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나 오늘이나 후쿠오카에서 만큼 한가지는 않지만 도쿄나 기숙사도 한 번 익숙해지면 뭐 그럭저럭 괜찮다. 가끔 이렇게 교직원 휴게실 문을 당당히 열고 들어가 소파에 늘어져도 다들 그러려니 할 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늘은 휴게실이 조금 북적였다. 나를 포함해 네 명이 둘러앉았다. 서류를 훑어보는 나나미와 커피를 마시는 쇼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고죠는 아까부터 맹한 얼굴로 전화기만 만지작만지작하고 있다. 따분한 침묵이 흐른다.

 나는 아무나 들으라는 듯이,

 "어어, 지루해 돌아가시겠네!"

 하며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러나 서류를 넘기고, 커피를 홀짝이고, 톡톡 화면을 두드리는 소리만 돌아온다. 답답해 뛰쳐나온들 애들은 너무 시끄러워서 문제고 다 큰 녀석들은 뭘 해도 이런 반응이니 인간 놈들 다 소용없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조용한 거 같은데. 평소에 까불대기 좋아하는 놈이 오늘따라 새색시처럼 다소곳이 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는군. 누군가의 따가운 눈초리에 새삼 주눅들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부끄러움이라도 느끼는 건가."

 "그러고 보니 고죠가 얌전하네."

 생각해 보면 지난번 데이트 이후로 줄곧 얌전했던 것도 같다.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은 걸까. 단순히 지금 행복하지 않은 걸 수도. 어쨌든 쇼코가 맞장구쳐 준 덕에 나는 눈치 보지 않고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죠."

 바로 옆에서 불러도 고죠는 대꾸가 없었다. 반대쪽으로 슬쩍 돌아앉고서는 애꿎은 전화기만 계속 괴롭혔다. 시무룩한 입 꼬리가 전처럼 득의양양하긴커녕 한껏 청승을 떨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뺨도 좀 불그스름한 것 같다. 열이 있나. 그밖의 이유는 두 가지 정도가 있다. 수줍음을 느끼고 있거나. 화났거나.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나는 고죠에게 손을 뻗었다.

 "어찌 그러느냐."

 닿기 무섭게 그가 투덜거렸다.

 "내가 어떻다는 거야. 그보다 왜 여기 있어. 방과후 자습 게을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얼른 기숙사에 들어가."

 방과후. 그러니까 수업은 끝났다. 엄연히 따지면 땡땡이를 친 건 아니다. 교직원 휴게실에 들어올 때도 나름 품위를 지켰다. 고죠밖에 없었다면 그럴 필요 없었겠지만. 구차한 변명 따위 생각해 두지 않았으므로 그냥 둘러댔다.

 "뭐냐 그 터무니없이 많은 숙제는. 나는 그런 것을 배운 기억이 없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어쩌란 말이야. 너야말로 애들은 자습시켜 놓고 지금 나몰라라 하는 거 아니냐. 담임이면 담임답게 좀 더 책임감을 가지는 게 어때."

 고죠가 수업을 빠지거나 자습을 시킬 때 정말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런 일이 갈수록 잦아져 섭섭하다. 그냥 그렇단 거지 나는 유구무언이다. 그의 제자에게 부적절한 친밀감을 표현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한테 오지 말고 나나미 옆으로 가. 저기가 더 넓잖아."

 "뭐?"

 "본인이 거기에 앉고 싶다는데 왜 제 옆으로 가라 합니까."

 "그러게 말이야. 잘 들었지. 어디에 앉을지는 내가 정한다."

 일 때문에 골치가 아픈 듯 나나미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지금은 귀찮게 하면 안 될 것 같다. 고죠는 기다란 다리를 쭉 뻗고 소파에 늘어졌다. 자꾸 엉뚱한 곳을 쳐다보는 게 햇빛을 피하려는 것도 같고 무언가 감추려는 것도 같았다. 딱히 짐작가는 곳이 없었다. 있다고 해 봐야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아주 작은 피부 트러블 정도였다.

 "너는 왜 어른이 되어서 새삼 그런 게 다 나냐. 아직 젊구나."

 괜한 말이었는지 고죠가 제 뺨을 딱 가렸다. 너 때문에 그래. 나한테는 이런 면박을 주고 쇼코한테는 갑자기 애가 되어서 아프다는 둥 치료해 달라는 둥 그야말로 어리광에 가까운 투정을 부린다. 사실 이 정도는 애교나 다름없다.

 쇼코는 쳐다보도 않고 잠이나 자라더니 저리 두면 귀찮게 굴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몇 마디 덧붙였다. 피로와 스트레스에 의해 면역력이 약해졌을 뿐이므로 잠만 푹 자고 일어나도 시답잖은 걱정들과 함께 깨끗이 사라질 거라는 뻔한 얘기였다. 나는 고죠에게 까짓것 나도 있으니 부끄러워할 것 없다 하면서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실례합니다."

 누군가 휴게실 문을 두드렸다. 정중히 노크하고 들어온 사람은 이지치였다. 임무를 가져올 때는 겨드랑이에 끼운 태블릿이 필수다. 고죠가 어떤 상태인지 아직 모를 텐데도 들어오자마자 분위기부터 살피고 내 눈치까지 본다.

 "스즈카 씨, 잠깐 괜찮습니까. 두 분께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저, 고죠 씨에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그래, 편하게 얘기해라. 우린 그냥, 그거다. 고죠의 얼굴에 난 피부 트러블 얘기를 하고 있었을 뿐이니까. 훗."

 "쓸데없는 말 하지 마!"

 "피부 트러블입니까⋯⋯."

 이지치가 뿔테 안경을 들어올리며 고죠를 똑바로 그리고 유심히 바라보았다. 호기심 하나로 다른 건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여전히 그런대로 귀여운 후배라는 생각이 든다. 저도 모르게 꼬맹이 시절처럼 배시시 웃는 걸 보면.

 "고죠 씨, 혹시 사랑을 하고 계십니까?"

 "사⋯⋯ 뭐래. 너 인마, 무슨 헛소리야!"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예전에 그런 말 있었잖습니까. 갑자기 얼굴에 생기는 건 사랑에 빠졌다는 뜻⋯⋯ 이를테면 청춘의 증거인 거죠. 고죠 씨도 사람이고, 남자이고, 평범하게 연애라든지 고민하실 때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입 다물어. 너 네가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알아? 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바보니까 놀랍지도 않은데, 개그를 치려면 제대로 생각하고 쳐. 게다가 그건 첫사랑일 때 얘기지. 내가 지금 몇 살인데! 첫사랑이겠냐? 어? 이 나이에!"

 누가 봐도 이지치가 잘못한 것은 없다. 그러니 어쩌랴. 고죠도 진짜 화낼 수는 없고 다 먹은 과자 봉지만 죄다 던져 버렸다. 그것만으로 이지치는 어쩔 줄 몰라했지만 팔랑대다 떨어지는 꼴이 우습거니와 말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고죠는 예나 지금이나 다정한 면보다 가혹한 면이 많은 선배다. 그래도 꿋꿋이 버티는 이지치를 보면 저쪽도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런 면에서 제대로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게토 외에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곁을 내주지 않았던 고죠에게 현재로써는 그나마 이지치가 동료이자 파트너에 가장 가깝다 볼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지치만은 끝까지 고죠 편에 남아 줬으면 한다. 그러니까 적당히 해라 이 놈아. 어느새 자기가 마시던 커피로 이지치를 위협하고 있다. 말리는 시늉이나 하며 거들어 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역시나 쇼코는 본 체 만 체였다.

 "근데 말이야. 너희, 언제부터 다시 만질 수 있게 된 거야?"

 쇼코의 너무나 태연한 질문에 고죠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관심도 없다가 뒤늦게 알아차린 나나미는 질색하며 굳어 버렸고 이지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안절부절하더니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서는 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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