용하기에 고개를 들었다. 저 한심하다는 표정. 눈빛. 차마 기분을 거스를 수 없거니와 민망하기도 해서 나는 도리어 살갑게 웃어 보였다.

 "다테에보시. 그게 무슨 꼴이냐."

 "부탁이니까 다른 이름으로 불러."

 "다른 이름 어떤 거? 인간 성애자?"

 "뭐⋯⋯ 누가 인간 성애자야! 누가!"

 "아니면? 배신의 대명사라고 할까?"

 나는 하늘에 대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순식간이다. 불안에서 벗어나 편안해지는 것. 마음이나 생각과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안전하다 느끼고 있는 거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의 존재만으로 모든 게 말끔히 해결되어 버린다.

 "이봐요, 영감. 이러다 정말 죽겠어요."

 "죽는다 죽는다 말만 하고 언제 죽어."

 "이번에는 진짜예요. 나 좀 살려 줘요."

 "시끄러워. 왜 또. 뭐 때문에 그러는데."

 나는 장난을 그만두고 두 자루의 검을 집어들었다.

 "우리 이걸로 겨룹시다. 끝장을 보자는 건 아니에요."

 "설마 임자⋯⋯ 이제는 검을 완전히 놓은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우. 방금 전까지 영감도 다 보고 있지 않았수."

 "뭐 볼 게 뭐 있어야지. 그건 애송이랑 하는 장난이잖아."

 "맞아. 여기서 내 적수라곤 영감뿐이야. 내가 더 빠르지만."

 "하."

 "근데 영감. 이 주구 엄청 비싸니까 부서지면 안 돼. 나 죽어."

 "알까 보냐. 고죠 사토루한테 가서 하나 새로 사 놓으라고 해."

 다른 건 몰라도 검만은 내가 한 수 위인데 말이지. 몸이 기억해내기를 거부한다. 신체적인 한계를 무시할 수는 없다. 저쪽은 그릇도 괴물 같지만 이쪽은 이미 언제 꼴까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몸이다. 이 스즈카 고젠인들 별 수 있나. 스쿠나가 대충 휘둘러도 몸이 크게 휘청하며 나가떨어진다. 그래도 잠깐 사이에 시야가 맑아진 것 같다.

 "얼마 전에 특급 두 놈이 고죠를 기습했다 들었어. 주술사들에게도 전혀 정보가 없다고 하던데."

 "특급이니 뭐니 들을 때마다 우습구만. 무슨 상관이야. 임자가 왜 그런 잡것들한테 관심을 가져."

 "주술사들이 잔예를 추적할 거야. 그렇게 되면 괜히 시끄러워질 거 아냐. 다음에 또 나타나면 죽여."

 처음에는 유지의 말을 흘려들었다. 스쿠나가 강생한 이상 어차피 조용히 지내긴 글렀으니까. 그런데 어쩐지 쌔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고죠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놈들과 아예 한패가 되기로 작정을 한 게로군."

 "나는 오직 내 편이야. 그건 의심할 것도 없잖아."

 "너무 뻔해."

 왱가당 검이 부딪혔다. 먹힐 법도 했는데. 몸통 박치기나 다름없었다. 진짜 나둥그러질 뻔했다. 스쿠나가 내 팔을 잡았다. 보아하니 좋은 마음으로 잡아 준 건 아니다. 기가 막혀서 원. 언제 일으켜 주나 보자 하고 객기를 부렸다.

 스쿠나가 허공에 반쯤 누워 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일단은 묻겠는데. 임자는 나한테 뭘로 보답할 거야."

 문득 붙들린 팔이 스쿠나의 손에서 스르르 미끌어졌다.

 "잠깐만. 생각해 볼게. 음⋯⋯ 고죠 사토루의 목은 어때?"

 내가 대답했다.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미소 그리고 목소리였다. 역시나 꿈쩍도 안 하는 얼굴. 찰나의 정적 끝에 스쿠나가 나를 미련 없이 놓아 주었다. 나는 꺄 하고 단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땅바닥에 까부라졌다.

 "영감, 너무하는 거 아냐? 진짜 손을 놔 버리다니!"

 "임자가 제대로 매달리지 않은 거야. 그때도 지금도."

 내가 고죠에게서 당신의 이야기를 처음 전해 들었을 때 지었던 한 번의 미소가 얼마 만의 웃음이었는지, 그건 영감이라 해도 모를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잊고 있었어. 당신이 있으면, 당신만 있으면, 인간들이 그저 우스워. 당신이 말할 때 내가 놈들과 분명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어. 심지어 끝나지 않길 바란다고.

 "꼭 애원해야겠어?"

 "못할 것은 또 뭐지?"

 "나한테 빚진 거 있잖아."

 그리고 나는 마침내 기억해내. 내가 누구인지.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모든 문제가 먼지처럼 허무하게 느껴져. 영감 덕분이야. 그런 당신을 따를 수도 있겠지. 저들에게 새로운 교훈을 줄 수 있겠지. 맞아. 그때만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아. 복잡했던 감정이 단순해져. 그게 무엇보다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어. 단순한 건 그냥 기분 좋거든. 하지만 당신 앞에서, 당신이니까, 나는 한심해지기도 해. 어차피 이런 나로는 영감도 만족할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임자는 내 손을 빌려서 성가신 놈들을 전부 죽인 다음 고죠 사토루까지 죽이려는 속셈이군. 그리고 임자도 따라 죽겠지. 관짝에 갇혀 있던 수백 년 동안 고작 그런 꿈을 꾸고 있었나. 놈과 같이 죽는 게 임자의 바람인가."

 "영감, 나는 당신을 알아. 어쩌면 줄곧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도 몰라. 인간이 이런 마음으로 저들만의 하늘을 바라보는 건가 싶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거든. 해방감을 느끼게 해 줘서 고마워. 겉모습은 유지지만 당신은 역시 당신이야."

 꼬맹이가 어쩌구 놀려서 미안. 사실, 이렇게 보면 어울려. 유지의 얼굴. 목소리. 그새 당신 것으로 만들었잖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비바람이 무섭게 불어닥치는데 천둥 치는 소리가 오히려 편하고 듣기 좋은 거야. 그런 기분이 들어.

 "뭐 해. 일어나."

 스쿠나가 싫증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저앉은 내가 마뜩잖은지 검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먼눈을 판다. 나를 최소한 굴복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면 그대로 올려다보게 뒀지 짜증내며 일어나라 하지 않았을 거다.

 "임자가 나를 이겨 봐."

 "이긴다 한들 뭐가 좋겠어."

 "그래, 이기면 뭐든 들어 줄게."

 지금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생각. 가질 수 없는 마음. 무엇이든 당신 옆에서 전부 이룰 수 있었어. 이미 옛날에. 그 사실은 영원히 바뀌지 않겠지. 사라지지 않아. 생각할수록 애틋한 게 이건 또 하나의 상사병 아닐까 싶기도 하구만.

 나는 일어나서 검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다테에보시가 보고 싶다면야. 스쿠나의 미간 주름이 좀 펴졌다. 꼬맹이들은 자러 갔으니 정말 제대로 해 볼까. 영감도 팔 하나 정도는 내어줄 각오가 되어 있는 거라고 믿겠어. 나 알잖아.

 한순간이나마 모든 걸 내려놓고 휘둘렀다.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문득 검만큼 예리한 것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위험한 물건을 쥐고 있지 않았다면 동요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참으로 활짝 웃었다. 신나서 검도 내던졌다.

 "반칙이야! 주력 썼으니 이번 내기는 내가 이겼어!"

 "뭐?"

 "그럼 미천한 여인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왕이시여."

 마음 같아서는 직성 풀릴 때까지 합을 나누고 싶지만 그러다 쓰러지면 영감에게 또 애원해야 하니 그만뒀다. 뒤돌아서 걷는데 그의 혼잣말이 들렸다. 주력 안 썼으면 부서졌다고. 쯧 혀를 차는 소리도. 불평은 꼬맹이 못지 않다.

 지금이라면 영감의 눈에도 보이겠지. 당신조차 상상 못했던 천년 후의 세상이. 과거에 나는 깨달았어.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타무라마로 그 빌어먹을 인간이 말했던 것처럼 아직은 그렇게 완벽하지 않지만. 정말이지 조용해. 어디에서도 비명이 들리지 않아. 피 냄새가 안 나. 자신의 존재를 잊을 만큼. 너무 지루해서 죽고 싶어. 솔직히 인간이 부러웠어. 편드는 게 아니라 놈들이 재미를 볼 차례인 거야. 나랑 같이 조용히 뒤로 물러나는 거 어때.

 이런저런 말들을 가슴에 담아 두고 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쓰러지기 전에 몸을 의지할 침대만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 가는 길을 막아서는 놈이 있었다. 이게 누구신가. 담탱이 얼굴이 보인다. 입밖에 안 보이지만.

 "왜."

 내가 아니꼬와서 입을 열면

 "그냥."

 하고, 웃는 낯짝으로 대답한다.

 "뭘 봐."

 더 아니꼬운 소리로 쏘아붙여 봐도

 "예뻐서."

 이렇게, 조금도 지지 않고 능청을 떤다.

 "이 놈이⋯⋯ 썩 꺼져! 아니, 뒈져 버려!"

 이제 와서 떠들면 뭐 하나. 떠들어도 뭐라고 할 것이냐. 난데없이 팔을 붙잡힌 나는 말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어디 들어나 보자. 묵묵히 눈초리를 올리고 바라보았다. 며칠 만에 낯짝을 들고 와서 너는 뭐가 그리도 잘났느냐.

 "너, 정말로 죽고 싶은 거로구나."

 "지금은 그냥 너랑 뽀뽀하고 싶어."

 "미안하지만 달리 임자 있는 몸이다."

 "그럼 너⋯⋯ 나한테 거짓말했던 거네?"

 "무슨 소리야. 유지가 쫓아올 테니 놔라."

 "네 입으로 말했잖아. 내가 끝이라고. 나를 마지막으로 끝내겠다고. 미안하지만 이제 누가 뭐라 해도 내 거야. 며칠 동안 좀 모질게 굴었지. 미안해. 근데 그렇게 안 했으면 너한테 지금보다 더 꼴사나운 모습 보여 줬을지도 몰라."

 고죠의 입에서 꼴사납다는 말이 나오다니 우습다. 얼굴까지 손이 닿지 않으므로 나는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몸을 숙이게 한 다음 안대를 벗겼다. 전혀 모르겠다. 마음이 그냥 살살 녹아내린다. 잘생기기만 했구만. 뭐가 문제야.

 "유지가 네게 그렇듯이 너도 질투나더냐."

 "그래도 유지는 귀여웠잖아. 나는 아니야."

 다 큰 남자가 질투해도 꼴사나울 뿐이니까. 이렇게 말하며 내 손에서 안대를 빼앗아 다시 써 버리는 고죠다. 그런데 정작 내가 기억하는 어린시절의 고죠는 화만 낼 줄 알았지 혼자 삭히거나 샐쭉해서 딴청 피우는 짓은 안 했다.

 "귀여워."

 "뭐?"

 "귀엽다 했다. 질투난다고 숨은 것도, 이렇게 나타나서 가지 말라고 붙잡는 것도, 사랑스러워 죽겠다. 애초에 누구 잘못도 아니지만 예전 같았으면 꼬라보면서 욕이나 쳐하고 지랄했을 거 아니냐. 샐쭉거리는 너를 더 보고 싶다."

 예전에 내가 그랬던가. 이런 느낌으로 고개를 살살 기울인다. 뭔가 생각난 듯. 또 살살 돌려서 딴청을 피운다. 다시 이쪽을 보는 얼굴은 그나마 부끄러움을 아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입 꼬리가 둥글둥글. 말랑말랑 예쁜 척이다.

 "사토루 군은 뭘 해도 귀엽구나."

 "아, 그럼. 어느 때보다 더 귀엽지."

 "하하하.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야. 그냥 얘기 좀 하다가 유지랑 기숙사로 돌아갈래? 아니면 나랑 뽀뽀할래?"

 "뽀뽀를⋯⋯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너도 참. 새삼스럽게 뭘 걱정하고 그래."

 뒤통수로 손이 다가왔다. 고죠가 그대로 나를 제 품에 끌어당겼다. 이건 무하⋯⋯ 한까지 생각했을 때는 이미 도피 끝이었다. 무슨 동영상도 아니고. 주변 풍경이 어디서 떼다가 붙인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다. 숲이었다. 고전에 비슷한 장소가 하도 많아서 정확히 어디로 도피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야 무하한이니까. 원래 이런 거겠지 뭐. 갑자기 당하면 여지없이 벙찌게 되지만 익숙하게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긴다. 둔해졌던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그게 무하한이라면 얘는 사토루고. 나는 나지. 꾹 눌러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래 사토루 너 좀 맞자. 넙대대한 가슴팍을 때렸다. 별로 힘 주지는 않았다. 세게 때릴 기운이 남았겠는가.

 "봐, 내가 좋은 디딤돌을 찾았어."

 "너무 높아⋯⋯ 아니, 딱 맞는구만."

 올라서기 힘든 디딤돌이라 해도 언제든 마음에 드는 받침대를 찾으면 흐뭇하게 웃지 않을 수 없다. 바지랑대 같은 고죠와 눈높이가 딱 맞지 않은가. 힘들게 젖히거나 숙이지 않아도 키스할 수 있다. 이만하면 훌륭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부둥켜안고 입맞추었다. 놀라울 만큼 안정적이었다. 몸이 달아서 숨소리만 거칠게 늘어질 뿐이다.

 딱히 사랑에 눈먼 것도 아니다만 이대로는 눈에서 피가 나도 모를 거다. 이토록 어지러운 욕망인데 위험하지 않을 리 없다. 삼키지 못하면 뱉어야지 별 수 있나. 이제 됐다 밀어내면서도 떨어지는 소리가 지지리도 끈질기고 야릇하다. 촉촉한 입술 뜨거운 숨에 다 엉겨붙었다. 못내 아쉬워 떨린다. 그럴 만큼 절절하다. 다음은 없는 것처럼.

 "웃기고 있네! 이게 마지막이지!"

 "뽀뽀 안 해 준다고 나 버릴 거야?"

 꿋꿋이 안겨 있는 나만큼 고집스럽다. 나도 따져 묻고 싶었다. 바람필 거냐 버릴 거냐 묻는 건 대체 무슨 심보냐고. 협박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 물으면 차마 화낼 수도 없다. 그저 답답한 내 마음만 늙고 흉하게 일그러진다.

 "바람 안 펴. 안 버려. 그러나 더는 안 된다. 이대로는 무리다. 도저히 못 참겠단 말이야. 분명히 말해 두는데. 듣기 좋은 말은 필요 없어. 사랑도 싫고 다 싫어. 네 몸뚱이 내놓을 준비나 해라. 망할 담탱이. 지긋지긋한 원수 놈아."

 "귀여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네."

 고죠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상적인 행동이지만 그 손길에는 좀 더 특별한 애정이 담긴 듯했다. 디딤돌을 써서라도 꺽다리에게 안기려는 내 모습이 생각만 해도 웃겨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못내 킁 삼키고 그를 놓아 주었다.

 "이제 알겠지. 너랑 나. 당분간 떨어져 있는 게 낫다."

 "음⋯⋯ 유지랑 절대 안 떨어지려 할 텐데."

 "지금은 그렇겠지. 내가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지겠다."

 나는 디딤돌 위에서 뛰어내렸다.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빌어먹을. 여기가 어디야.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스즈카.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나를 멈춰 세운 고죠가 내게 말했다.

 "너, 정말로 내가 죽었으면 좋겠어?"

 "너는 아직도 나를 살게 하고 싶으냐!"

 "미안, 더는 바라지 않을지도. 하하하."

 "풉! 하하하!"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내가 들어도 말이야.

 "내일 보자."

 천년 전의 주술사들은 그렇게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살아 남았다. 그때와 같은 희망이 언제나 있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패배와 좌절이 눈에 선한 것도 사실이다. 고죠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어쩌겠는가.

 우리 다 죽을 거야. 몇 번이고 억지로 삼킨 말이었다. 그래도 빌어먹을 헤이안 시대보다는 여러 면에서 낫다고 본다만. 결국에는 네놈들이 이겼으니까. 지금까지 잘 싸워 왔으니까. 자신의 불안 뒤에 가려진 희망을 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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