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수업이 끝나면 곧장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고 예전에도 자주 드나들었던 장소에 들러 휴식을 취하고는 한다. 이제껏 혼자일 때 다른 누군가 나타난 적은 없었다. 조용하고 좋은 곳. 나는 마루에 누워 시시한 생각에 잠겼다.
통상 무덤덤한 나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다. 누군가 내 귀를 파 줬으면. 내친김에 무릎베개까지. 그런 안락함을 위해 우타히메처럼 상냥하고 향기로운 여인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마침 생각하고 있었다. "아아, 누구에게든 응석부리고 싶구만." "나라도 상관없다면 받아 줄 수 있는데." 눈을 떠 보니 고죠가 마루 옆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이밍 좋게 나타나긴 했지만 생각했던 그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첫째, 상냥하지 않다. 둘째, 지독할 만큼 달달한 냄새를 풍긴다. 셋째, 덩치가 산 만한 사내놈이다. "잠꼬대를 했군." "괜찮아, 그 정도는." 시치미 떼도 소용없나. 조용히 일어나 뻐근해진 어깨를 주물렀다. 고죠가 마루에 앉아 나를 보며 빈정거리듯 웃었다. "힘들어?" "별로." "에이. 그렇게 말하면서, 실은 나한테 기대고 싶은 거 아니야?" "뭐, 그래. 이제는 솔직하게 기대지 않고는 힘들지도 모르겠다." 고죠가 갓 성인이 될 무렵만 해도 내가 보기에는 놈이나 제자들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고, 생각도 조금 바뀌었다. 나이가 스물 여덟인데 슬슬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 줘야지. 자존심만으로는 버티지 못한다. "며칠만 쉬다 와.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음?" "무리시키지 않겠다고 처음에 약속했잖아." "그런 약속 했던가. 그 이전에 진심이었냐."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고 쳐. 도망치면 죽는다." "이제 협박당하는 것도 지겹구나. 얼른 죽여라." "제대로 이해 못한 것 같은데. 때가 되면 너를 내 무덤 장식품으로 쓰고 싶어질지도 모른다는 뜻이야." "젠장할! 고죠 놈들, 언젠가 씨를 말려 버릴 테다!" "감히 당주님 면전에서 저주를 퍼부어? 이제 집에서 나갔으니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무서운 게 없지?" "이제 와서 무서울 게 뭐 있어!" "알잖아, 어설픈 저주는 오히려 너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거. 정확히 반대의 저주를 받게 될지도 모르지." 나는 고죠의 팔뚝을 툭 때렸다. 맞을 줄 알았음 세게 때렸을 거다. 나로서는 당연히 뱃속의 묵은 수치심까지 끌어내 고죠 가를 저주하고 싶다. 하지만 다른 한 곳에는 그의 유년기를 지켜봤던 기억, 흔히 말하는 미운정도 있다. "지금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무, 무릎. 한 번만 빌려 주라." "어허. 선생님이야. 그건 안 돼." "이렇게밖에 응석부릴 줄 모른다." 나는 마루 밖으로 반쯤 튀어나와 있는 고죠에게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그가 마지못해 따라 주었다.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사내놈의 허벅지라도 마룻바닥보다는 낫다. 달달한 냄새도 그럭저럭 참을 수 있다. "너는 누군가의 친절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구나." "겨우 무릎베개 정도로 생색내기냐. 너랑 나 사이에." 한쪽은 처마가 다른 쪽은 하늘이 차지한 가운데 고죠의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고 있었다. 웃어라, 웃어. 조금 낯뜨겁긴 하지만 마주보는 것이 새삼 민망하지는 않았다. 그의 손끝이 뺨을 타고 올라와 내 눈 밑에 멈추었다. "정말 한 번만이야⋯⋯ 오늘따라 더 빨갛네. 여기." 어떤 그릇을 고르든 내 눈 밑에는 붉은 혈색이 도드라져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내가 왜 저주받았고 하물며 어쩌다 죽게 되었는지조차 잊어버렸으니. 기억이 사라지면 결국 원념만 남아서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그나마 기억나는 건 저주받기 전 숨이 다할 때까지 통곡했다는 점이다. 피눈물을 쏟을 때 그 쓰라림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펑펑 울고 나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 같아." "체질이다, 체질. 내가 이 나이 먹고서 울 거 같냐." "그냥 내 기분이 그래. 응석이라도 받아주고 싶어." "우쭐거리긴. 이 몸의 너그러움인 줄도 모르고 무하한 없이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에 너무 익숙해지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듣고 있냐. 더 조신하게 굴어. 아무나 막 만지게 하지 말고. 그리고 너도. 갑자기 왜 이렇게 만져대. 어? 어어?" "걱정하지 않아도 여기서 더 이상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 나도 이제는 그런 혈기왕성한 남자애가 아니니까 안심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대신, 너한테서 1 초도 눈을 떼지 않을 거야.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 하면 바로⋯⋯." 바로 뭐지. 미리 알아 놓는 것도 좋지만 본능적으로 귀를 막았다. 고죠는 그런 나를 보고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리고 보란듯이 몸에서 힘을 뺐다. 단지 눈을 떼지 않은 채 한가한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장난치듯 만지작거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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