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제자야. 메구미, 유지, 노바라. 마지막으로 너까지."

 "그러니까 내가 왜 네 제자냐. 제자 아니라고. 안 한다고. 그럼 너랑 내가 사제관계라는 건데. 인간들은 어떤 관계냐에 따라 모든 게 결정되잖아. 만나면 서열 정리부터 하는 게 네놈들이잖아. 내가 제자면 나도 공부하고 숙제해야 되냐. 왜, 스승님 말씀하실 때 무릎 꿇고 앉아 공손히 경청하라고 하지. 스승님께 가르침을 청하오자 절을 올리고, 끼니마다 밥상 들고 가고, 잠들기 전에는 자리끼도 떠 놓으라고 하지. 그게 사제관계잖아. 그걸 바라는 거잖아."

 "어허, 왜 이렇게 공격적이야. 학교에서 날뛰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기왓장 하나라도 떨어지기만 해. 이건 뭐, 짐승 길들이기나 마찬가지네. 진정하고 내 말 들어 봐. 네가 원하지 않으면 교사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아도 돼. 예의 바른 모습 보일 필요도 없어. 중요한 건 네가 내 제자라는 사회적인 신분을 가졌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가르쳐야 한다는 거야. 다른 애들과 똑같이 대하고 물론 숙제도 내 줘야지. 그러니까 수업 시간에는 집중하라고. 나한테."

 "듣자 듣자 하니까. 공부는 천년 동안 할 만큼 했어. 숙제는 네 할아비 관짝에서 다 끝냈다, 어쩔래. 이것들이 조상님 무덤 지켜 줬더니 감사한 줄도 모르고 주인 행세를 하는 걸로도 모자라 이제 스승 행세까지 하시겠다. 너야말로 잘 들어. 내가 고죠 가에 갇혀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나는 너한테 피 안 섞인 조상님이나 다름없어. 가훈 다음에 이어지는 비밀 문구가 뭔지 가르쳐 주랴. '그러나 고죠는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다, 인마. 그래, 산증인. 네놈들에게 있어 거의 살아 있는 현신이란 말이야. 꼬맹이들이나 읽는 서책으로 나더러 뭘 배우라고. 말해 봐, 자식아."

 "아, 그렇구나. 그 뒤에 무언가 있었다면 분명 '스즈카 고젠을 잘 감시해라'일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면 하쿠나마타타라든가. 교과서 펼쳐 보기는 했냐. 이렇게 하자. 거기 나오는 문제를 반만 제대로 풀어도 인정해 줄게. 쉬울 것 같지. 고교 과정 얕보지 마. 이참에 스쿠나랑 같이 시험 보는 거 어때. 공부든 뭐든 경쟁 상대가 있어야 불타오르는 법이니까."

 고죠에게 말을 걸 때 자신이 듣고 싶은 대답이 나올 거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열받는 소리만 듣게 될 것쯤은 예상했다. 알면서 하는 이유는 그냥 심심하니까. 굳이 말하자면 괜히 시비걸고 그러면서 장난치는 게 습관이다. 하지만 가끔은 장난으로 시작했다가 진짜 열받을 때도 있다. 그래서 얼굴에 얼굴을 들이밀면서까지 대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물러설 놈도 아니거니와 제 몸을 지키는 그만의 방법이 한편으로는 경계심을 풀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다가간들 어차피 닿지 않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거리다. 그런데 새삼스레 조금 떨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이쪽은 무방비. 어느 쪽이든 계속 방심하다간 무심코 자연스러움의 경계를 넘어 버릴 것 같다.

 "두 분 뭐하세요."

 "그러다 닿습니다."

 고죠와 투닥대는 동안 그의 제자들이 구경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나는 메구미의 말을 듣고 으르렁거리며 물러섰다. 재밌는 구경은 몰라도 싸우다 입술이 닿으면 웃기긴 하겠다. 물어뜯어 버릴 거니까. 그러면 어째서 고죠가 막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에 다소 어색한 상황이 될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내게는 기회인 것이다.

 "쌤들도 싸우는구나."

 유지는 변함없이 천진난만하다. 원래 그런 놈인지 그렇게 보이는 편이 자신에게 유리함을 알고 있는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서 가끔 떠 보기도 하는데 별로 건지는 게 없다. 그냥 바보일 수도 있다.

 "어쩌면 너희들과 싸우려고 할지도 몰라. 싸우고 싶어할 때는 그냥 싸워 주렴. 안 그럼 나중에 더 피곤해져."

 고죠의 말에 노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는 듯. 내게 무관심한 척하면서 나를 예리하게 주시하더니 이제 나에 대한 파악은 거의 끝낸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 생각은 없다. 내 그릇이 나에 대한 그녀의 모든 의심을 지우려 부단히 노력한 결과 지금은 나도 그녀와 나름 우호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

 "근데 막상막하네요."

 선생님도 딱히 마지못해 받아주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요. 그런 눈빛으로 고죠를 쳐다보며 노바라가 말했다. 그리고 새어나오는 작은 웃음소리. 고죠와 나를 통해서도 제 또래를 볼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단 생각 때문일까.

 "그래. 비유하자면 곰과 사자지. 곰 파냐, 사자 파냐. 각자 잘 생각해 본 뒤에 결정해라. 배신은 용서 못한다."

 "그럼 저는 사자 파요."

 "말해서 뭐합니까. 사자요."

 "뭐야, 너네. 나도 사자 할 건데."

 유지에 이어서 메구미와 노바라가 손을 들며 말했다. 설령 그것이 시답잖은 농담일 뿐이라 해도 고죠로서는 그런 놈들이 얄밉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너무하다는 듯, 하지만 말은 못하고 안절부절하는 모습이었다.

 "고죠 쌤이 방금 전에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거든요. 뭐랄까, 그냥 약해 보였어요."

 "어떤 싸움이냐가 중요하죠. 적어도 이런 싸움에서는 고죠 쌤이 이기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어차피 진짜 싸움이 되면 누가 말리지 않아도 참을 거잖아요. 남자들은 그렇게 폼 잡는 걸 좋아하니까."

 나는 팔짱을 끼고 모두에게 선택된 기쁨을 만끽했다. 풀이 죽은 고죠가 저보다 몸집이 작은 메구미에게 폭삭 안겼다. 메구미만은 양보할 생각이 없는 듯하나 유감스럽게도 메구미는 내게 일편단심이었기에 결국 잔인하게 무시당했다.

 "자, 애들아. 사자가 이빨을 드러내는 때는 침입자와 먹잇감을 상대할 때뿐이다. 이 지역 최강으로 군림하여 천적 따위 존재하지 않는 드넓은 초원을 상상해 보거라. 나와 함께 이 햇살을 즐기며 여유로이 산책하지 않겠느냐."

 "네."

 꼬맹이들의 대답을 들으니 더욱 기분이 좋았다. 최근 함께 보낸 시간이 가장 많은 유지가 내 뒤로 바짝 붙어 따라왔다. 나는 유지를 오른팔로 삼고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래도 고죠와 메구미를 떨어뜨린다는 것은 안 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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