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 앞으로의 일들도 막연하고 모든 것이 귀찮아지는 시기가 돌아오면 나는 방관자로서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이를테면 오늘. 꼬맹이들의 데이트 날. 불쑥불쑥 대화에 끼어드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웠다.
돌아올 때는 유지가 여자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 줬다. 짐도 들어 줄 겸. 어리지만 내가 봐도 듬직한 친구다. 애인으로도 손색 없을 것 같은데. 과연 어떨지. 이 몸도 고단했을 테니 방까지 짐을 나르는 역할은 내가 넘겨받았다. '저랑 잠깐 얘기해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가 어색하게 흘러갈 것을 예상하기란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에게 고마웠다. 유지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은 고죠와 나도 진즉 눈치챘고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고죠와 나의 관계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시작됐다. 녀석은 몰라도 내 입장에서 보면 고작 수십 년 정도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유지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도 한계가 있을 테니 묻는 것에만 대답하기로 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한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유지는 내게 생각보다 많은 질문을 했지만 내가 말하는 중에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러고는 돌아갔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것 같다. 유지와 헤어지고 방 앞에서 뜻밖에 고죠와 마주쳤다. 그는 노크를 하려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말없이 문 옆으로 비켜섰다. 굳이 손목시계를 보지 않아도 창밖을 보면 방문자를 받기에 적절치 않은 시간임을 알 수 있었다. 고죠를 밀쳐내고 문고리를 잡았지만 문을 열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망설여졌다. 그런 내게 생각할 틈도 주지 않은 것은 갑자기 옆 방에서 들린 소리였다. 나는 고죠의 팔을 잡아당겼고 그와 함께 현관까지 들어온 뒤 문을 닫았다. "뭐야? 키스?" "쉿, 조용히 해."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물론 키스 따위는 생각도 못했는데 본의 아니게 고죠를 벽으로 밀쳤다. 벽쿵이라고 하던가. 어쨌든 가까운 정도로 따지면 그런 생각이 든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였다. "술 마셨냐." "응." "그렇다고 여자 기숙사에 불쑥 찾아오면 어떡해." "그럼 나는 어디로 가야 돼. 너랑 단둘이 있으려면." 나도 모르게 고죠를 때렸지만 소리라도 들렸다간 큰일이니 때리나마나였다. 바깥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서둘러 그와 떨어졌다. 볼이 빨갛게 익은데다 선글라스 너머 눈이 반쯤 풀린 것으로 보아 취한 게 분명했다. 고죠는 술에 약하다. 면역이 없다기 보단 술을 좋아하지 않아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입에 대지 않는다. 고죠 가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제사니 대작이니 억지로 독한 술을 마실 수밖에 없고 그것이 어렸을 때부터 끔찍하게 싫었는지도 모른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나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눈빛에 묘한 색기가 있었다. "뭐 했어? 쇼핑? 부러워할 거 없어. 내가 사 줄게." "고맙지만 됐다. 옷이라면 보다시피 많이 샀으니." "그건 얘 옷이고. 너도 네 마음에 드는 걸 입어야지." "그렇다 해도 너한테 구걸한 적 없다. 왜 또 이러냐." "손! 내가 이 나이 먹고 따라할 수는 없잖아. 미안해." 당황한 나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감겨 있는 들꽃을 보았다. 그럭저럭 봐 줄 만했는데. 벌써 시들시들하다. 어차피 조금씩 색을 잃어 간다고 생각하면 무엇인들 의미가 있을까. 변덕쟁이같은 인간 놈들의 생각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도 오늘이 지나기 전까지는 간직하고 싶었다. 꼬맹이들은 몰랐겠지만 나도 결코 싫지만은 않았으니까. "들어와라." 고죠를 침대에 앉힌 뒤 물을 가져왔다. 별로 마시고 싶지 않은지 밀어내고 그가 나를 제 무릎으로 끌어당겼다. 작정하고 응석부릴 셈인가. 백 보 양보해서 그렇다 쳐도 마냥 받아줄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거리낌없는 손이 허리를 타고 내려왔다. 술에 젖어 끈적해진 숨소리가 귀를 물고 늘어지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곤두섰다. 먼저 앉은 놈 다리를 두 발로 감고 바르르 떨며 참았다. 고죠 상대로 울고불고 할 이유는 없지만 좋고 싫고를 떠나 울컥했다. "지금 이게 무슨 뜻이냐. 설마 나더러 네 첩이 되라는 뜻은 아니겠지. 파렴치한 놈들 같으니. 결국 너도 그렇게 나오는구나. 꿈도 꾸지 마. 다시는, 죽어도 안 해. 차라리 여기서 다 풀고 죽이든가. 어차피 봉인할 셈이겠지. 윽⋯⋯." "까불어, 난쟁이똥자루가. 이제는 뭐만 했다 하면 죽여 달라 그러네? 진짜 죽을래? 나랑 무덤에서 썩고 싶어? 풀긴 뭘 풀어. 쬐끄만해 가지고 잘 되지도 않겠구만. 아, 너는 원래 작았지. 미안. 아팠겠네. 어린 남자애는 원래 못 참아." "고죠⋯⋯." "왜 불러. 설마⋯⋯ 이제 와서 할아버지는 뭐 하러 찾아. 옛날에 돌아가셨잖아. 그러고 보니 처음 안았던 날도 사토루가 아니라 고죠라 부르면서 질질 짜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게 그거였구나. 도와줘 살려 줘 같은 거. 하하하." "⋯⋯." "미치겠네. 아니, 고마워. 덕분에 아무래도 좋아졌어. 뭐가 뭔지. 모르겠어. 어디서 잘못됐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잖아. 처음부터였어. 너한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억지였던 거야. 그런 내가 어떻게⋯⋯ 아, 머리야. 너무 아파." "듣자 듣자 하니까 잘도 지껄이는구나. 살려 줘는 개뿔. 그때도 제발 죽여 달라 빌었다. 너보다 끔찍했던 건 나였어. 나 자신. 내가 흥분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분명히 나는 너를 거부했지만 그건 너한테 그럴 담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안 그럼 네 마음대로 하게 뒀겠냐. 그때부터 몇 번이나 했는지 셀 수도 없어. 발정난 개마냥 달려드는 너랑 재미 좀 보느라 병원도 다녔지. 그래도 저항 안 했잖아. 내가 원해서 한 거라고 빌어먹을 애송이 자식아." 쓰러지듯이 내게 기대며 고죠가 신음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뭐라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얌전히 그에게 어깨를 내어 주었다. 무게감으로 말하자면 내게 완전히 몸을 맡겼다 봐도 좋을 것이다. 타오를 것처럼 붉어 보였던 볼은 정말 뜨거웠다. 이따금씩 표현이 서툴어지는 것은 어른이 되어도 별 수 없나 보다. "스즈카." 킁. 못난 놈. "오냐, 말해라." "나, 솔직히 말하면 되게 기뻤어. 너한테 좋아한단 말 들었을 때. 진짜 오랜만이었으니까. 근데 진실은 뭐야. 정말 나를 좋아해? 그때처럼 다시 싫어하게 되지 않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내가 뭘 하는지 몰라. 그래서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지난 10 년, 내 삶이 통째로 사라진 거 같아.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야. 어디로 가는 거야. 정작 내 과거 내 미래는 캄캄해. 아무것도 안 보여. 네가 말해 줘. 가지 말고 여기서. 내 옆에서. 난 앞으로 어떡해야 돼." "너 인마 네가 나보다 먼저 쓰러질 것 같은데. 왜 진작 말 안 했어. 제대로 상담할 상대는 있었냐. 젠장. 쇼코가 왜 그리 쌀쌀맞았는지 이해가 되는군. 그리고 네 말도 알겠다. 일단 몸부터 챙겨라. 그런 다음 마음을 어떻게든 해 주마." 나도 참 말은 잘하는구나. 아무렴 말이라도 그럴싸해야지. 그래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겠니. 사토루. 얄궂게도 너는 누구보다 강하면서 지금 어느 때보다 약하다. 그런 너에게 이것밖에 못해 주는 내가 부끄럽다. 최대한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너를 쓰다듬는다. 그런 손길이라도 놓치기 싫어서 기대어 뺨을 비비는 네가 달다. 귀엽다. "너를 어찌하면 좋을까. 이럴 때는 누가 더 불행한지 까놓고 비교하면서 마음껏 서로 비웃어 줘도 된다. 들어 보거라. 나도 후회가 많아. 고죠 가를 떠난 대가는 어마무시했다. 개고생했지. 집도 없이 떠돌다 게토를 만나서 이제 좀 쉬나 했더니 그 독한 놈 억세게 부려먹더라. 겨우 탈출했다. 그로부터 10 년을 버텼지만 지금 내 꼴을 봐라." 토닥토닥 너의 어깨를 두드리고 등을 쓰다듬는다. 아직 남았는데 벌써부터 참지 못하고 들썩들썩하는구나. 누가 보면 우는 줄 알겠다. 내가 너를 비웃어야 하는데 도리어 비웃음 당하는 꼴이 아니냐. 기왕이면 시원하게 대놓고 웃어라. 게토가 몰래 내 소식을 전할 때 뭐라고 했는지 몰라도 나는 괜찮지 않았다. 농담 아니야. 진짜 힘들었어. "도망친다 한들 어쩌겠니. 어차피 너 없이는 살 수 없는데. 네가 도와주기 전에는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았다. 잠깐이나마 고통을 잊기 위해 약을 한 알 한 알 삼킬 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게. 정말 모르겠니. 너야 너. 제일 보고 싶었던 놈. 너는 교사잖아. 내 담탱이 사토루. 나한테 제자들한테 사랑받음 그만이지 뭘 더 바라냐 욘석아." 하하하. 결국에는 동시에 터졌다. 얘 울지 마라. 여전히 조금 달뜬 소리에 귀가 흐뭇하다. 아이처럼 매달리는 고죠에게 기대며 나도 눈을 감았다. 잠시뿐이겠지만. 지금의 평안이지만. 도망치고 싶지는 않다. 네 옆에 있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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