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갓 땋아 올린 앞 머리카락이 사과나무 아래 나타났을 때 앞머리에 찌른 꽃빛의 모습. 꽃같은 그대라고 여겼더니라."
중앙 홀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어딘가에서 구름 흘러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 눈을 의심했다. "정답게 하얀 손을 내밀어 사과를 나에게 건네 준 그대. 연분홍 빛깔의 가을 열매로 비로소 그리움을 배웠더니라." 시를 읊고 있다. 무려 사랑 시를.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고죠였고, 대접 같은 손에 든 시집이 미니북처럼 보였다. "하염없이 머리카락에 닿았을 때 달콤한 사랑의 술잔을. 그대의 정으로 기울였더니라." 이것은 빛바랜 청춘과 낭만 그리고 버린 듯하지만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그리운 첫사랑을 노래하는 시다. "사과밭 나무 아래로 절로 생긴 오솔길은 누가 처음 밟은 자리일까 하고 물으면 한결 더 그리워지노라." 그가 낭송을 마칠 때까지 어떻게든 참았지만, 시집을 덮음과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너무 웃겨 눈물이 났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냐, 고죠." "이건 기후가 아니야. 운명이란 거지." "안 어울려."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만큼은 무엇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시 한 수에 홀 전체가 위화감으로 가득해졌을 정도다. 산통이 깨진 고죠는 에이 하고 시집에 화풀이하며 그것을 아무나 가져가란 듯이 난간에 팽개쳐 놓았다. "외롭냐." "보면 몰라." "그렇군. ⋯⋯그러고 보니 너 왜 아직도 총각이야. 이제는 정말 어엿한 당주님이라 잔소리를 못하나 보지." "잔소리보다는 멋대로 약속을 잡아 버리지. 그럴 때마다 나가고 있지만 아직 운명의 상대는 만나지 못했어." "정략결혼이라 연애감정은 없다 쳐도 여자 쪽도 고죠 가에 걸맞는 명문가에 교양 있는 아가씨일 것 아니냐." "교양이 너무 넘쳐서 아무도 내 피를 수혈받는 것 외에는 관심 없거든. 그래서인지 하나같이 못생겨 보였어." "어차피 행복은 길지 않아. 사랑은 더 짧다. 애초에 결혼이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어떠냐. 네가 말했잖아. 이제 애송이라 부르지 말라고. 남자는 처자식을 두어야만 비로소 어른이 되는 법이다. 제자를 키우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 나는 시집을 주워서 펼쳐 보았다.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간들의 연애놀음은 재밌다.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휘갈기면서 부끄럽지도 않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시는 이별과 그리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간은 운명에 얽매인 존재다. 고죠가 주술사 가문에서 태어난 것도 원하지 않는 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도 운명이다. 물론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 고죠가 그러한 운명에 어떻게든 저항하고 싶다면 나도 딱히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운명에 저항한다면 그 대가는 가혹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간들은 운명에 몸을 맡기고 현실에 적응한다. 지금은 이렇게 반항해도 결국에는 제 아내와 자식에게 모든 것을 내어줄 것이다. 옛날에 그 녀석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교양 넘치는 그 아가씨들을 너무 나무라지 마라. 예전만큼은 아닐지언정 너도 고죠 가에 있을 때는 그녀들과 다를 바 없었다. 생각해 봐라. 네가 동정을 떼던 날. 아는 거라고는 상대방의 가문과 이름뿐이었는데 조금도 거리끼지 않았잖냐." "정확하게는 그 전날 뗐지.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지 마. 겨우 14 살이었어. 14 살짜리 동정을 받았던 기억이 그리 쉽게 지워질 리 없잖아. 나는 기억나. 내 첫경험 상대였던 여자. 네 표정, 목소리, 손짓, 냄새, 네가 입었던 기모노의 무늬까지 다 기억해." "누가 들으면 내가 덮친 줄 알겠다. 그래, 네가 싹수부터 남다르긴 했다. 네 스스로 내어줄지언정 빼앗기지는 않았지. 벌건 대낮에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아주 정중하게 제안했지. 한데 이상하구나. 나는 분명 딱 잘라 거절했을 터인데." 쿨럭쿨럭. 나는 아직도 할말이 많다. 거기서 더 할 수도 있었는데 고죠의 힘겨운 기침 소리가 마음에 걸려서 그만두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감정이 북받쳐오르는지 아니면 뒤늦게 내 안의 꼬맹이를 의식하기라도 한 건지 어느 쪽이든 감당하기 버거워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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