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를 걷고 있노라면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더없이 화창한 오늘은 투명한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과 짙은 녹음으로 만연했다. 이런 날 일에 매달려야 했다면 불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기분 좋게도 더 이상의 수업과 훈련은 없다. 실로 오랜만의 여유라서 다른 제자들도 외출을 한 것 같다. 한편 고죠를 포함한 교직원들은 임무 등의 이유로 지금 이 순간에도 국내나 해외로 출장나가 혹사당하는 중이라 들었다. 그나저나 기숙사가 낡아 여기저기 말썽이다. 마사미치에게 불평을 늘어놓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 들어가려고 보니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고죠의 목소리가 틈새로 들려왔다. 호기심을 느낀 나는 기척을 숨기고 귀를 살짝 기울였다. "고생 많았다. 너도 오늘 하루쯤은 쉬어라." "학장님이 말했어요. 뭔 일 생겨도 책임 안 져." 상당히 거만하지만 지금 주술계와 고전이 고죠 사토루 없이 제대로 돌아갈 판국이 아님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수업은커녕 학교에 붙어 있을 틈도 없다. 전부터 알고는 있었는데 요즘들어 더욱 실감한다. "웬일이래. 아무튼 덕분에 오늘은 일찍 들어가네." "게 섯거라, 고죠 사토루. 아직 안 끝났다." "뭐, 뭔데요. 갑자기 풀 네임 부르지 마요." "그동안 미안했다. 그때도 말했다시피 불가항력이다만. 너도 생각이 있을 테니 네 선택을 존중하마." "하하하. 나는 지금도 아무 생각 없어요. 나 대신 이사회에 변명이나 잘 해 주세요. 어쨌든 고마워요." "이 놈이." 나는 고죠가 나오기 전 재빨리 귀퉁이에 숨었다. 무슨 얘기였던 거지. 그 마사미치가 고죠에게 사과를 하다니. 고집 세기로는 용호상박인데 설마 이제 나이가 들어 고죠를 꺾지 못하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잠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방에서 걸어나온 고죠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마사미치의 태도가 그에게도 예상 밖이었던지 문득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몽상에 잠긴 고죠로부터 더는 숨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귀퉁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예스! 드디어 나도 쉰다! 오늘은 쉬는날!" 별안간 노래를 부르며 고죠는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주먹을 꼭 쥐고서 흔드는 게 꼬맹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어떻게든 웃음을 참았으나 내가 흐뭇함까지 감추지는 못했듯이 고죠도 혼자가 아니었음을 알아챈 뒤 어쩔 줄 몰라했다. 누구든 숨어 봤자 고죠 사토루의 손바닥 안이건만 너무 기쁜 나머지 육안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나 보다.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냐." "어, 없는데. 너 왜 거기서 나와. 놀랐잖아." "그냥 기분이 엄청 좋아 보이길래. 실례했다." 도저히 웃음을 주체할 수 없는 나는 그런 내 얼굴을 고죠에게 보이기 차마 민망해서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참아야 하는데 안 된다. 내 안에 억눌려 있는 웃음가마리를 통제할 수 없어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모두 쉬는날! 나도 쉬고! 너도 쉬고! 다 쉬어! 예!" 어, 시원하다. 이걸 못하고 참는다면 종일 근질근질할 거다. "거 참! 흠흠. 저기, 스즈카. 오늘 말이야⋯⋯."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오늘 뭐 하지 하고." "얼마나 바쁘게 살았으면 노는 법도 잊어 버렸냐. 차라리 잘 됐군. 다른 생각 말고 쉬어라. 이참에 잠을 좀 자 두던가. 설마하니 혼자가 쓸쓸한 건 아니겠지. 그럼 좋은 일 하는 셈치고 나 좀 도와주련. 어디까지나 너 쉬는 김에." "어떻게 도와줄까." 말하면서도 고죠가 그토록 호의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쉰다고 좋아하더니. 고죠도 자습에 어울려 달라는 것 외에 다른 볼일은 없다는 걸 알 텐데 그마저 반기는 모습을 보니 차마 그런 시시한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놀자! 그러니까, 내가 노는 걸 도와라. 날씨도 좋은데 나갈까. 아니, 그러면 제대로 쉴 수 없으니 일단 집으로 가야겠다.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일도 많잖아. TV 보고, 게임 하고, 만화책 읽고, 그러다 질리면 낮잠이나 실컷 자는 거지. 어때." 평소보다 밝은 목소리와 과장된 몸짓으로 혼자 조잘대는 것 같아 좀 민망했다. 엄지를 치켜세우거나, 태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심지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요란법석을 피우는 와중에도 고죠는 말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고죠, 듣고 있냐." "듣고 있어. 내 쉬는 날인데 왜 네가 더 신났어. 뭐야 그게. 결국에는 또 어렸을 때처럼 놀자는 거잖아. 싫지는 않아. 어차피 들어갈 생각이었고 마침 낮잠이 자고 싶었거든. 아무리 그래도 이럼 안 되지만⋯⋯ 응, 도와줄게. 같이 돌아가자." 분명히 현실을 직시하였건만. 고죠의 마지막 말이 시간을 되돌렸다. 과거의 색으로 풍경이 다시 칠해졌고 나는 그와 마주서 있었다. 맨날 사고치고 다니는 주제 도련님답게 단정한 교복. 동그란 선글라스를 쓴 소년의 목소리를 들었다. "가끔은 선글라스를 쓴 너도 보고 싶구나." 고죠가 안대로 손을 가져갔다. 빌어먹을 인간 따위가 쓸데없이 좋은 얼굴을 가져서는. 다음부터는 안대 벗으면서 이쪽 쳐다보지 말라고 해야겠다. 안주머니에 선글라스가 있었다. 아직 방심하면 안 된다. 고개를 살짝 흔들면 슬로 모션처럼 머리카락이 가라앉고 흑백이 대비를 이룬다. 유리에 반사된 세상은 깨끗하다. 어둠 너머에서도 눈동자가 빛난다. 한마디로 걸작. 봄날의 햇살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다니 대대로 물려온 것이 과연 고집만은 아니로다. 그래도 벚꽃 떨어지는 환상은 좀. 아무래도 눈에 뭐가 씌였나 보다. 어휴.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날아서 날게."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고죠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고죠가 부드럽게 내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붙잡지 않아도 돼. 멀리 가지는 않을 거니까." "무슨 소리야. 이대로 집에 가는 거 아니었냐." "아닌데. 차까지만 날아가서 내가 운전할 건데." "그렇구나." 확실히 빛의 속도로 공중을 날아갈 것 같으면 차라리 도로 위를 달리는 게 나을 것이다. 고죠도 교통수단을 더 신뢰하는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문득 다른 제자들이 떼지어 매달려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고죠가 내게만 유난히 철벽 같은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죠에게서 떨어졌다. 그런데 머뭇거리던 그가 내 몸을 다시 끌어당겼다. 안긴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하지만 제대로 에스코트 해야겠지. 이제 갈까." "응." 내 손으로 끊어낸 인연을 내가 이어붙였다. 이 무슨 우스운 꼴인가. 가슴이 뜨겁게 끓어오르며 아우성친다. 심지어 그 순간의 표정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제는 시치미떼도 소용없다. 이미 들통난 마당에 그에게만은 숨길 이유가 없다. 고죠가 어렸을 때 계집애들의 떠드는 소리를 들어 보면 공주님 안기를 하고 공중에 붕 뜬다든지 하늘을 걷는다든지 벼나별 기행이 다 등장했다. 그러나 환상은 환상일 뿐이다. 실제 고죠는 무하한을 신중히 다뤄서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육안의 컨디션 문제로 장시간 운전할 수 없고 차를 타거나 이지치를 데리고 다니는 등 제약도 많다. 원래 운전은 언제나 내 몫이었는데 지금은 아직 면허 취득도 못하는 꼬맹이라 그런 간단한 일조차도 할 수 없다. 아무튼 고죠 덕에 달리는 차 안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기분 전환도 했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심심찮은 얘기를 나누었다. 학장실에서 마사미치와 나눈 대화가 뭐였는지 은근슬쩍 물어봤지만 거기에 대해서 고죠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듯 말을 아꼈다. 그의 옆모습을 보며 당시의 고단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걸 알았다. "옷 갈아입고 올게. 과자라도 먹을래?" "어디 있는지 알아. 아, 바지는 입어라." "뭐래." 어렸을 때는 기숙사에서 티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을 때도 많았으니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현재로서는 당연히 안 될 얘기다. 고죠도 체면이 있는데 제자 앞에서 빤스 차림이 웬 말인가. 혼자 사는 남자답게 헐렁한 셔츠와 무릎이 늘어난 바지로 갈아입었다. 나도 이 집에 제법 익숙해져서 뭐가 어딨는지는 다 알고 말 안 해도 알아서 놀고 먹는다. "요즘 방송은 예전만큼 재미가 없어. 지루해." "애들은 깔깔 웃던데. 그냥 세대 차이 아니냐." "아, 진짜. 벌써 그렇게 된 거야? 너는 어떤데?" "나는 재밌는데. 너는 그냥 만화책이나 읽어라." 마침 방영 중인 개그 프로그램을 보다가 결국 고죠가 좋아하는 옛날 것도 보고 낡은 만화책을 잔뜩 가져다 읽었다. 그 시절 꼬맹이들의 손떼가 묻은 종이는 어느덧 색이 바랬고 새삼 그때와 많은 것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만화책을 읽다가 돌아보니 어느새 고죠는 잠들어 있었다. 천천히 저녁 밥을 준비해 볼까 했더니 잠든 고죠의 안색이 나빠 보였다. 뭐라 잠꼬대를 하는데 알아들을 수 없었다. 좀 미안하지만 나는 그를 가볍게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라, 고죠." "스즈카⋯⋯ 지금 몇 시야. 벌써 해질녘이네. 진작 깨우지 그랬어. 미안, 잠 좀 깨고 기숙사에 데려다 줄게." 기숙사 통금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고 지금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게 있으니. 나는 고죠에게 허락을 구하는 대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고죠가 잠이 덜 깼을 때 해치워 버릴 심산이었다. "인간의 시답잖은 생각 따위에는 관심 없다만. 너를 성가시게 만드는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없애 주겠다." "하하하. 말이 앞뒤가 다르잖아. 너, 내 생각을 읽으려는 거지. 버릇없게 선생님 머리에 손을 얹기나 하고." 엄밀히 따지면 생각을 읽는 것과는 다른데 편의상 뭐 그렇다고 쳐도 크게 상관없다. 이 또한 영역 안이라 놓칠 일은 거의 없다만은. 그저 이마에 손이라도 얹고 있어야 안심이 된다. 인간의 꿈에는 잡다한 정보가 많이 들어 있다. 이를테면 과거의 장소. 같이 있었던 사람. 당시 기분까지. 무언가 구체화되기도 전에 불길한 바람이 불었다. 사실 내가 인간을 상대로 이런 일을 벌이는 건 10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누군가의 사념 안에서는 그 사람이 신이다. 재주 좋게 파고들면 다행이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주언사가 비참하게 패하듯 피를 토하며 쓰러질 수도 있고 심한 경우에는 주력이 바닥날 때까지 끌려다닐 수도 있다. 이 공간은 너무 밝고 한편으로는 어둡다. 시야가 흑백으로 어지럽게 흔들린다. 당시의 심리를 반영한 것이다.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마사미치의 방이다. 그리고 고죠의 붕대. 눈에 두르고 있으니 과거의 기억임에 틀림없다. 작년쯤일까. 고죠와 마사미치가 무어라 말을 주고받는다. 분위기가 썩 좋지 않다. 거기까지는 일상적이라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마사미치 앞에 놓인 서류의 내용을 알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는 알 수 있다. 최후통첩이다. 간단히 말해 내 목을 가져와야 끝나는 임무인 것이다. 서로 물러설 수 없는 두 남자의 살벌한 대화가 점점 분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나를 알잖아. 그동안 멋대로 군 적도 있지만 상층부에서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어요. 까라면 까고, 기라면 기고, 죽이라고 하면 그게 누구든 죽였다고요. 네, 맞아요. 한동안 스구루와 지낸 모양이에요. 가진 거라고는 다 죽어 가는 몸뿐이고 어차피 갈 데도 없으니까 길바닥에서 얼어 죽지나 말라고 받아 줬겠죠. 일부러 못 본 척했어요. 거기서 뻘짓한 게 한둘도 아니고. 이참에 신도들까지 싸그리 잡아 죽이지 그래요.' 마사미치 이 놈. 네놈이었구나. 그날 나한테 고죠를 보낸 게. 덕분에 무릎 꿇고 싹싹 빌고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고 별 쇼를 다했다. 그래, 고죠. 말 잘했다. 내가 게토의 식구들과 어울린 건 사실이다만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관심도 없고. 말 그대로 춥고 배고파서 눌러앉은 것뿐이란 말이야. 맨날 바닥 쓸고 닦으면서 혹사만 당했다고. 하지만 불가항력이라고 하면 나도 할말이 없다. 상층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마사미치라고 별 수 있을까. '네가 하지 않아도 결국 다른 주술사가 파견될 것이다. 그 중에는 이번 임무가 스즈카 고젠을 조복할 마지막 기회라 여기는 놈도 있을 것이고 그저 재미를 위해, 돈을 위해, 곧 시체가 될 몸을 훼손하는 놈도 있겠지. 너도 알잖니." '몰랐다면 적어도 친구에게 죄를 짓지 않았겠죠. 하지만 선생님. 내 아이를 가졌던 여자예요. 나한테 상처받고 망가진 애라고. 근데 어떻게 죽여. 그게 사람이 할 짓이야? 당신들은 내가 괴물로 보여? 사람이 아니길 바라는 거냐고!' '고죠 사토루. 스승으로서가 아닌 학장으로서 네게 정직 처분을 내리겠다. 네가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다. 어떤 임무도 받지 마라. 다시는 이사회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라. 스즈카 고젠 처형 건에는 다른 적임자를 보낼 것이다.' '아니요. 내가 가요. 죽이는 건 충분히 심문한 뒤에 해도 늦지 않잖아요. 내가 영감탱이들한테 납작 엎드리게 할게. 기절시켜서라도 잡아 올게. 설득도 안 되고 폭력도 안 되면 그때 죽이든지 말든지 할 테니까. 아무도 손 못 대게 해요.' 나는 고죠와 떨어졌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그대로 강행했다간 둘 다 위험했을 것이다.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아 끔찍한 기분이었다. 이래서 이 짓거리는 최악이다. 우물이 텅 빈 지가 언제인데 이제 와 넘치려 하니 기가 막힌다. "너란 녀석은. 왜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그러냐." "쓸데없는 얘기? 아, 그거? 그러게 말이야. 미안해." "빌어먹을! 그 신발도 좀 버려! 왜 아직도 갖고 있어!" "나중에 태울 생각이야. 너 죽으면. 결국 못 죽였잖아." 나는 반대로 묻고 싶었다. 왜 못 죽였냐고. 그야 내가 전례에 없는 비굴함을 보이긴 했지만 일명 백귀야행이라 불리는 일이 일어난 직후다. 말 그대로 반송장인 나를 죽이는 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아직까지 악몽을 꾼단 말인가. 내가 한때 어쨌다느니 하는 얘기는 듣기 싫다. 선반에 놓인 아기 신발 초음파 사진 모조리 태워 버리고 싶다. "웬만하면 없었던 일로 만들어 주려고 했다만. 그건 어렵겠다. 이래서야 나까지 휘말리겠어." "애초에 부탁한 적 없잖아. 너 때문인데 당연하지. 혹시라도 저주가 되면 그때는 해치워 버려." 그런데 정말 게토 놈하고는 매번 최악으로 타이밍이 맞물리는 것 같다. 어쩌다 보니 떠나는 것도 동시에, 최후 통첩을 받는 사건도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고죠는 이미 만신창이였는데 내가 한 번 더 찔러 덧나게 한 셈이다. 애송이 주제에. 내가 너한테 무슨 상처를 받아. 그야 멀쩡하지는 않았지. 아무리 나라도 좀 많이 아프긴 했지. 절대로 말 못하지만. "젠장. 빌어먹을. 만져도 되냐." "뭐 껏하면 만지려고 그래. 안 돼. 솔직히 말하면 아까 말이야. 네가 예전처럼 신나서 놀자고 조르는데 그리운 기분이 들었어. 아무것도 안 하고 보기만 해도 좋은데 한편으로는 왜 진작 이렇게 못했나 하고. 끌어안고 싶었어." 나는 멍해졌다. 겉잡을 수 없이 얼굴이 달아올랐다. 고죠의 한마디에 그토록 당황하는 자신이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고 당혹스러웠다. 심지어 얼굴만 달아오른 게 아니었다. 아직 사내를 제대로 받아들인 적도 없는 처녀의 몸이 꿈틀거리다니 영문을 모르겠다. 그리고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죠가 나를 끌어안고 싶었던 이유는 내 몸을 원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진심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보기만 해도 좋은 것인가. 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인가. 처음에는 나도 개의치 않았지만 강하게 실감할수록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 같았다. "안아 줘." "윽." 지금 윽이라고 했냐. 윽이라고. 말하기 무섭게 경멸당하고 있잖아. 그리움을 느낄 정도인데 전처럼 안고 싶은 마음은 없고 결국 뭐야. 거부할 것 같으면 아예 무시를 하라고. 데이트고 뭐고 딱 잘라서 거절하라고. 잔인한 놈아. "닿게 해 주라." "안 된다고 했지." 이제 대놓고 피하는 거냐. 이럴 거면 내가 뭐라든 끝까지 버텼어야지. 보통 여기까지 오면 늦은 거 아니냐고.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 더는 무리다. 어떡하지. 진짜 때릴까. 이렇게 된 이상 때려 눕혀서 강제로 입을 틀어막아 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보기 전 나였다면. 어찌 보면 당연한데 새삼 깨달았다. 고죠도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 분해서, 무서워서, 손이 떨린다는 것. 일시적인 감정이라도 거기까지 몰아붙인 내가 차마 그를 미워할 수는 없었다. "그래, 인마.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다 한다." "뭐, 뭐래. 진짜 그만해. 으윽, 내 심장은 또 왜 이래." 그거면 됐다. 한 방씩 주고받은 셈이니까.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아직도 아프다. 따뜻한 햇살, 흩날리는 꽃잎, 샴푸 냄새, 슬로 모션, 잘생긴 얼굴. 그 얼굴이 결정타로 내 심장에 가장 화려한 멍을 남겼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으⋯⋯ 윽⋯⋯ 싫어. 싫어. 싫어. 나, 선생님. 선생님." "어이, 너야말로 진정해라. 괜찮아. 괜찮다니까. 담탱아." 얼떨결에 손을 잡고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생각에 고죠에게 바짝 붙었다. 그리고 멋대로 그의 어깨에 기댔다. 어쩌면 전부터, 훨씬 더 전부터 이 느낌을 바라 왔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는 이 그리움과 안도감을 설명할 수가 없다. 고죠도 차마 더 잔인하게 굴지 못하고 결국 내게 기대었다. 그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토닥토닥 두드렸다. "근데, 너. 기숙사에 언제 들어갈 거야?" "들어가지 말까⋯⋯ 아, 아야야! 아파!" 그렇다고 갑자기 볼을 꼬집냐. 분위기 깨게. 인정하고 싶지 않달까 이럴 때는 생각조차 하기 싫지만 선생님은 선생님이다. 기숙사 체류 중인 제자의 무단 외박을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 허락할 생각은 더더욱 없을 거다. "그래도 저녁은 여기서 먹어. 다 먹고 나면 데려다 줄게." "내가 만들까?" "그 실력으로 어딜 나서. 내가 해.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네, 네. 그럼 나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빨리 가져와라." 소파에 늘어진 나는 고죠에게 대답하며 그의 엉덩이를 철썩 때렸다. 고죠가 드물게 토끼눈이 되어 나를 돌아봤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성큼성큼 주방으로 향했다. 눈앞에 두고도 어찌 못하고 꾹 참아 왔으니 더는 참지 않을 거다. 고죠는 나 때문에 모처럼의 쉬는날을 포기했을지 몰라도 나는 발그레한 그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뿌듯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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