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수업까지는 여유가 있다. 전화기로 틈틈이 시간을 확인하며 커피를 찾아 휴게실로 향했다. 시간에 쫓겨 벌컥벌컥 들이마시다 혓바닥을 데이기 일쑤지만 꾸벅꾸벅 졸다 복도 청소를 하는 것보다는 낫다. 슬슬 뛰어야 할까.
문을 열자마자 머리부터 내밀다 고죠와 딱 마주쳤으니 이미 내딛은 발을 어찌 해 보기에는 늦었다. 발목을 삐는 것 정도는 감안하고 재빨리 피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고죠가 다칠 리는 없으므로 그냥 들이받았다. 몸통박치기다! "미안하다!" 그럼에도 고죠가 놀란 게 의외다만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의 가슴팍을 때렸다. 덩치 큰 것이 무슨 쓸모가 있나 싶다가도 이럴 때는 참 좋다. 훌륭한 매트리스로다. 문제 없다. 놈에게 능력이 있는 한 전부 용납되는 일이다. 보다시피 고죠는 아무렇지⋯⋯ 부딪힐 때 철퍽 같은 소리를 듣고도 그게 뭐였는가는 그제서야 알았다. 철퍽의 이유를. "너 왜 젖었냐." "그러게. 왜 내가, 직접 내린 커피에 쫄딱 젖었을까. 부딪힐 때 내 생각은 안 했다고 말하면 믿으려나." "부딪혀 오는 나를 무사히 받아내고서 한낱 커피는 어쩌지도 못하니. 너 참 알 수 없는 녀석이로구나." '아 뜨거워'. 고죠가 이렇게 투덜대며 제 옷을 움켜쥐니 나는 비로소 정신차리고 다급히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커피가 옷에 다 스며들었다. 이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우왕좌왕, 여기저기 탁탁 두드려 가며 일단 닦고 봤다. "어딜 만져. 거, 거긴 하나도 안 젖었어." "당주님인데 혹시라도 여길 데이면⋯⋯."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아나 보네." 고죠가 손수건을 낚아채 커피를 마저 닦았지만 이미 셔츠까지 젖은 만큼 의미가 없었다. 겉옷은 어차피 검은색이라 눈에 띄지 않는다 해도 안에 입은 순백의 셔츠는 선명한 흑백으로 변해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해 보였다. "음⋯⋯." "뭐야. 할 말 있으면 해 봐." "내 잘못이니 변상해야겠지." "그게 다야? 사과할 줄 몰라?" "그런 걸 꼭 말해야 아냐. 남사스럽게." "네가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 보고 싶네." "속좁은 놈. 까짓것 새로 사 주면 되잖아." "하하하. 그래, 이 까짓것 별것 아냐. 너한테 인색하게 굴어 봤자 나만 손해지. 하지만 이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거든. 네 말에 책임져. 무리라는 거 아니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정도는 줄게. 됐으면 이리 와. 귀 가까이 대." 기어이 마음의 준비까지 했건만 자신이 저지른 일의 대가를 진정으로 체감하는 그 순간에는 아차하고 눈앞이 아찔했다. 머릿속은 환청이 울리는 것처럼 요란했다. 두두. 두두. 굴삭기로 땅 파는 소리나 건물을 까부수는 소리와 비적할 만한 그것은 다름아닌 생계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머리가 감당하지 못하면 몸은 자연히 겸손을 취하고 지갑을 꺼내기 위해 주머니를 마구 헤집던 손도 알아서 제자리를 찾듯 무릎으로 기어올라 넙죽 엎드린다. "내게 말미를 좀 다오." "그밖에 하고 싶은 말은." "미⋯⋯ 으윽. 안 해! 못해!" 외람된 얘기다만 고죠가 고등학생일 적에는 물론 고죠 가의 하수인이 학교에 드나드는 일은 없었고 대신 내가 놈의 방을 청소했다. 태어나 한 번도 제 손으로 방을 치워 본 적 없는 도련님의 방이다. 고죠도 고죠지만 고등학생 사내 놈들이 거칠기로는 저잣거리 왈패 내지 짐승이라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청소로 골병나는 것은 예삿일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한때는 고죠의 옷을 세탁하는 것도 내 일이었으나 나라고 집안일에 썩 기지가 있는 것은 아닌지라 그저 잡히는 대로 욱여넣었다. 하물며 돈 머리 없는 내가 그걸 팔아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어찌 알았을까. "하아⋯⋯ 가끔은 네가 그 얼굴을 제대로 이용할 줄 아는 것 같아서 열받아. 으이그, 울지 마. 어쩔 수 없지. 그럼 대안을 제시할게. 어렵지 않으니까 긴장할 거 없어. 우리 집에서 일해. 5 일 정도. 그리고 부탁 하나 들어 주면 돼."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결국 또 네놈의 치다꺼리냐. 어차피 달리 선택지도 없으니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만, 너도 알다시피 내 손이 검을 다루는 것 외에는 별로 야무지지 못해. 지금 네 사용인에게 폐를 끼쳐도 나는 모른다." "잘하는지 못하는지 그냥 게으름피우는 건지 그런 건 내가 판단하는 거고. 네 말대로 폐를 끼치면 안 되겠지.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신세졌는데 제대로 감사 드리지 못했네. 이참에 화끈하게 휴가 한 번 보내 드려야겠다." "그래도 집안일보다 제자의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버리지는 않겠지. 부탁이라는 건 뭐냐." "나중에 자세히 얘기할게. 곧 수업 시작하잖아. 이러다 스승이랑 제자랑 사이좋게 지각하겠다." 기운내라는 듯 고죠가 내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 마지못해 웃으면서도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나설 때의 여유를 보아 여벌이 있을 것이다. 어딘가의 라커 안에 터무니없이 비싼 셔츠와 함께 걸려 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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