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타히메의 방문 소식에 얼굴이나 볼까 하고 무작정 찾아왔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별채에서 여유로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부탁하지 않아도 그녀는 상냥하게 반기며 내게도 차를 내려 주었다. 역시, 사내 놈보다는 솜씨가 훨 낫다.

 "정말 화가 치미네. 고죠 그 놈은 왜 이제껏 시치미 딱 떼고 얘기하지 않았던 거야. 벌써 몇 번이나 네 안부를 물었는지, 너는 모를걸. 오늘만 해도 그래. 네가 도쿄부에 있는데도 하마터면 얼굴도 못 보고 그냥 갈 뻔했잖아."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고, 지난 시절처럼 고죠의 호박씨를 까기도 하고. 어떤 용무로 도쿄에 방문했는지 세세히 묻지는 않았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다만 우타히메와는 안면이 깊어 추억 얘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기억나? 한 번은 임무 중에 머리카락을 절반이나 태워먹고서 엉엉 울었던 적도 있잖아."

 "내가 기억하는 너는 언제나 완벽한 숙녀였다. 글쎄, 누군가 내게 잊어 달라 말하긴 했지."

 "이제는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어. 구석에 숨어 있을 때, 네가 그을린 부분을 잘라 줬었지."

 "혹시라도 또 태워먹으면 나를 불러라. 적어도 그때보다는 능숙하게 자를 수 있을 테니까."

 "스즈카도 참, 이제 두 번 다시 불에 탈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괜찮은 생각이네. 가끔은 내 머리카락이지만 성가시거든. 엉성해도 좋으니까 조금 잘라 주지 않을래? 오랜만에 만났는데 추억 하나 더 만들어 나쁠 것 없잖아."

 우타히메가 답례라며 리본을 풀어 줬다. 보통 머리를 묶기 위해 쓰는 것보다 큰 편이지만 수수한 느낌의 리본이었다. 우타히메의 그런 부분은 내가 알고 있는 한 여인과 닮았다. 강하면서 사랑스럽고, 정숙하면서 덜렁이 같은.

 마사미치에게 도구를 빌린 나는 우타히메의 허리까지 오는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빗은 다음 조금씩 잘라냈다. 오랜만에 머리카락을 만졌을 때는 손이 떨렸지만 놀랍게도 손끝에 감각이 희미하게나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스즈카는 의외로 이런 일에 익숙한 것 같아. 굉장히 섬세하달까. 진지한 모습이 평소랑은 조금 달라 보여. 오늘은 그때보다 훨씬 능숙한 느낌이고. 이건 경험에서 비롯된 손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겠는데. 혹시, 과거에 미용사였다던가."

 "미용사였던 적은 없다. 나는 여자의 머리카락만 잘라 봤어. 그것도 한 사람만. 처음 만났을 때 머리 모양이 이상하다고 제 분에 못 이겨 우는 것을 조금 만져 줬는데.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종종 내게 부탁하더군. 너랑 닮았어."

 그 여인도 내게 머리 장신구를 자주 선물했지. 하나같이 예뻤어. 하지만 너도 알잖냐. 나한테 예쁜 장신구는 필요하지 않아. 솔직히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끝까지 간직할 자신이 없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앞머리를 자를 때는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나는 우타히메의 이마 위로 조심스레 가위를 가져갔다.

 "스즈카가 그렇게 얘기하다니 신경 쓰이는데. 네 목소리에서 깊은 애정이 느껴져. 누구였을까. 되게 귀여웠을 것 같아. 나랑 닮아서 그렇다는 건 아니고. 후후. 아마 작은 여자애였겠지. 궁금해. 어떤 사람이었는지 가르쳐 줘."

 "고죠의⋯⋯."

 "응?"

 "할머니랄까⋯⋯."

 "뭐어? 할머니라고?"

 그때 나는 봐선 안 될 것을 보고 말았다.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어떻게, 아니, 여긴 도쿄부이고 등장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래도 왜 하필이면 그녀와 내가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두 여자의 앙숙이 나타난단 말인가.

 우타히메가 눈을 감은 사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어렸을 적부터 마주치기만 하면 티격댔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죠가 검지를 입술 위로 슥 가져가더니 저지할 틈도 없이 내게서 가위를 빼앗아 갔다. 그리고 앞머리를, 앞머리를⋯⋯.

 "으아아악!"

 우타히메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방심하고 있을 때 눈을 뜨자마자 갑자기 앙숙과 마주쳤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 때문에 가위가 영 좋지 않은 방향으로 빗나가서 그녀의 앞머리를 뭉탱이로 잘라 버렸고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졌다.

 "무슨 짓이야!"

 "아이고. 이거 어떡하냐. 나는 똑바로 잘라 주려고 했는데 네가 움직이는 바람에. 걔처럼 됐다, 걔. 미요였나."

 "고죠 사토루, 어째서 네가! 죽여 버린다!"

 "야, 생각보다 괜찮아. 안 이상해. 예쁜데?"

 "지금 장난해? 스즈카, 뭐라고 말 좀 해 봐!"

 "어⋯⋯ 일단, '예쁘다'는 거짓말이 아닐 거다."

 고죠는 이상한 앞머리를 좋아하거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화만 돋울 게 뻔하니 가만히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우타히메는 얼굴이 벌개지도록 성화를 부리면서도 가까스로 품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학창시절과는 달랐다. 교토부 대표로서 도쿄부를 방문한 상황인 만큼 소란피우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인내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어떡할 거야! 책임져! 반전술식이든 뭐든 써서 돌려놓으라고!"

 "하하하. 그런 건 스즈카나 쇼코한테 말해. 나는 못해 줘. 미안."

 그리고 나는 더는 동요하지 않았다. 두 녀석이 티격대는 모습이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고 한편으로는 '그래, 이런 그림이지'라거나, '잘 어울린다'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용히 지켜보다 어기적거리며 중재에 나섰다.

 "고죠, 우타히메가 상대해 주지 않아 쓸쓸했던 거냐."

 "무슨 말이야, 스즈카! 이 자식은 내 철천지 원수라고!"

 분노한 우타히메에게 멱살을 잡힌 고죠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입을 다문 채 못마땅한 표정만 지었다. 그런 장난을 쳐 놓고 예상 못한 일도 아니었을 텐데 다행히 무하한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야, 뭐. 우타히메라면 아무리 화가 난들 진심으로 고죠를 어떻게 해 보려는 마음은 품지 않겠지. 잘 보면 고교 시절 풋내기들 같다. 나로서는 별 감흥이 없지만 한 번쯤은 보지 않으면 허전한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하다.

 "어어, 울지 마. 뭣하면 내가 괜찮은 남자 소개해 줄게. 따라와."

 "안 울어! 찾지 마! 원수는 너 한 명만으로 충분하거든! 저리 가!"

 그렇다고는 해도 제 선조님과 똑같은 짓을 할 줄이야. 언제나 닮았다고는 생각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소름이 끼쳤다. 두 사람의 모습이 다른 두 사람의 모습과 겹쳐 보였달까. 가슴이 뭉클하면서 웃음이 나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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