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부지런히 일어나 기숙사를 나섰다. 전철 타고 역에서 또 버스 타고. 나이가 차 운전이나 할 수 있게 되면 편해지려나. 정류장에서 내려 산길 입구까지 꽤 걸었다. 답답해 죽겠다고 하는 꼬맹이를 위해 등산하러 온 것까지는 좋았다만 혈기가 넘쳐 일부러 제일 힘든 코스를 고르는 건 역시나 말렸어야 했나 후회가 된다. 막상 오르기 시작하려니 이건 사람 다니는 길도 아니고 짐승이나 다닐 법하다. 숨을 훅훅 몰아쉬며 흙길에 빠지고 바위를 넘어 그래도 중턱까지 왔다. 그런데 이 녀석 신나서 나가잘 때는 언제고 또, 또, 코피를 왈카닥 쏟았다. 결국에는 내가 나서야 하는데 아직은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 기왕 여기까지 온 것 더 올라가 보기로 했다.
중턱부터는 잘 다져진 길과 계단이 나왔다. 오백 몇 계단쯤 되는 걸 반쯤 올라서 돌아보니 가까운 마을부터 뿌연 안개로 휩싸인 빌딩까지 한눈에 보였다. 틈틈이 물을 마셔 가며 계단을 지나고 다시 흙과 바위를 지났다. 한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을 때, 풀 한 줄기가 눈에 띄었다. 칡 넝쿨을 헤치고 들어가 똑 따 보았다. 약초였다. 이 놈을 그냥 두고 가긴 아쉽다. 두어 줄기 더 챙겼다. 자칫하면 독초와 헷갈리기 쉽상인데 나는 그런 거 없다. 꼬맹아, 봐라. 바위에 가려서 잘 봬지도 않는 꽃을 내가 찾았다. 유월에 드문드문 얼굴을 내미는 은방울이다. 산마늘과 닮아 생각 없이 먹다가 까무러치기 쉬운 독초이기에 종래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꼬맹이가 좋아하니 몇 송이 꺾었다. 손톱 만한 크기의 올룽한 꽃이 달랑달랑 바람에 흔들리며 향수보다 짙은 꽃내음을 날렸다. 그때 주머니에서 전화기가 울렸다. 누구인지는 뻔하다. 일일이 전화해서 귀찮게 굴기도 민망하거니와 조용히 갔다 오면 되겠지 했다. 그새 학교로 돌아와서 내가 없다는 것을 알았나 보다. 사실 잠깐 시내에 다녀오는 것 정도는 상관없지만 도쿄를 벗어나게 될 때에는 고죠에게 미리 얘기해야 한다. 그렇게 무언 중 계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토루라는 이름까지 어쩐지 기운 빠지는 듯해서 한숨을 푹 쉬고는 그대로 흙바닥에 주저앉아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래도 물어보면 대답해.」 "내 위치가 웬 산 한가운데로 나오니 걱정되더냐. 납치당해서 지금쯤 어딘가에 묻혀 있을까 봐. 아니면 내가 나무에 목 매달고 죽기라도 할까 봐. 꼬맹이가 하도 답답하다 해서 등산하러 왔다. 여기가 제일 가깝다는 거 알잖아." 「미안해. 제자들한테는 내가 좀 더 신경 쓸게. 그래도 메시지 하나 정도는 남겨 줄 수 있었잖아. 나한테 얘기하면 되지. 왜 몰래 나가. 게다가 혼자서. 무리하지 말고 그만 들어와. 나한테 와. 오늘은 계속 학교에 있을 거야.」 "이제 정상이 코앞이다. 꼬맹이랑 약속했어. 정상까지 올라가 보겠다고. 나도 미안하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게 하마. 그래, 돌아왔니. 요즘 제대로 얘기할 기회도 없는데 이렇게 또 어긋나 버렸구나. 보고 싶었다. 이따 보자." 나는 고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끊었다. 고작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 하고서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문득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람이 불어닥쳤다. 햇빛을 가리려고 쓴 모자가 낭떨어지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날아가는 모자를 잡다가 좋은 것 하나 더 발견했다. 이 놈 보게. 고산지대 암벽에만 자라는 귀한 몸이시다. 심심파적으로 소일거리 삼아 나물 뜯으러 다니는 온천 마을 할매들이 봤다면 좋아했을 거다. 본가에서는 취급도 안 하지만. 꼬맹이가 등산 얘기를 꺼냈을 때는 귀찮았는데 정상에 올라 썩 훌륭한 경치를 보고 맑은 공기도 쐬니 좋다. 오랜만에 산을 타는 것도 재밌다. 촌구석에서 지내다 보면 유흥거리도 없고 그저 산으로 약초나 캐러 다닌다. 희귀한 것을 찾으면 할매들이랑 나눠 먹고는 했다. 웬수 놈들 몸보신하고 오래 살라고 본가에도 몇 번 보냈다. 이건 뭐야 했겠지. 생각만 해도 웃겨 죽겠다. 나 따위가 감히 걱정하지 않아도 뭐 하나 부족할 게 없는 놈들이니까. 사실, 심마니에도 등급이 있다면 내가 특급이라 할 수 있다. 시대가 바뀐들 섬나라 생태가 얼마나 변하겠는가. 지금은 아예 사라져 버린 식물도 있고 그 자리를 외래종과 변종들이 차지했지만 내 눈은 못 피해 간다. 척하면 척. 새로운 약초를 발견할 때마다 혼자 쫑알거리며 꼬맹이한테 가르쳐 주고 꽃이 어여쁘게 피었으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는 아직도 솔가리 같은 낙엽과 밤 껍질이 푹신하게 깔려 있어 저벅저벅 밟으며 걸었다. 하나같이 거무투룩한데 유난히 붉게 물든 자리가 있었다. 꼬맹이가 놀랄까 봐 이건 오디 나무 열매라 설명하고 몇 개 따 먹었다. 내 손도 빨갛게 됐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산수유가 있어서 가까이서 보려고 다가가는데 주머니 속 전화기가 아까보다 더 시끄럽게 울어댔다. 화면을 보고 조금 놀랐다. 그새 한 시간이나 지났을 줄은 몰랐다. 「도대체 거기서 뭐 하는 거야.」 "그냥 돌아다니고 있다. 배낭을 채우면서." 「산에서 함부로 채집하면 안 돼. 빨리 내려가.」 "이미 뜯어 버린 걸 어떡해. 다시 붙여 놓을까." 「그건 마음대로 하고. 학교로 돌아오란 말이야.」 "알겠다." 「아니, 모르는 것 같은데. 도착하면 바로 달려와.」 "그래, 그래. 가면 되잖아. 서둘러야 하니 끊겠다." 「너⋯⋯.」 고죠로서는 나를 도쿄에 그리고 되도록이면 고전에 묶어 두는 게 최선이다. 쇼코가 말했듯이. 그나마 조용히 지낼 수 있는 게 감시를 받고 있기 때문이니 감시 없이는 안전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고전에만 얌전히 있으면 안심이라 여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불안하다. 고독하다. 꼬맹이 핑계를 대면서도 녀석 못지 않게 답답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죠와 있으면 즐겁다. 보고 싶었다는 말도 두 말 할 것 없이 진심이다. 오늘은 계속 학교에 있다니 속으로 웬일이냐 생각하면서도 귀가 솔깃했다. 냉큼 돌아가 어화둥둥하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그런데 무슨 심술이 난 것인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나는 전화기를 진동으로 바꿔 놓고 배낭 깊숙이 밀어넣었다. 듣기 좋은 말로 구슬리면 기분이 풀리려나. 그럼 이번에는 넘어가 주려나. 오히려 화만 돋울 수도 있다. 별로 기대 안 한다. 두 번째 통화에서는 목소리가 아주 차가웠으니까. 도망칠 것도 아닌데 해 지기 전에만 들어가면 되겠지. 거기서부터는 한 번도 전화기를 꺼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버스와 전철을 타고 고전으로 돌아왔다. 하늘이 붉게 물든 저녁이다. 나는 기숙사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고죠와 딱 마주쳤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갈까. 고민할 틈도 없었다. 그가 돌아보았을 때 심장이 철렁했다. 소름끼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고죠는 성큼성큼 걸어와 나를 끌어안았다. 설마 이게 끝은 아니겠지. 역시 얼굴은 무서웠다. "뭐 하다 오는 거야?" "말했잖냐. 약초 캤다." "다섯 시간 동안? 정말?" "나는 산에 갔던 거다. 장마당이 아니라. 그래도 나니까 후딱 하고 온 거야." "어디 보자. 도대체 이게 다 뭔데. 많이도 캤네. 아주 민둥산을 만들어라! 어?" 오늘 채집한 약초만으로 빵빵해진 내 배낭이 고죠를 당혹시켰다. 너무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혀 버린 모양이다. 어차피 그냥 넘어가긴 글렀으니 최소한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땀 냄새 풀풀 풍기며 혼나는 것만이라도 피하고 싶었다. "내가 애도 아니고 뭔 걱정이냐. 미안하지만 먼저 들어가마. 전부 다듬고 널어 놓으려면 지금부터 해도 늦어." "어딜 도망 가. 하, 어이가 없어서. 그 많은 걸 어쩌려고." "글쎄, 본가에 보낼까." "필요없어! 윽⋯⋯ 땀 흘린 거 봐. 얼굴도 빨갛게 그을렸네." 고죠가 주머니에서 하르르한 무언가를 꺼내들어 내 땀을 닦아 줬다. 내가 자수를 놓고 선물한 손수건이었다. 웬 주책이람. 다짜고짜 끌어안지를 않나. 괜찮다 하고는 점잖게 뿌리쳤다. 고죠의 불만 가득한 입술이 꿈틀거렸다. "왜 내 전화 안 받았어." "전화했구나. 못 들었다." 고죠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꾹 참고 비장한 얼굴로 전화기를 꺼냈다. 그가 화면을 보여 줬다.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이름. 난쟁이똥자루. 양쪽 끝에 하트. 내가 받지 않은 기록만 어림잡아 봐도 다섯 개가 넘었다. "나 원 참.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는구만." "도망칠 생각 없는 거 알아. 그냥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던 것뿐이냐? 불안했던 거 아니고?" "왜 불안해야 돼? 나한테 푹 빠져 있는 거 아니었어?"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맞아. 그럼 됐다. 알면 됐어." 잘났다. 여전히 콧대는 높아서 반반한 얼굴로 거들먹거리는 꼬라지가 어지간히 뻔뻔스럽고 아니꼬와 죽겠다. 그러나 좋아서 웃음이 나는 걸 별 수 있나. 이리 웃는 데는 까닭이 있거니와 곁에 두는 것만으로 피로를 잊는 듯하다. "오늘은 좀 더 같이 있고 싶었는데. 보고 싶다 했으면서." "그래, 그래. 네 방에 가서 기다리고 있거라. 일단 좀 씻자." 고죠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지만 당연하게도 닿지 않았다. 그 손으로 대신 녀석의 엉덩이를 툭 툭 때려 줬다. 귀여워서 깨물어 주고 싶은 마음이라 여기면 그만인 것을. 싫다고 아양을 떨다 쏙 내뺀다. 바라보며 그저 껄껄 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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