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살이 내리고 그늘 안에서 쓰르라미가 운다. 뒷목에 맺힌 이슬땀으로 뜨거운 계절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하복은 아직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우연히 고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뭐 재밌는 일 없을까. 고죠를 찾았으니 이제 고민이 한결 가벼워졌다. 장난치기 더할나위 없는 상대 아닌가. 미루어 짐작하건대 상대는 고죠 가의 사람인 것 같았다. 평소와는 달리 고죠의 말투가 경직되어 있고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도 몹시 차갑게 들렸다. 현재 고죠는 어째서인지 본가로부터 분리된 채 살고 있다. 거의 연락만 주고받는 듯하다. 내가 떠난 사이 그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갔더니, 통화를 마친 고죠가 갑자기 휙 돌아섰다. 놀래키려다 도리어 놀라고 말았다. 통상적으로 인간들이 나와 구별하는 방법은 머리 모양이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지만 나는 답답한 걸 싫어하기 때문에 꽤 오래 전부터 포니테일을 하거나 동그랗게 말아 올린 모양을 고수해 왔다. 오늘은 고무줄이 끊어져서 하는 수 없이 머리를 내렸다. 잘 하면 속일 수 있지 않을까. 내 안의 저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쌤." "구나. 안녕." 뱃구레에서 솟구치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인간이란 역시 자기 위치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생물인가 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고죠 사토루가 이토록 다정해지다니. 도대체 언제부터 성실한 척해 왔던 걸까. 솔직히 너무 웃긴다. "저, 공부하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어서요." "그런 거라면 메구미가 잘 가르쳐 줄 거야." "후시구로 군은 다른 일로 바쁜 것 같아요." "그래? 요즘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네. 하하하. 실은, 쌤도 다음 일정 때문에 15 분 정도밖에 여유가 없어. 어떡하지. 음⋯⋯ 한 번 풀어 볼까. 목마르지 않아? 일단은 더위부터 피하는 게 좋겠다. 안으로 들어가자." 장난칠 때 만큼은 나도 참 진지하다. 마침 손에 들고 있는 문제집을 이용해 보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 것이다. "듣고 있는 거야?" "네?" "딴생각 하고 있지." 딱! 맙소사. 딱밤은 예상 못했는데. "죄송합니다. 제대로 들을게요." 무라사키 급 딱밤을 맞고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픔 위에 투지가 더해져 잇새로 울분 어린 신음이 새어나갔다. 그래도 꾹 눌러참고 문제집을 노려보았으나 하얀 종이에 답이 저절로 써질 리가 없었다. 아주 골머리를 앓을 지경이다. "역시 모르겠어요. 전혀 기억 안 나요." "그러니까 복습 게을리하지 마. 알았지." 문제집은 꼴도 보기 싫다. 문제와 씨름하다 보면 가끔은 시야가 뒤틀리고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정신차리고 눈을 바로 떠야 한다. 이러면 반대로 내가 당하는 것처럼 보이질 않는가. 혼나러 왔냐고. "선생님, 저는 이런 문제보다⋯⋯." 이렇게 된 이상, 자충수도 서슴치 않겠다. 그렇게 결심한 나는 요염하게 눈을 치켜뜨고 고죠에게 매달렸다. "좀 더 특별한 걸 배우고 싶은데요." 이번만큼은 아무리 고죠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겠지. 고죠는 나와 입술이 가까워지는 만큼 뒤로 몸을 뺐다. 놀랍게도 그 외의 모든 것은 평소와 같았고 오히려 태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도리어 내가 민망해져서 더 오기가 생겼다. "저한테만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나는 테이블 아래의 발로 고죠의 다리를 더듬거렸다. 그리고 어린 계집애의 몸으로는 터무니없이 농후한 음색으로 뜨거운 숨을 떨어뜨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수치스러웠지만 오기 때문에 주체할 수 없었다. 야릇하게 쓰다듬는 손이 서서히 흘러내리자, 더는 안 되겠는지 고죠가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애도 아니고 위험하게 불장난이야? 떼찌! 떼찌!" "아아악! 젠장, 눈치챈 거냐! 능구렁이 같은 자식!" 뜨거운 사랑의 매를 맞고 손바닥에 불이 났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장난치지 말라고 했지." 진작에 들켰다면 내가 딱밤을 맞을 필요는 없지 않았나. 고죠는 제자의 수양만큼 내 수양에도 상당히 신경을 쓴다. 가끔은 나를 교화하는 건가 싶을 정도다. 자꾸만 내게 무언가 배우게 하는 점도 과거에 그 녀석과 비슷하다. 나는 얌전히 펜을 집어들었다. 고죠를 흘깃 쳐다보니 그의 입 모양이 마이너스로 변했다. 조금 지나면 교집합 기호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지만 괜히 더 심란해졌다. 수학 문제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본가의 사람이었냐. 아까 밖에서 네가 통화하고 있던 놈 말이다." "⋯⋯." "너도 제법 무서워졌구나. 누구였냐. 짐작 가는 놈이 너무 많은데." "이름도 듣고 싶지 않을 거야. 무슨 짓을 해도 나한테는 가족이지만." 나는 고죠의 어깨를 붙잡았다. 고죠가 조용히 웃더니, 살며시, 그런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내려놓았다. 내가 물었다. "믿어도 되냐." 고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듣긴 좀 그런데." "내가 있으니 괜찮다. 나를 믿어라." 과거의 일은 그게 무엇이든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물렀던 우리를 변하게 만들었다. 이제 본가 놈들도 고죠의 허락 없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고 나도 순순히 당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오직 여기에 있는 당주님뿐이다. 고죠도 다른 건 몰라도 에 대해서 만큼은 내게 어느 정도 분명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러한 와중에도 마주닿은 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너를 돌려놓으려는 본가의 뜻은 지금도 변함없어.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안심이 되는 몸을 쓰고 싶었나 봐. 네 그릇 말이야. 그리고 스쿠나⋯⋯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고독한 싸움인 건 알았지만 정말 어디를 둘러봐도 적뿐이야." "스쿠나의 일이야 뭐, 그렇다 치고⋯⋯ 내 그릇을? 이거야 원. 어디 가서 식물인간이나 데려오지 않으면 다행이겠군. 거 기왕이면 주술사 가문의 여자 중에서 하나 납치해 오라고 해라. 당주님 또래에 얼굴도 귀엽게 생긴 녀석으로." "하하하. 지금 농담이 나와? 왜, 나한테 시집오게? 주술사 가문의 여자라고 해서 아무나 데려오지는 않거든. 물론 상대방의 얼굴이나 성격은 녀석들의 안중에도 없어. 그래서 매번 실패하는 건지도. 나도 참, 뭐라는 거지. 부끄러워라." "귀여운 자식. 그렇다고 얼굴이 빨개질 건 또 뭐냐. 그래도 네가 처음부터 고전에서 같이 수학했던 여자애들하고는 죽어도 못한다 해서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없었겠지, 뭐. 어쨌든. 그래서 우리 당주님이 외로우셨던 게로구만." "없었어, 없었어. 애초에 당사자 가문에서는 금지옥엽이라 고전에서 양성하는 일도 드물고 내가 특이한 케이스야. 그리고⋯⋯ 응. 솔직히 지난 10 년 간 네가 옆에 있었다면 덜 외로웠을 거 같아. 그때나 지금이나 내 편은 없어. 너밖에." 나는 고죠의 등을 쓰다듬었다. "같이 있어 줄까. 오늘 밤⋯⋯." "너어, 내일까지 다 풀어서 가져와!" "우이씨⋯⋯ 아, 아야얏! 아라써어!" "알지? 해답지 베껴 쓰면 주욱는다아?" 고죠가 운율에 맞춰 내 볼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토닥토닥. 여지없이 병 주고 약 주기다. 그는 시간을 확인한 뒤 서둘러 나갔다. 멋쩍은 마음에 멋대로 지껄인 건 나지만 볼때기가 얼얼했다. 왜 하필이면 저 녀석의 제자가 되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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