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하구만. 어디 나한테 괴롭힘당해 줄 놈 없나. 이런 생각으로 고죠의 방에 가던 중이었다. 뜻밖에 복도에서 그를 발견한 나는 거나하게 취한 양 허부죽 웃었다. 반기러 나온 건 아닐 테고 어찌 알아채고 도망치려는 겐지. 그런데 한 놈이 더 있었다. 대체 뭘 수군대길래 사내 놈 둘이 얼굴을 바짝 대고 저리 붙어 있나 싶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썰렁했다. 고죠가 눈을 가린 채 웃어도 입가에는 생기가 없으니 마치 귀신 같다. 그 속을 모를 리 없고 가슴이 선득했다.
"미안한데, 방금 뭐라고 했어?" "분명히 들었잖아. 개자식이라고. 아, 내 말은. 당신 말고. 게토 스구루 말이야. 범죄자들은 다 개자식이니까. 전부터 궁금했어. 어떻게 그런 놈을 그리 편하게 보내 줄 수 있지? 오히려 죽여서 멀리 도망치게 해 준 거였나? 그건 또 다른 범죄라고 생각해. 그날 다른 주술사가 거기 있었다면 어떻게든 놈을 산 채로 끌고 왔겠지. 그리고 남은 죗값을 치르게 했을 거야. 잔인하게 고문해서. 고통에 못 이겨 전부 불게 만든 다음 아직 처리하지 못한 잔당까지 모조리 해치워 버릴 수도 있었어. 당신이 그랬어야 했는데. 이렇게 너그러울 수가 있나. 너도 똑같아. 개자식아." 그 놈 입심 좋구나. 풍요로운 시대에는 먹을 것이 넘쳐나니 저리 떠들면서 기력이 남아도는 것도 문제다. 누가 뒤지거나 말거나 어떡하면 오늘 하루를 굶지 않을까 걱정하던 옛날 인간들이 차라리 순박했던 것 같기도 하다. 듣자하니 아주 헛소리도 아니다만, 너무 과격하다. 누군가의 약점을 들춰내며 상처입힐 때는 저에게도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할 텐데. 입만 살아서 나불거리지 그리 뱃심이 두둑한 것 같지도 않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인가. 거대한 덩치들이 복도 한가운데 딱 버티고 섰다. 지나가긴 아무래도 어렵겠는데 그렇다고 돌아가기도 뭐하다. 그나저나 고죠는 왜 아직도 귀신처럼 냉소만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서로 욕하든 치고박든 뭐라도 할 것이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오히려 불안하고 기어이 소름이 돋았다. 살기다. 자칫하면 일나겠다 싶어서, 나는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가 난장맞을 놈의 사타구니를 냅다 걷어찼다. 사토루를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란 말이다! "악! 무슨 짓이야!" "스즈카⋯⋯ 우와." 나는 얼치기 놈에게 거시기에 벌레 붙었다 대충 둘러대고는 잘 씻고 다녀라 덧붙였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던 놈이 악에 바쳐 고개를 치들었다. 덤벼들기 전에 고죠가 나를 안전한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런데 아파 죽겠다는 얼굴이 왠지 눈에 익었다. 주술사가 넘쳐나는 것도 아니고 과거에 본 적 있다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생각났다! 네놈, 나 따라다니다 걷어차였던 놈이지?" "너를 따라다녔어? 야, 왜 남의 여자 친구한테 집적대!" "아줌마 기억력도 좋다! 그건 벌써 10 년 전의 일이잖아!" "이 새끼가⋯⋯." 지난 일이라지만 놈도 철딱써니 같은 과거가 새삼 부끄러운지 얼굴이 벌개지더니 어기적어기적 자리를 떴다. 차라리 잘됐다. 어여 가라. 나는 고죠를 꽉 붙잡고 쫓아가지 못하게 온몸으로 막아섰다. 방심했다가 진짜 일날 뻔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고죠가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불심지가 올라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야 10 년 전이면 내 불룩한 배를 끌어안고 히쭉해쭉하던 해였다. 홀몸도 아닌 여자한테 집적댔다니 눈이 뒤집어질 만도 하다. 고죠. 부르는데 무언으로 칼을 벼린다. 아직도 어기적거리며 저기까지밖에 못 간 답답한 놈 때문이다. 사토루. 이번에는 크게 호령했다. 그제서야 우리 스즈카 하며 돌아본다. 어설프게나마 내 남편 역할을 자처했던 그 시절처럼. 겉으로만 웃고 있을 때도 살벌하지만 화가 난 고죠에게 아무런 기색이 없다면 그건 정말 소름돋는 상황이다. 결코 건드리면 안 될 곳을 건드려 버린 거다. 심지어 그때 일은 나라도 함부로 들먹였다간 그냥은 안 넘어간다.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세월이 흘렀으니 터놓고 얘기해 보자 하면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그거다. 무서워서. "고죠, 화내지 마라. 웃어 다오." "인간은 완벽할 수 없어. 스즈카." "무섭단 말이야." "하하하. 웃기네." 고죠가 내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간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고 헤벌쭉했다. 고죠의 방이라면 아무래도 다른 장소에 있을 때보다는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응큼한 생각을 품었기 때문이다. 나는 책상 앞에 앉는 그를 의자와 함께 주욱 잡아당겼다. 그리고 빙글 돌려서 당당히 무릎을 차지했다. "농담이 아니다. 나는 진심이야. 아무리 난장맞을 놈이라도 인간이잖냐. 네 동료이고. 너보다 약해. 어차피 별 볼일 없는 놈이니 봐주는 셈치고 참아라. 도저히 안 될 때는 나한테 말해. 꼭 해야 한다면 나쁜 짓은 내가 다 할게." "예전의 너였다면. 스즈카 고젠이 아닌 다테에보시였다면. 네 말을 듣고 걱정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솔직히 말이야. 네가 나쁜 짓을 해 봤자 고자킥밖에 더 하겠어. 웃음이나 사지 않으면 다행이지. 너무 귀엽잖아." 고죠의 팔이 내 허리를 감았다. 우악스럽게 생긴 손은 앞으로 왔다. 그는 불현듯 한숨을 푹 쉬더니 내게 기대었다. 그러더니 자꾸만 그리워지는지 이제는 시시하기 그지없는 납작한 배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려 보는 것이다. "안고 싶냐." 고죠는 얼굴을 묻은 채 다만 응 하고 대답했다. 응이라고. 잘못 들었나 싶으면서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물론 그런 일이 정말로 벌어질 리 없거니와 어차피 기대와는 다를 것이므로 일찍이 단념했다. 그는 보잘 것 없는 내 몸을 원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한때를 그리워하고 있을 뿐. 기억 속의 자신처럼 웃고 싶은 거다. 차라리 냉담했다면 둘 다 편했을까. 그런 애처로운 마음까지 들었다. 지독하다 할 만큼 나를 아끼는 고죠에게 괴롭힘 당할 바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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