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대에 앉아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언제부터 습관처럼 확인하게 됐는지 스스로도 모르겠지만 이유는 아마도 고죠 때문이다. 그는 이따금씩 떠나기 전 '연락할게' 따위의 말을 남긴다. 인간들의 관습인 것일까. 지켜도 되지 않는 약속.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애초에 할 얘기가 없으면 말이나 꺼내질 말든가. 이대로 잠들어도 되는지 신경쓰인다.
이쯤 되면 이쪽에서 걸어 볼까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고죠가 전화를 받을지는 미지수다. 내가 아는 한, 자기가 하는 건 괜찮아도 반대의 경우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놈이다. 그렇게 본인이 필요할 때만 찾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 까짓껏 먼저 전화해 주지. 그리고 정말 아무 이유도 없었던 거라면, 제기랄, 바로 끊어 버릴 테다. 낯간지럽게 '사토루'라고 저장된 녀석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성격이 급한 나는 연결음이 길어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구른다. 받지 않는다. 휴대폰을 던지며 잠이나 자려고 드러누웠다. 짙은 정막이 맴돌았다. 그럼 그렇지. 고죠 사토루, 앞으로 내가 그딴 말을 기억하나 봐라. 역시 인간들이 하는 말은 믿을 게 하나도 없다니까. 생각해 봤자 기분만 더러워질 테니 잊어버리기로 했다. 더 열받는 점은 그 뒤에 바로 졸음이 쏟아졌다는 거. 하지만 깊이 잠들지 못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아니, 메신저 알림음이 들렸다. 비몽사몽한 채 확인했다. 「깜짝이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지금. 스즈카 님의 부재중전화라니. 10 년 동안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그래서, 진짜 뭔데. 잘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면 얘기 들어 줄 수도 있어. 대신 네가 한 번 더 걸어. 손 씻고 와서 정중하게.」 핸드폰을 던지려다 참았다. 시계를 보니 2 시였다. 새벽 2 시. 더욱이 이런 건방진 태도의 문자를 받으면 누가 욕을 지껄인다 해도 말리지 못할 거다. 덕분에 잠도 달아났고, 욕 한 바가지 퍼부어 줘도 좋을 것 같아 전화를 걸었다. 「네, 사토루 군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말문이 막혔다. 내가 예상했던 익살스러운 목소리와 말투가 아니여서였을까. 나긋한 음성에 화면에 뜬 문자가 겹쳐서, 뭐랄까, 상당히 낯뜨거운 순간이었다. 연결음이 들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받았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저쪽에서 친히 '전화해'라고 말씀하셨으니. 예전 같았음 저가 말해 놓고도 씹었다. 이유는 모른다. 필요했는데 필요없었나. 수시로 기분이 바뀌는 녀석이니 그랬는지도 모른다. "⋯⋯." 「⋯⋯.」 "비로소 나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으니 속이 시원하겠군. 내 덕에 업적 하나 더 쌓은 셈 아니냐. 감사해라." 「진짜⋯⋯ 너⋯⋯ 그렇게 까불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야. 너무 우쭐대지 마. 나는 조금 전 호텔에 도착했어. 이제 자려고 했는데. 참, 너는 나 때문에 자다 깼지. 하나도 안 미안해. 응. 천천히 들어 줄 테니까 일단 질문에 대답해.」 난데없는 질문에 손가락이 빨간색 버튼까지 갔다가 멈췄다. 후환이 두려워서라기 보다는 저절로. 따지고 보면 먼저 전화 건 사람은 나고, 10 년 만이다. 몇 분 정도 듣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전화기를 다시 귀에 댔다. 「저기, 어땠어?」 "응?" 「오늘 뭐 했냐고.」 "뭐야. 그게 다냐." "나한테 있어서는 그게 제일 중요해. 네 몸 상태가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그리고 방금 물었듯이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미안한데 이제는 다 알아야겠어. 검사하는 거야. 내가 시킨 일은 끝냈지?" "그걸 본인에게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 아침부터 대신 수업을 듣느라고 아주 혼났다. 갑자기 어지럽다지 뭐냐.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그리고 저녁에 유지의 훈련을 봐줬는데, 야, 안 힘들 거라며! 장난해?" 「안 힘들 거라고는 안 했어⋯⋯ 그래, 유지에 대해서 내가 처음에 조금 미묘하게 얘기했던 건 맞아. 인정할게. 어차피 너는 억지로 끌려왔고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말이야. 그건 그렇다 치고, 수업은 왜. 많이 어려웠어?」 "아무것도 모르는 게 차라리 낫지. 가르쳐 준 것까지는 기억나. 막상 문제를 풀려니 잘 안 됐지만." 「그러니까 응용이 안 되는 거지 개념은 이해한 거잖아. 막 시작했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천천히 해.」 "미치겠군. 선생은 복도로 나가라질 않나. 메구미한테 좀 물어본 것 가지고⋯⋯ 나한테 왜 이래." 「봐주기가 없네.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네가 졸아서 그랬던 거야. 성실히 듣지 않으면 속상해.」 "쳇." 「반성한 거 맞아?」 "수업이 끝날 때까지 둘이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몽상에 잠겼지." 「다음에 또 졸거나 떠들면 복도 청소를 시킬 거야. 복습은 했어?」 "방과후에는 2 학년 녀석들과 한 시간 정도 날씨에 대해 얘기했다." 「조용히 게으름만 피웠으니 그래도 나보다는 낫네. 참 잘 했어요.」 침묵이 흐르고 이불이 몸에 스치는 듯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갑자기 조용해졌어.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잖아. 뭐 필요해?」 "필요한 거⋯⋯ 없다만. 하나면 된다. 누구든 내 하소연 들어 줄 놈." 고죠가 혼곤히 웃었다. 은근히 매서운 새벽 한기에 이불을 끌어올렸다. 「침대가 쓸데없이 크네. 킁.」 "너는 침대 좁으면 못 자잖아." 「춥단 말이야. 가끔은 나도 다른 이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 "그래, 그렇게 말하면서 지금 품속의 여자를 쓰다듬고 있겠지." 「아니, 너, 나를, 내가 무슨⋯⋯ 아니거든! 영상 통화 할래?」 "너 지금 옷 안 입었잖아. 어딜 감히 흉한 꼴을 들이밀려고." 「내 몸 말고, 얼굴을 보라고. 내가 거짓말하는지 안 하는지!」 "하아⋯⋯ 별로 알고 싶지 않다만. 할말 있음 어디 해 봐라." 「어디 가서 소문내지 마. 있잖아, 나 여자 만난 지 오래됐어.」 "얼마나 오래되셨나? 열흘? 일 년? 10 년 동안 몇 명이랑 했냐?" 「풉.」 "뭐가 재밌어." 그 웃음소리는 실소와는 사뭇 다르게 들렸다. "얼마나 됐는데. 몇 명인데. 말해 보란 말이다." 「말하면 놀릴 거잖아. 그러는 너는? 자신있어?」 "내가 누굴 놀릴 처지나 되냐. 한 명뿐이야." 「장난해? 그러니까, 다른 남자랑 한 번도⋯⋯.」 "⋯⋯." 「⋯⋯.」 지금까지 내게 전화기라는 것은 그저 급한 볼일이 있을 때 쓰기 위한 물건이었다. 딱히 중요한 용무가 없어도 상관없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인간들이 지키지 않아도 되는 약속을 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것이 언제라도 이렇게 뒹굴뒹굴 하며 떠들어도 되는 사소한 일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얼굴을 마주보며 얘기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 그런 식으로 수다떠는 건 나도 싫어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재밌다. 까짓거 물어봐 주지. "고죠 너는 어땠냐. 오늘." 「나는⋯⋯.」 고죠의 일과도 평소와 비슷했다. 밥 먹고, 일하고, 씻고, 끝. 그렇게 바삐 뛰어다니다 새벽이 되어서야 호텔로 돌아온 모양이다. 물론 운전은 예전의 나 대신 다른 누군가 했겠지만. 분명히 할 얘기가 없었을 터인데 막상 수다를 시작하니 끝이 없었다. 깨닫고 보면 벌써 3 시. 하나같이 대수롭지 않은 얘기들로 한 시간이나 떠들어댔다. "내일은 오는 거냐." 「어⋯⋯ 모르겠어. 도쿄로 돌아갈 예정이지만 내일도 일정이 빠듯해. 학교에 오래 머물지는 못할 것 같은데. 점심시간 때 잠깐 나올래? 밥 먹을 시간 정도는 있어. 늦깎이 공부를 응원하는 차원에서 선생님이 맛있는 거 사 줄게.」 "괜찮은 생각이긴 하다만. 진짜 약속인가." 「진짜 약속이지, 응. 아니면 뭐 하러 묻겠어.」 "네놈들은 알다가도 모르겠군. 그럼 됐다. 기억해 두도록 하지." 「알았어. 언제든 다시 전화해. 받지 못하면 내가 다시 걸 테니까.」 "새벽 댓바람에 걸 테다. 너도 나 때문에 잠 깼다고 불평하지 마라." 「불평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 지금부터라도 푹 쉬고. 잘 자, 스즈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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