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두 명 분의 일을 하나의 몸으로 소화코자 하면 쉬는 시간이랄 것도 딱히 없게 된다. 그렇게 다망한 내가 요즘들어 자신의 방 다음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교직원 휴게실이다. 어디까지나 커피 마시러 오는 거다. 휴게실에 고죠와 나 둘밖에 없다 해도 마찬가지다. 오늘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서 대화 몇 마디 주고받지 않았다.

 그새 또 커피 한 잔을 비웠다. 어차피 잠들기 전까지 베개와 씨름하는 건 예삿일이다. 까짓거 한 잔 더 마시지. 뜨거운 커피를 우격으로 삼키며 힐끔거렸다. 아까부터 휴대폰만 쳐다보더니 그마저도 질렸는지 눈이 허공을 향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싶지만 짚이는 데가 없다. 고죠가 저렇게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 있기란 드물다. 가만히 보면 그냥 멍때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귀엽다. 나는 조용히 고죠에게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멍하니 앉았냐. 불상인 줄 알겠다."

 고죠는 본 체 만 체 했다. 맥아리가 없는 뒷모습까지 울가망이다. 대답하기도 힘에 겨운지 마른세수를 한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왜 이럴까. 나도 모르게 생각에 빠져서 밤에 잠을 못 잘 정도야. 피곤해서 그런지 입맛도 없어. 예민해졌다가 나른해졌다가 기분이 들쑥날쑥해. 몸은 천근만근이고. 이제 아무것도 하기 싫어. 다 귀찮아."

 나는 혀를 쯧 차며 고죠의 옆에 앉았다. 대답을 듣고 웃어넘길까 했지만 기도가 꽉 막힌 듯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을 고른 뒤 언제부터였냐 물었다. 작년부터란다. 그래서 무엇 때문인가 하면 나도 의심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먼저 간 녀석이 가슴에 박혀 있구나."

 "먼저 간 녀석은 아무래도 좋아. 네 말대로 더는 여기 없으니까. 오히려 그만 좀 걸고넘어져라 말하고 싶어."

 고죠는 커피에 설탕을 넣었다. 덤덤하기 그지없다. 이제 와서 죽은 놈을 탓해도 저만 꼴사나워질 뿐이겠지만 둘이 좀 가까웠던가. 고죠와 진정한 짝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은 게토뿐이며 한때는 여느 여자들보다 그의 애인 같았다.

 "상사병 아니냐. 겪어 본 바로는 그렇다만."

 "아, 겪어 봤구나. 나는 그런 거 몰라. 전혀."

 이유가 무엇이든 고죠가 불행하다면 내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더는 게토에게 떠넘길 수도 없으니 고죠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포함해서 뒷수습은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그래도 기꺼이 떠안아야지 어쩌랴.

 "그럼 남는 건 하나뿐이다. 그냥 우울증이지."

 고죠가 멈칫하더니 이내 그 설탕 죽을 마신다. 그야 생각해 본 적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웃어넘기지도 않는다.

 "진지하게 말이다. 약을 먹은지는 얼마나 됐냐."

 "그건 꽤 됐어. 두통이 점점 심해져서 먹기 시작했는데, 작년에는 갑자기 식은땀이 막 나고 속이 아프더라고. 위경련이래. 지금도 가끔 아프지만 몸에 이상은 없어. 딱히 치료할 방법이 없으니 하는 수 없이 진통제를 먹는 거야."

 "치료받아도 의미가 없겠지. 실제로 고단한 것은 마음일 테니."

 기억은 안 나지만 약 이름이 익숙했다. 위장약이야 처방전에서 빠지는 일이 거의 없고 틀림없이 과거에 내가 복용했던 약 중 하나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겹다. 지금도 비릿한 쓴맛과 함께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는 어떤 통증보다 끔찍한 일이기도 하다. 매일 미지근한 물과 함께 한줌의 약을 꾸역꾸역 삼키는 것이. 정말이지 지겨울 만큼 겪어 보았으므로 그런 괴로움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고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상사병이다. 멍해질 때 너를 생각하는 건 사실이거든. 됐냐."

 "누군가 너의 고통에 승리의 미소라도 짓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고죠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잠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딱히 고민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번에도 가볍게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나는 확실히 그런 게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어찌 하면 너를 도울 수 있겠니. 진지하게 묻고 있는 거야."

 "신경 쓰지 마. 어차피 혼자만의 망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

 "알겠다. 어떤 망상이건, 어떤 일이건, 그냥 너랑 내가 해 버리면 되는 거군."

 자신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 무엇이든 간에. 나는 스스로 뱉은 말을 지킬 수 있을지 어떨지 불안했다. 그런데 정작 고죠는 벌써부터 흐뭇하고 즐거운 생각만 드나 보다. 그새 활력이 돌아와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이것을 기다렸느냐."

 나는 고죠의 턱을 잡아 이리 향하도록 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싱글벙글이다.

 "너야말로⋯⋯ 설마, 내가 그 얼굴에 대고 당당히 말하길 기다렸던 건 아니지?"

 보아하니 무언가 바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고죠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자신의 뺨으로. 눈으로. 나는 안대를 천천히 끌어올려 벗겼다. 머리카락이 가라앉기 전 이마를 약간 드러낸 모습도 멋있다. 눈동자를 가리지 않아서 좋다.

 이렇게 눈빛으로 나를 꾀어낼 수는 있지만 고죠는 내게 덤벼들지 않는다. 어렸을 때처럼은 결코 할 수 없다. 그러니 이쪽에서 덤비는 수밖에. 그때와는 반대다. 허락 따위 필요없다. 내가 먼저 키스했다. 말도 없이 덮쳤다. 내게나 자신에게나 가차없는 그가 이때만큼은 순종한다. 앙탈부리는 것은 하라는 뜻인지 말라는 뜻인지 모르겠다. 입술을 먹힌 채 실없이 웃기도 한다. 나는 기껏해야 그의 어깨나 팔을 간질이던 손으로 겁도 없이 다리를 쓰다듬었다.

 "풉, 아하하. 이상한 데 만지지 마. 간지러워. 자, 잠깐! 멈춰! 진짜!"

 그러는 동안 누군가 휴게실을 향해 오고 있었다. 진작 알아채고 떨어지긴 했다. 문을 연 사람은 나나미였다.

 "이런 경우에는 제가 두 분께 실례했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요."

 "미안, 나나미. 엄청나게 초과근무했다는 표정이네. 괜찮으니까 들어와."

 "됐습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아니, 그것도 됐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완전히 질렸다는 얼굴로 돌아서는 나나미를 보니 확실히 이건 좋지 않다. 고죠가 테이블에 있던 서류더미를 집어들고 내게 부채질을 해 주었다. 그러면서 너털웃음. 얼굴이 화끈거렸다. 게다가 나는 심장에 무리가 와서 숨을 쉬는 것도 괴로웠다. 키스만 했는데. 시작도 안 했는데. 과거에는 어땠던가. 생각할수록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 이런 게 현실이지. 결국에는 우울했던 것까지도 잊어 버리게 된다니까."

 웃느라 힘이 빠졌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쭉 뻗으며 길게 늘어졌지만 머잖아 다시 허리를 펴고 앉았다. 그리고는 고죠의 목을 끌어안았다. 전례에 없는 나의 헌신적인 위로에 갑자기 북받치기라도 했는지 그가 소리내어 감탄하면서 내 등을 두드렸다. 고죠에 비해 작고 가벼운 몸은 그를 힘없이 따라다니고 흔들거렸다.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의 손이 나를 힘주어 붙잡고 조금 더 가까이 자신의 품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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