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을이 깔린 길. 익숙한 듯 낯선 그림자가 보였다. 평소와 사뭇 다른 모습에 무엇보다 수트를 입고 있어 좀 더 일찍 알아보지 못했다. 답답한지 외투를 벗고 넥타이를 끌어내리며 성큼성큼. 고죠가 걸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멈추어 섰다. 그냥 못 본 척하려다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휘파람을 불었다. 그래도 고죠는 고죠라 웃음이 나왔다.
"기분 좋았냐." 나는 히죽거리며 능청을 떨었다. 고죠가 귀찮은 듯 고개를 돌리고는 평소보다 조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아니, 맞는데.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기분이 좋아질 만한 일은 없었어. 이건 다른 명목의 비즈니스야. 알겠어? 약속 장소에 나가서 '저희는 이런 가문입니다' 소개받고 도장 찍으면 끝이라고." "어쨌든 내 앞에 나타나서 자랑했잖아. 나는 가끔 비싼 옷 입고 돌아다니는 도련님을 보면 신발부터 안경까지 다 뺏어 버리고 싶어지거든. 이건 농담이 아냐. 그래서 어떻게 됐어. 이번에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 줄 마음이 들더냐." "나 좀 봐주라. 원한다면 다 너한테 줄게." "흠. 어쩔 수 없구만. 오늘만 봐준다. 가 봐." "일진 씨. 내가 같이 밥 먹자 해도 안 때릴 거죠." "밥을? 나랑? 아, 거기 메뉴가 별로였나 보구나." "너⋯⋯ 내가 여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왔는지 알아?" "지금은 좀 곤란한데. 봐라, 기숙사 통금 시간이잖아." "아유, 착해라. 애들은 그렇다 치고 너는 뭐가 문제야." "마사미치가 지키지 않으면 패널티를 준다고 했어." "그랬구나. 걱정 마. 내가 당장 이 양반한테 가서⋯⋯." 꼬르륵. "하하하. 배가 많이 고프냐. 네놈은 배꼽시계마저 제멋대로구나. 라면은 끓여 줄 수 있는데 어쩔래." "네 말은, 나더러 제자의 방에 들어가라는⋯⋯ 아, 알았어. 뭐든 좋으니까, 빨리 와. 누가 보기 전에." 초대는 내가 했건만 고죠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방에는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아 책상 의자를 내어주려다 그냥 침대에 걸터앉게 했다. 스툴을 놓아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마땅히 앉을 곳이 없다는 걸 실감하고 하나 장만하기로 했다. 고죠가 앉으면 어린이용 의자나 다름없겠지. 라면이 끓는 동안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먹을 만하냐." "저는 미디움을 주문했는데 웰던이 나왔어요. 농담이고, 잘 먹을게." "미안하게 됐다, 이런 거밖에 없어서. 뭣하면 지금이라도 집에 가든지." "나라고 집 가면 호화 생활이 기다리고 있겠냐. 나도 혼자 사는 남자야." 그것이 자유의 대가라면 동정받을 이유는 없다. 이러쿵저러쿵해도 결국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는 걸 택한다. 때로는 고민하는 그들의 모습이 가증스럽고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라 아예 귀를 막아 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서 고죠가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하면 아마도 나는 자리를 피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뜻하지 않은 우연이 겹쳐서 이렇게 마주앉아 있는 것이나 그가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건 나쁘지 않다. 남자애들을 보면서도 생각했지만 한 번 집을 때의 양이 내 두 배인데 그걸 한입에 다 먹는 게 신기해서 무심코 쳐다보게 된다. "왜 그렇게 봐. 아직도 물어보고 싶어? 그, 내 계약 상대에 대해서." "다른 의문이다. 너는 강하잖아. 그런 네가 무엇이 그리 힘이 드냐?"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어려운 질문이네. 그냥 다 그런 것 같아. 지금도 불어터진 인스턴트 라면을 먹고 있지만 이 방에 들어오기까지 많은 고민과, 걱정과, 이성의 장벽이 있었어. 나는 그냥 너랑 잡담을 나누고 싶을 뿐인데 말이야." "굳이 따지자면 제일 나빴던 건 타이밍이지. 알겠냐. 그러는 거 아니다." "미안하게 됐네요. 너도 사람이 먹고 있을 때 빤히 쳐다보는 거 아니야." 식사 자리에서 무례함의 정도를 따졌을 때 짙은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는 것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등을 떠밀려 나간 자리였다지만 설마하니 만남 중에도 계속 벗지 않은 건 아니겠지. 그건 그렇고 잘 먹네. 세 개 끓일걸 그랬나. 생각하는 동안 점점 흥미로워져 그에게 좀 더 시선을 두고 있었다. "먹은 다음에는 돌아가는 거냐. 혹시⋯⋯." "앗 뜨⋯⋯ 당연하지. 밥 먹으러 온 건데." "그래. 그럼 산책이라도 하자. 배웅해 줄게." "됐어. 오늘은 충분히 걸었으니까. 다음에 해." "보아하니 혓바닥만 데인 게 아닌 모양이군. 여기까지 와서 거절이라니. 얌전해진 만큼 싱거운 놈이 됐잖냐." "꼭 기억해야 돼. 오늘 네가 나 초대한 거. 너랑 나는 이미 공범이 된 거야. 목격자도 있으니 발 빼려 해도 소용없어. 너는 생각해 본 적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야. 그러니까 너도 아직은 내 손 놓지 마." |
<제작> Copyright ⓒ 공갈이 All Rights Reserved. <소스> Copyright ⓒ 카라하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