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허공과 붉은 구름 보랏빛 간색이 하늘에 드리웠다. 시작과 끝이 하늘선 너머 사라지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자색의 띠는 몹시 선연하지만 때가 되면 어둠이 내릴 것이다. 설령 시작한 곳으로 돌아가더라도 푸른 녀석은 같은 일을 하겠지. 이제는 끝을 향해 서서 붉게 물든 내가 서둘러 먼저 떠나 버린 꼬맹이의 발자국을 쫓는 처지다. 더 고민할 필요가 있나. 깊은 어둠 따라 멀리 닿지 않는 곳으로 나도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음마다 위태롭다. 밤새 손으로 비비적거린 눈두덩이가 아릿했다. 현기증에 속도 아팠다. 몇 번을 실신했지만 거반 정신이 깨어 있었다. 피곤했다. 시야가 닦은 지 몇 달 된 유리창마냥 더러웠다. 닦아도 닦아도 그저 뿌옇기만 하다. 퉁퉁 부운 눈을 활짝 열고 환기라도 좀 해야지 안 되겠다. 슬슬 예쁜 풍경이 그립다. 탁탁. 탁탁. 어쩐지 찾은 것도 같다. 예쁜 풍경. 고죠는 홀로 벤치에 앉아 있었다. 길쭉한 다리를 꼬아 앉고 턱을 괸 채 사색에 잠긴 모습이었다. 아니, 사색은 무슨. 화를 죽이는 거다. 발끝으로 바닥을 탁탁 때릴 때마다 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가 내게 닿는 것 같았다. 수업. 훈련. 임무. 교류회. 철야. 썩은 귤. 썩은 귤. 빌어먹을. 아마 동료들 앞에서는 덤덤한 척하겠지. 그렇게 보이기 위해 일부러 아무도 없는 곳에서 머리를 식혀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깨를 짓누르는 피로에 지기 싫은 듯 빳빳하게 굳어서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리고 역시나 알고 있었는지 나를 휙 돌아보고는 냉소를 지었다. "안녕 스즈카. 잘 가라고 해야 되나." "이제 여기 있을 이유는 없지 않으냐." "끝까지 네가 처한 입장을 모르는구나. 나한테도 일단 너를 감시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그런 내 앞에서도 아주 당당하잖아. 마음대로 해 봐.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아무도 모르게 튀어야지. 뭐 해. 서둘러. 뛰어." "나는 후쿠오카로 돌아간다. 더는 너의 제자들과 엮이지 않을 것이다. 절대. 너도 놔줄 거면 확실하게 놔줘." "내 마음까지 이미 네가 결정했어? 그랬겠지. 어차피 너한테는 안중에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너의 그런 부분마저 좋아했어. 집에 가고 싶다 보채는 너. 차갑게 말하고 돌아서는 너.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도망칠 생각부터 하는 너. 그런 네가 뜻밖에도 안아 달라 키스해 달라 조르는 게 너무 귀여웠거든.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 "결정한 것 아니었냐. 지금 너를 보면 이대로 내가 멀리 달아나도 쫓아올 것 같지 않은데. 그냥 내 감이다. 사실, 너무 쉽게 보내주는 것 같아서 오히려 안심이 안 돼. 네놈들끼리 짜고서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이사회 놈들이랑 내가? 그건 지난날의 내 행적과 지나치게 모순되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긴데, 놈들이 그럴 계획이라 해도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야.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돼. 같이 짐 싸 줄까. 기차표 끊어 줄까. 역에 데려다 줄까. 작별의 키스라도 해 줄까. 미안, 지금 내 코가 석 자라 너를 돕지 못할 것 같아." 차라리 대놓고 욕을 해. 아니면 눈 딱 감고 붙잡아. 쿨하든가. 찌질하든가. 하나만 할 것이지. 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거냐. 직설적으로 말하길 꺼리다 보면 비꼬아 말하는 게 더 편해질 수도 있겠다만은. 정신을 못 차리겠다. "그것도 협박이라고 하냐. 나도 딱히 도망치는 신세에 네 도움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나한테 바라는 것도 없는데 내 신경을 긁어대는 이유가 뭐야. 귀찮게 굴지 말고 꺼져." "이야, 너 화가 많이 났구나. 잠깐만이라도 진정할 수는 없냐.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 "그럴 수도 있겠네. 다음에 내가 너를 찾아냈을 때 살아 있지 않으면. 맞아. 이게 마지막이야."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누가 봐도 싸울 기세로 덤비는 건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다. 그런데 웃으면서 말할 때보다도 위협적이지 못하다. 일부러건 무의식이건 불같이 화내면서 슬쩍슬쩍 진심을 흘리는 그의 말투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은 고전을 떠나는 게 최선이다. 유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이곳에 계속 둘 수가 없다. 가뜩이나 어깨가 무거운 고죠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다. 그것으로 무마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무심한 척 다가가서 털썩 앉았다. 그리고 어쭙잖은 위로 대신 내 한쪽 어깨를 말없이 두 번 두드렸다. "그만 좀 해. 나도 이제 지긋지긋하거든. 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한 번도 없더구나. 생각해 보니 사토루 네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한 번도 네 옆에 있어 준 적 없었어. 그러면서 너의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하게 여겼지. 그동안 너는 나를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 줬다. 거처를 마련해 주고, 일자리를 주고, 먹을 것, 입을 것, TV, 스마트폰, 뭐든 사 줬고, 억 소리 나는 병원비도 다 내 줬지. 나 기죽을까 봐 끝까지 재수없는 척해준 것도 물론 고마워. 그런 네게 어깨 한 번 내주지 못할 이유가 뭐냐." "그거야 내가 한 짓이 있으니까. 내 아이까지 가졌는데 둘 다 지키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나 죄책감 느낄까 봐 끝까지 뻔뻔한 척해 줬으니까. 사랑한다는 역겨운 소리도 참고 들어 줬으니까. 어찌 보면 나를 위해서지. 너는 제대로 본 거야. 놈들이 나한테 선택지를 줬거든.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는 더럽고 치사한 선택지였지만. 쉽지 않은 결정이었어. 힘들었어. 나조차 내 마음을 배신했다고. 네 쬐끄만 어깨에 기대는 게 이제 와서 무슨 도움이 되겠어." "쬐끄맣다고 뭐라 하지 마라. 듣는 사람은 되게 억울해. 너야말로 그 덩치 여자 후리는 데 말고 어따 쓰냐." "그렇게라도 쓸 수나 있으면 다행이지. 꺽다리도 억울해. 난쟁이똥자루인 네 옆에 있으면 징그러워 보이잖아. 하물며 너한테 치근덕거릴 때는 어떻겠어. 끌어안을 때, 키스할 때는. 나 자신을 너무 사랑하지만 차마 얼굴을 못 들겠어." "네 부끄러움과는 상관 없이 얼굴을 들 수 없었을 거다. 숙이지 않으면 나한테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까. 나를 보고, 끌어안고, 키스하기 위해 어차피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는 얘기다. 너를 올려다보는 것도 마찬가지야. 굴욕적이지. 분하고 수치스러워.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더구나. 정말 부끄러운 건 따로 있어. 그게 뭐냐면, 나다. 내 눈높이에서는 더 크고 듬직해 보여서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그냥 자연스럽게 든단 말이야." 고죠는 껄껄 웃었다. "아아, 더는 못 참아." 그가 말했다. 그러더니, "스즈카 고젠. 안아도 될까." 하고 물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지금도 나한테 안기고 싶은 거지. 해 버리자." "자, 잠깐만. 어째서 지금이냐. 이렇게 갑자기⋯⋯." "말했잖아. 못 참겠어. 전혀 예상 못했다는 표정이네." 고죠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입 꼬리가 가벼워 보였다. 이번에도 속으로 그럴 리 없다 생각했지만 눈을 감은 나는 그럼에도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는지 느꼈다. 나직이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고죠의 두 팔이 나를 가뿐히 안아올렸다. "왜 이래⋯⋯." "나도 부끄러움을 아는데, 여기서 시작하긴 좀 그렇지. 장소를 바꾸려는 거야." "교정에서 이런 꼴로 돌아다니는 건 안 부끄럽냐. 무하한 뒀다 뭐해. 날아가라." "너, 나 말고 이렇게 안아 줄 남자 있어?" "이 나쁜 놈아. 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벌써 마음이 흔들리는구나. 에이, 시시해." "네가 이러면 갈 수⋯⋯." "봐, 이 학교. 변한 게 없어. 덕분에 나는 그 시절과 똑같은 풍경을 매일 보고 있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라. 너랑 내가 얼마나 닭살을 떨었는지. 우리도 한때는 엄청 눈꼴 시려운 커플이었잖아. 그치. 오랜만에 둥개둥개 해 줄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둥개둥개라는 함은 아기를 높이 들어올리며 어화둥둥 예뻐할 때 내는 소리 아니었던가. 그것도 싫었고 그게 다는 아닐 것이므로 더 싫었다. 기억이 나지 않아서 당황했다가 번뜩 떠올림과 동시에 나는 소리쳤다. "아니야! 그만둬! 하지 마!" "자, 둥개둥개. 높이 날아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재밌겠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런 짜릿함을 느낄 틈은 없다. 상식적으로 지금 내가 있을 수 없는 곳에, 마치 당연한 것처럼, 덩그러니 놓이게 되는 거니까. 무하한은 결코 연애를 위한 능력이 아니다. "이런 짓을 한다고 내가 좋아할 거 같으냐!" "맞아. 실은 너, 그때도 이거 되게 싫어했어." 싫다 그만해라 말해도 멈춰 주지 않는다. 오히려 재미있다고 웃는 꼴이다. 예전의 나라면 고죠에게 진짜 화를 냈을 것이다. 돌이켜보니 꼬맹이의 버릇이 될 법한 유치한 장난이고 한편으로는 그런 장난마저 사랑놀음이라고 애틋한 추억이 되어 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땐 어렸으니 그렇다 치고 지금 고죠는 어떤 심정으로 나를 놀리는 걸까. "그때도 지금도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이렇게 하고 있으면 거기에 있는 너를 아무도 채 가지 못할 것 같거든. 갈매기라든지, 가오리라든지, 아무튼 날아다니는 거 빼고. 아, 하늘을 날 수 있는 가오리도 있어. 내가 실제로 봤어." 둥개둥개에서 겨우 벗어난 뒤에도 여전히 자신의 발로 걸을 수 없는 상황이었므로 나는 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떨어지기 싫어도 별 수 있나. 투닥거리다 결국에는 날았다. 무하한으로 이동할 때 기분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그리 많지 않다. 어느새 다시 둘의 쉼터가 된 장소. 애들도 가끔 들르는 모양이다만은 거의 둘밖에 찾지 않는 곳이다. 고죠가 문설주를 지날 때 결점 하나 없는 그의 잿빛 머리칼은 새빨간 노을 색과 검푸른 그림자 색으로 오롯이 물들었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마루에 걸터앉은 그는 나를 제 오른편으로 돌아앉히며 그 틈에 안대를 벗고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정면으로 보이는 것은 겹겹이 들어선 옛 건축물들. 고개를 들면 거기에 예쁜 눈동자가 있었다. "왜 방으로 안 가고 이리 왔냐." "아이, 방은 너무 av 같아서 싫어." "그래서 방보다는 밖이 낫다는 거냐." 익숙한 만큼 편하긴 하다만 고죠가 저 혼자 쓰는 사무실을 버젓이 놔두고 이리로 온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다. 사무실은 싫다 해도 딱히 방해받을 일이 없는 한적한 공간이라면 널렸다. 굳이 야외를 고를 이유가 뭐겠는가. 강제적인 절제를 위한 장치다. 한편으로는 긴장을 놓을 수 없으니 다름아닌 그것을 의도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부탁이야. 리드해 줘. 내가 함부로 너를 만지기에는⋯⋯ 저기, 아까도 말했지만, 좀 징그럽잖아. 너는 귀여운 여자애 모습인데 나는 그냥 아저씨도 아니고 덩치가 큰 아저씨니까. 흥분했을 때 더, 뭐랄까, 짐승처럼 보일 것 같아."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어도 실제로 어마무시한 덩치를 보고 있으면서 차마 부정은 못하겠다. 카페에서 주는 그란데 사이즈의 컵도 고죠가 들면 그냥 톨로 보이는 것처럼 그의 손이 어디에 닿아 있건 내 몸은 장난감으로 보인다. "음⋯⋯ 뭐부터 해야 하지. 일단 키스해도 되냐." "묻지 말고 명령해 줘. 살짝 험악하게 말해도 돼." 조금이라도 내가 강제로 하는 느낌이 들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뭐든지. 그가 내 뒤에 숨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저 귀엽다만 웃음이 나오려다 쏙 들어갔다. 그래도 그렇지 뭘 손까지 떠냐. 속으로 생각하면서 살며시 잡아 주었다. "그럼 해라." 명령조는 맞는데 나도 어색해서 별로 험악하게 말하지 못했다. 여하한 고죠는 내 턱을 끌어당겨 입맞추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 틈으로 비어져 나오는 숨소리. 그래도 여전히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다. 고죠가 뜸들일 때 나는 그의 옷을 움켜잡고, 좀 더, 속삭였다. 기분 좋은 건지 괴로운 건지.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듯한 신음이 들렸다. 그의 키스는 내 입술을 떠나 귀로 향했다. 소리까지도 몹시 자극적이었다. 나는 자신의 뜻대로 가슴을 허락했다. "만지는 거냐 가지고 노는 거냐." "멍들면 어떡해. 나중에 아프잖아." 나도 모르게 손끝에 힘을 줘서 꽉 꼬집었다. 멍은 가리면 돼. 그러니까 제발 지금만이라도. 그런 생각만 하고 있지 말고. 어떻게 좀 해 봐. 애원하는 말 대신 고죠의 다리를 발로 문지르며 안달재신했다. 입은 아직 키스하고 싶어서 우는 소리로 졸라댔다. 품에 안긴 채 몸을 부대끼고, 들썩이고, 허공에 놓인 다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앞으로 모아졌다. 그러자 차가운 손이 치맛속을 파고들어 살살 어루만지며 내가 닫아 버린 다리를 스스로 다시 벌리게 했다. 문득 고죠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10 년 전부터 거의 쓴 적이 없는 그러나 지금 꼭 필요한 물건을 꺼내들었다. "준비 됐다고 말해 줘." "정말 하는 거냐. 아니지." "정말 기분 좋게 해 줄게. 약속이야. 단지 오늘은 너만. 같이 좋아질 수 있는 건 우리 집이나 어디든 안심할 수 있는 곳에 있을 때 생각해 보자. 하루만에 단계를 훌쩍 뛰어넘으면 나야 좋지만 네 몸은 아니야. 지금은 참아 줘." 하기 싫다, 못 하겠다, 사내가 이리 나오는데 별 수 있나. 나도 여자이거늘 무슨 낯짝으로 애원한단 말이야. 아무러한 네가 여기까지 결심한 데는 나를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이 컸겠지. 이제 보니 네가 애원을 하는 것도 같구나. "처음부터 이럴 셈이었군. 네 말이 옳다. 네가 옳기 때문에 말해 봤자 소용없지. 나도 네게 실망한 표정 보이고 싶지 않으니 다음부터 나를 속이는 듯한 방법은 쓰지 않았음 좋겠다. 이번에는 너 좋을 대로 해라. 그래, 준비 됐어." 왜 멍하니 있어. 준비 됐다니까. 속 터져. 너 내가 아는 놈 맞냐. 시도 때도 없이 덤벼들어 사람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던 그 놈 맞냐고. 누구 하나 먼저 울음을 터뜨리기 전에 빌어먹을 물건을 빼앗아 내 손으로 포장지를 북 찢었다. 딱히 처음 만져 본 것도 아니지만 미끌미끌한 게 영 기분 나빴다. 이게 뭐라고. 나는 고죠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손가락 세 개를 한껍에 움켜쥐었다. 아니지. 내 손이랑 같다 생각하면 안 된다. 멈칫하면서 하나 뺐다. 부들부들 떨리는 게 아까와 같은 이유는 분명 아닐 테고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뻔했다. 팔꿈치로 쿡 찌른 다음 다시 집중했다. 사실 어려울 건 하나도 없다. 이렇게 갖다 대고 살살 내리면서 끝까지 넣으면 끝. 정말 간단하다. "어때. 잘했지." "응. 잘했어. 어떻게 쓰는지 잊어버렸을 법한데." "네 손으로 하기 싫음 앞으로 계속 내가 해 주마."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고죠가 내게 키스했다. 나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가 그를 방해하지 않게 잡아 올렸다. 미끌거리는 손가락이 얇은 속옷을 비집고 들어왔다. 몸이 제 기억에 없는 낯선 느낌 때문에 움찔움찔 떨렸다. "음⋯⋯ 저기, 스즈카. 어떻게 생각해. 아프지 않을까." "처녀니까 좀 아파도 별 수 없지. 참아 볼게. 계속 해라." 손가락은 천천히 내 안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배를 푹 찔린 듯한 느낌이 들더니 가죽이 벗겨진 것처럼 아팠다. 잡히는 대로 붙잡고 버티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도 참으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고죠의 가슴팍을 팔싹 때렸다. "있잖아, 스즈카. 여기는 아직 그럴 준비가 안 됐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이해 못하는 것 같달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나 봐. 오늘은 이쯤에서⋯⋯ 아, 아니야. 약속이니까. 내 귀에 대고 좋은지 어떤지 말해 줘." 실망이고 뭐고 울 뻔했다. 눈물이 쬐끔 아롱아롱 맺힌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얼굴을 보고 놀란 고죠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만지는 것뿐이라면 아프지 않을 것이므로 일단 그는 여자의 하반신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을 살살 누르듯이 자극했다. 그러는 동안 내가 작게 말해도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내게 귀를 대고 있었다. 속닥속닥. 사정감은 금방 찾아왔다. 머리가 하얘졌다.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꽉 막은 채 한껏 움츠러들었다가 스르르 녹아 내렸다. 이 느낌은. 아니나 다를까. 코피가 주룩 흘러나왔다. 아주 조금. 그래도 지난번처럼 왈칵 쏟아지지는 않았다. 나는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어차피 고죠는 거기서 만족하고 멈추려 할 테니 옆에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미끄러지듯 쑥 들어와 깜짝 놀랐다. 들어오긴 했는데 아픈 건 마찬가지였다.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고죠도 무리임을 알고 일단 멈추었다. 조금 지나면 익숙해질까 해서 버텨 봤지만 코끝이 찡해질 뿐이었다. "너무 좁아." "멈추지 마라." 아프기 때문에 오히려 길들이거나 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고죠를 힘껏 끌어안고 매달렸다. 덕분에 아프다고 투정부리는 소리도 비명에 흐느끼는 소리도 모두 그의 어깨에 묻혔다. 정신이 아찔하고 식은땀이 흘렀다. 사정하면서 고죠의 팔을 붙잡고는 뒤늦게 깨달았다. 도망가지 못하게 꽉 잡고 있었다. 모든 움직임이 멈추자 바람 한 점 없는 정적이 흘렀다. 기다릴까. 응. 아직이구나. 응. 짧은 대화를 끝으로 몸도 마음도 놓아 버렸다. 애욕 충만한 눈으로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후 쉬니 그제야 손가락이 천천히 빠져 나갔다. 그 느낌마저 좋았다. "눈 감아. 아무도 안 와." 나는 고죠의 말대로 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리는 맑고 몸은 가붓했다. 그대로 잠들 뻔했다. 무거운 욕망을 덜어낸 것만으로 이렇게나 편안해진다. 그래도 얼른 정신차려야지. 손등으로 인중을 슥 닦았다. 피도 피였지만 주욱 늘어나는 것은 더욱 가관이었다. 고죠의 검은 옷에 더 검게 얼룩이 생겼다. 축축하고 끈적끈적했다. "미안. 너 옷에 내 침 묻었어." "괜찮아. 갈아입으면 되니까." 고죠는 덤덤해 보였다. 후회하고 싶지 않지만 하지 않을 수도 없다. 되도록이면 참는 게 좋겠지. 참았어야지. 알고 있다. 나 혼자 좋고 편해지면 뭐 하나. 그의 바람이 나를 곁에 두는 것뿐이라 할지라도 어차피 그도 누군가를 안지 않으면 안 된다. 안쪽에서 계속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손톱으로 피 나도록 긁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구나. 왜 이리 아픈 거야. 손가락도 무리라니. 다음에 쇼코한테라도 물어보는 게 좋을까. 어른들끼리도 이렇게 진땀을 빼서야 꼬맹이를 위해서라도 그래야겠어. 설마, 일생 수절하겠다는 헛소리는 하지 않겠지." "⋯⋯." 고죠가 다시 안대를 썼다. 그래 봤자 지금은 주둥이만 봐도 알 수 있다. 문득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올랐는지 입술을 깨문다. 나는 그런 고죠에게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나를 돌아보게 하고서 땀으로 노근노근해진 뺨을 조물딱거렸다. 뜨뜻하다. 좀 빨개진 것 같은데. 날이 더워 그런 것은 아닐 테지. 가슴을 어루만져 달래며 일러 두었다. "10 년 동안 자나 깨나 너만 기다렸다. 100 년 같은 10 년이었다. 너와 기약했던 날은 물론 하지 않은 날에도 너를 생각했다. 두려울 정도였어. 언제든 어디에든 네가 있을 것 같거든. 무서운 상상력이지. 안 그러냐. 나를 비웃어도 된다. 비웃음을 산다 해도 지금은 네게 구걸하고 싶다. 네 눈빛, 목소리, 손길, 그냥 허상이라도 좋다. 유일한 욕망이자 쾌락이 너인데 다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겠냐. 심지어 네가 너 외의 모든 나의 욕구를 시답잖은 것으로 만들지 않았냐. 그래서 매일 이렇게 결핍하고, 갈망하고, 분노하는 거다. 전부 너 때문이야. 사토루." "말은 청산유수네.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그 성의를 봐서 이번에는 넘어가 줄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아무래도 네가 요즘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웃다가 화내다가 기분이 막 오락가락⋯⋯." "뭐라고?" "귀엽다고." 위험했지만 어떻게든 넘겼다. 나는 어디까지나 진심을 말했고 내 진심에는 일말의 의구심도 부끄러움도 없다. 다만 좀 아껴 둘 걸 그랬다. 급한 맘에 있는 대로 쏟아부었으니 다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죠의 기분이 시시각각 변해서 다행이다. 그새 마음이 풀렸는지 그가 내게 몸을 기대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알잖아. 그렇게 떠들어대면서 정작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쏙 빼놓는 게 얄미워서 그래. 작년까지는 많은 걸 바라지 않았어. 하지만 이젠⋯⋯ 언제쯤이면 말해 줄 거야. 진짜 술 먹이는 거밖에 방법이 없는 거냐고." 술은 말이야. 위안 삼아 마시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마셔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 그래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으니 찾는 거다. 내게는 너와의 만남, 너에 대한 생각, 모든 걸 잊기 위한 수단이었어. 지금이라면 너도 이해할까. 고죠는 더 묻지 않았다. 다만 힘주어 나를 끌어안고 쓰다듬었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그가 내게 말했다. "있지, 스즈카. 아까 했던 말들은 잊어버려. 내가 뒤를 봐줄 테니까 후쿠오카로 돌아가고 싶으면 그렇게 해." "아무것도 하지 마라. 나는 너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네 도움을 받으면 의미가 없지 않으냐." "너도 예상했겠지만, 이번 일.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위에서 애들한테 터무니없이 위험한 임무를 맡겼던 거야. 스쿠나의 반응을 보려 했겠지. 아니면 끝장을 볼 생각이었는지도 몰라. 유지가 자살을 택해서라도 막을 거라 예상했다면. 메구미랑 노바라까지 위험했는데 놈들한테는 안중 밖이었어. 이지치도 압박을 받아 숨길 수밖에 없었을 테고. 결과적으로 놈들의 뜻대로 됐지. 앞으로 더 거리낄 게 없을 거야. 유지가 살아 있을 때 너에게는 스쿠나가 훌륭한 방패막이 되어 줬지만 지금은 반대야. 스쿠나도 해치웠으니 놈들의 화살 끝이 어디로 향하겠어." 다음 화살 끝이 향하는 곳. 아마 나겠지. 아니면 나를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다른 누군가에게 향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고죠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너무 명백하게 고전에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는 상황이 의심스럽다. 아마 놈들도 같은 의심을 하겠지. 그 임무에서 유지가 죽었다. 사실이다. 하지만 스쿠나가 그토록 허무하게 끝나다니. 생각할수록 불안이 짙어졌다. 이러나 저러나 나는 찬밥 신세이고 그런 것은 문제도 아니다. 이제부터 어찌 해 나가야 할지. 나는 고죠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 귀밑머리를 쓸어넘기며 말을 이었다. "너는 귀여웠어. 농담이 아니라 진짜 제자로 느껴질 만큼. 물론 그건 완벽한 착각이었지만. 너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복잡해. 우리 애들이, 네가 상처입으면 나 때문이야. 선생님으로서 책임져야겠지. 그러니까 보내 줄게. 가도 돼." 누가 너의 제자냐. 누가 선생님이야. 누가. 보호 받는 것처럼 품에 폭 안겨 있는 주제에 나는 고죠를 때렸다. 원망을 담아서 마구 때렸다. 분이 풀릴 때까지. 그리고 끌어안으며 멋대로 입맞추었다. 울컥해서 이렇게 화를 내고도 가슴은 열렬히 바란다. 마음을 다잡긴커녕 고죠가 내게서 듣고 싶어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흘러넘칠 것 같았다. 책임져야겠지. 고죠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때까지 남아 있던 일말의 두려움과 망설임을 완전히 버렸다. 고죠마저 그리 말한다면 그 누가 말린대도 떠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후쿠오카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걱정에 밤잠마저 설쳤건만. 의미가 없었다. 꼬맹이가 마음을 바꿨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는 돌이킬 수도 없다. 그럴 만한 사건이 있었다. 모든 것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일. 뭐냐면, 무려, 유지가 부검실 침대 위에서 갑자기 깨어났다. 스쿠나를 원망하며 연속 따귀를 날렸을 때는 뺨에서 더 더 응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래 봤자 유지만 아프겠지만. 기껏해야 원점으로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하는 실정이다. 틀림없이 스쿠나가 유지를 살려 주면서 어떤 조건을 걸었을 텐데 유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고 고죠도 아직까지는 별 말 없다. 어두운 미래는 차치하고 도무지 답이 없던 일전의 상황을 생각하면 말할 것도 없이 고죠에게는 기쁜 일이다. 유지가 깨기 전 상층부의 영감탱이들은 물론 이사회의 놈들도 고죠를 물어뜯을 생각에 적잖이 설렜을 거다. 상관없는 메구미와 노바라까지 사지로 몰아넣고는 저들이 나서지 않았으면 어찌 되었겠나 떵떵거리고 싶어서 말이다. 고죠와 꼬맹이들이 저녁을 먹고 고전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별로 끼어들고 싶지 않아 조용히 지켜만 봤다. 그 후에 꼬맹이가 둘이서 얘기 좀 하라고 하도 수선을 떨어대서 마지못해 고죠와 잠깐 산책을 하고 들어가기로 했다. "고죠, 살 빠졌냐." "그랬음 좋겠다. 한 번쯤은 아프다는 핑계로 너한테 응석부릴 수 있을 텐데. 인생은 편의 좋게 흘러가지 않아. 그냥 어젯밤에 술을 많이 마시고 토하고 해서 헬쓱해진 것뿐이야. 언젠가는 나도 후덕한 인상의 아저씨가 나름 매력적일 수 있다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모든 걸 내려놓겠지. 그래도 아직은 너한테 조금이라도 더 어려 보이고 싶네." "그거 참 기특한 생각이다만. 술은 적당히 마셔라. 내가 너한테 이런 잔소리를 하게 될 줄이야.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애들이랑 밥 먹을 때도 너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더군. 네 얼굴에 아무것도 먹기 싫다고 써 있지 않으냐. 식욕은 인간의 본능이거늘. 어딘가 잘못 된 것이 틀림없어. 나한테라도 말을 해 봐. 무엇이 감히 너를 귀찮게 하느냐." "언제나 그래 왔던 것들 빼고는 아무것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시했던 사소한 부분들이 거슬려. 싫증나. 그리고 너무 지루해. 걱정하지 마. 신경쓸 게 많다 보니 예민해진 거야. 어쨌든 내가 부탁했던 거 잊으면 안 돼. 교류회가 시작하기 전까지는 유지에 대해 다른 애들한테 비밀로 해 줘. 지금 그 셋은 훈련에만 집중하게 두고 싶어. "네가 그리 말한다면."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고죠가 나를 돌아보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좀 어떠냐고 물었다. 불그스름한 뺨, 수줍게 앙 다문 입, 간지럼 태우는 듯한 손길. 겉으로는 차분해 보였지만 차마 감춰지지 않는 것들이 보였다. 설레임, 즐거움, 흐뭇함, 만족스러움. 애끓는 감정까지. 저녁 먹을 때만 해도 억지웃음을 짓고 있던 것과 확연히 비교가 됐다. 뭐라 하면 좋을까. 늘상 흥분 상태인 꼬맹이들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고죠 너 정말 아끼는구나. 수상할 정도로. 그날 이후 묘하게 달라졌다. 풋풋했던 시절 너를 보는 듯하달까. 많이 쇠약해진 상태야. 그래도 잘 먹고 충분히 쉬면 회복할 수 있다. 너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나는 단지 과거의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반성하면서 늦게나마 너와의 달달한 연애를 즐기고 있는 거야. 어디까지나 내 행복을 위해 그릇이 필요한 거라고. 상대가 아줌마든 아가씨든. 풉. 걱정되는 건 그릇만이 아냐. 육안에는 정확하게 보이거든. 스즈카 너 말이야. 언제 어디서 누구한테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약해 빠졌어." "그래. 이제는 남아 있는 힘이 별로⋯⋯." "봉인된 나머지를 같이 찾아 보자. 네가 원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 하지만 최소한 연명은 해야 될 거 아냐." "어차피 못 찾아. 네 할아비가 썩 자비로운 양반은 아니거든. 빡쳤을 때는 말할 것도 없지. 내 생각은 이렇다. 애초에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겨 두고 나를 개고생하게 만드는 게 남편⋯⋯ 고죠가 계획했던 복수의 일부분인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너도 미련 투성이잖아. 진지하게 얘기하는 거야. 만약 내가 이미 일부를 찾았다면 어쩔래." "일단 미안하다 해야겠군. 나 때문에 시간 낭비 했으니. 나를 위해 무언가 해 주고 싶다면 내가 죽은 뒤 나를 네 할아비 옆에 묻어라. 물건마냥 관짝에 넣지 말고. 어차피 이제 봉인해도 쓸모없지 않으냐. 나는 여기까지다. 바닥났어." "꿈 깨. 네 남편 아냐." "그럼 관짝이라도 좋아. 선조님께서 손대지 말라 유지까지 남겼잖니." "지금은 내가 당주야. 너도 고죠 가 사람이 되고 싶으면 내 말을 들어." "웬수야! 나 좀 데려가!"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고죠가 내게 키스하며 나를 끌어안았다. 적당히 하려니까 내 얼굴을 그러잡고는 일부러 더 단작스럽게 쪽쪽 소리냈다. 물고 늘어지면서 좀 더. 한 번만 더. 아쉬운 대로 그냥 뽀뽀라도. 아주 떨어질 때까지 주둥이가 따라왔다. "사토루 너는 멀었어! 네 할아비에 비하면 풋내기지! 당주로서도, 사내로서도⋯⋯ 그래, 잠자리에서까지도!" "당주로서, 사내로서, 그건 사료가 남아 있으니까 반박하지 않을게.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잠자리에서까지⋯⋯ 아직도 기억나? 도대체 어떤 밤을 보냈길래? 이럼 안 되지만 흥미롭네. 나는 과거의 너랑 나도 꽤 변태였다고 생각했거든. 우리가 아직 시도해 보지 않은 게 남아 있는 줄 몰랐어. 고죠 가 비전 잠자리 기술이라. 끝내주네. 그래, 우리 가문 정도면 하나쯤 있어야지. 근데 그런 건 본가에 계신 영감님들도 안 가르쳐 주더라. 치사하게. 하하하." "네 말대로 봉인을 푼다 치자. 힘을 되찾는다 쳐. 이미 수백 년 나로부터 분리되어 있던 힘이다. 나조차 자신과 그것이 다시 합해졌을 때 정확히 어떤 영향을 받을지 알 수 없다. 그때는 네가 잘 아는 스즈카 고젠이 아닐지도 몰라." 나는 귀둥대둥 떠들었다. 귀거친 소리 때문인지 더는 내게 달붙으려 하지 않았다. 조금은 물러날 마음이 생긴 걸까. 고죠가 빤히 쳐다보며 턱을 훔켜쥐었다. 엄지에 눌린 뽈따구는 뽈록. 입 꼬리는 씰룩.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렇네. 덕분에 확실히 깨달았어. 천년 설화의 주인공 귀녀 스즈카 고젠은 인간처럼 죽고 싶은 게 아니야. 인간으로서 죽으려는 거지. 천년을 인간처럼 바라보고, 생각하고, 말하는 데 익숙해졌으니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순간 완전히 인간성을 잃게 될까 봐 두려운 거야. 왜 이제 알았을까. 너, 정말로 우릴 사랑하는구나. 눈물겹네." "그래! 그래서야! 나한테 있어서는 그게, 뭐냐, 좀비한테 물리는 거나 다름없다. 너처럼 볼 수도,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게 된단 말이야. 인간이 아닌 거지. 너는 인간이 아닌 거랑 같이 살 수 있냐. 밥 먹고 데이트할 수 있냐고." "절대 못해! 어라, 근데 이미 해 버렸네? 대체 왜 그래. 할아버지한테 봉인당하기 전에도 둘이 잘만 지냈잖아. 밥 먹고, 데이트했을 거 아냐. 어디 데이트만 했겠어. 끌어안고, 입맞추고, 동침하고, 그러다 불륜까지 저지른 거겠지. 우리 선조님께서, 그런, 기록하는 걸 무지 좋아하셨거든. 흠흠. 어쨌든 할아버지가 했다면 나도 할 수 있어." "그래서 마지막에 어떻게 됐는데? 나만 빼고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었나? 보아하니 이건 모르는 것 같은데. 네 할아비가 차마 기록하지 못했던 진실을 말해 주마. 나는 고죠를 죽이고 놈의 아내와 자식까지 모조리 죽이려 했어. 족보가 어찌 되는지는 모르겠다만 성공했다면 네가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실패했고, 봉인됐고, 네 할아비 관짝에 수백 년을 갇혀 속죄했다. 내 모든 걸 바쳐 너희 가문을 지켰어. 이제 그만 용서해 줘." 용서. 들릴 듯 말 듯한 중얼거림이 고죠의 살짝 벌어진 입술 틈에서 뚝뚝 떨어졌다. 내게 되묻는 것처럼 또는 나를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뜨금했다. 가슴에 칼이 꽂힌 것 같았다. 그런데 고죠는 그새 잊었는지 조금 멍해 보였다. "다음에 같이 성묘 갈래?" "지, 지금 그게 할 소리냐?" "할아버지가 너를 보고 싶어할 것 같아서. 네 얘기를 들으니까 나도 좀 무서워졌어. 너 말고. 할아버지 말이야. 내가 멋대로 무덤을 파서 너를 꺼내 갔잖아.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죽은 뒤에도 곁에 두고 싶을 만큼 집착했던 여자를." 무서워졌다 했냐. 너 때문에 나는 오한이 서리는 것 같다. 생각할수록 소름끼친다. 심신이 허약해진 탓이라고 스스로 타일렀지만 입때껏 한 번도 같이 가자 한 적 없던 고죠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니 괜스레 뒷꼭지가 당겼다. 이 웬수가 설마 손주 몸에 들러붙은 건 아니겠지. 귀신아 물럿거라. 썩 물럿거라. 아휴, 남사스러워서 원. 자신의 예감이 아무리 터무니없는 망상과 같을지라도 천년 동안 빗나가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야 고죠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주가 됐을 리는 없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믿지 않을 거다. 믿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나 인간들이 귀신을 두려워하듯 나도 내 오감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없을 따름이다. "가서 노래 불러도 되고 춤 춰도 되는데 로맨스 영화는 찍지 마. 할머니도 계시니까." "네 할아비는 관짝에 누워 있는데 무슨 로맨스 영화를 어떻게 찍어. 걱정 붙들어 매라." "그리고 나는 두 분께 당신의 귀여운 손자를 저주하지만 말아 달라고 빌어야지. 하하하." 실제로 사토루를 처음 봤을 때는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후손이라도 수백 년을 뛰어넘어 이럴 수는 없다. 놈의 환생이거나 귀신이 붙은 거다. 그만큼, 징그러울 만큼 닮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착각이었음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련님에게 몹쓸 짓을 당하기 전 미련이 남았던 것도 일후 마지못해 버린 것도 사실이다만 별 수 있나. 고죠 가의 후손 심지어 현 당주와 뒹굴어 놓고 다 저주 때문이었다 말하면 고죠도 기가 막혀 웃을 거다. 수백 년 전처럼 살벌하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때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지러운 시대다. 내가 살아 가는 이유도 과거와는 다르다. 타고난 운명에 부득불 맞서려 하는 당주님, 얄미운 짓만 골라 하는 선생님, 빌어먹을 전 남친. 그럼에도 내 마지막인 녀석 때문이다. 소름끼치게 닮았어도 이렇게 보면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사토루다. 노을이 내려 육안처럼 파란 하늘은 볼 수 없다. 어쨌든 남편 생각을 했으면 하늘이라도 한 번 올려다보는 게 내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도리다. 이미 수백 년 도화살을 끼고 산 것만으로 솔직히 충분하다는 생각도 든다만. 다시 봉인되어 묻힌다 해도 나는 어디 안 간다. 사과는 받는 놈이 됐다 할 때까지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문득 얼굴로 다가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손. 고죠가 저를 돌아보게 했다. 내 뺨을 쓰다듬고 내게 입맞추었다. 무엇이든 곧 있으면 다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니 새삼 알 것 같았다. 인간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 가고 있는지. 인간으로서 죽는 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다면, 그런 마지막이라면, 더할나위 없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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