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지에게 체술을 가르치다 녀석과 얽힌 채 넘어졌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일어나려는 찰나 머리가 암전되면서 유지의 품으로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빌어먹을 저혈압 때문이다. 정신이 아찔했지만 다행히 기절하지는 않았다.
"스즈카 쌤!" "잠깐 쉬면 돼." 유지가 내 어깨를 그러쥐었다. 아프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내 신음소리를 듣고는 놔주었다. 녀석에게는 미안하지만 좀 더 몸을 맞대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꼬맹이의 몸에서 아이의 것이 아닌 열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훈련 중 흘린 땀. 사내의 냄새. 그것은 마치 거칠고 찬 바람같았다. 머리가 맑아지는 듯하면서 마음이 놓였다. "괜찮아요?" "응." "정말이요?" "그래, 인마." 의식이 돌아와 한시름 놓았다. 당연히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간신히 웃음을 되찾고 안타까울 정도로 앳된 아이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이 진정되었을 때쯤 온화한 빛을 감추고 말했다. "영감, 얘기 좀 해." 평상시라면 좀 더 목에 힘을 주었을 것이다. 지금은 저자세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응석부릴 생각은 없었는데 왜 그런 목소리가 났는지 모르겠다. 유지의 왼쪽 뺨에서 스쿠나가 눈을 뜨고 눈 밑에서는 그의 입이 튀어나왔다. 어떤 말을 듣게 될지 뻔하기 때문에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선이 모로 비뚤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럴 때 손을 쓸 수 있는 건 영감뿐이잖아." "흥." "나 죽어. 내가 죽는 꼴 보고 싶어? 얼른⋯⋯." "그러게 왜 사서 고생이야. 임자 하는 거 봐서." 철썩! 유지가 스쿠나의 괘씸함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는지 망설임 없이 제 뺨을 때렸다. 사라진 스쿠나를 쫓아가서 따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넘어가기로 했다. 덕분에 두통이 거의 사라지고 몸도 한결 가벼워졌다. "뭐야. 방금 스쿠나가 쌤을 치료해 준 거예요?" "그렇다. 반전술식이라는 거야. 기억해 두거라." "네⋯⋯." "고죠한테는 말하지 말고." "쌤이랑 스쿠나에 대해서요?" "무슨 소리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훈련 중에 일어났던 일들 말이다. 내가 쓰러졌다든가, 내 힘으로 치료 못했다든가." "그 얘기구나. 근데 좀⋯⋯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방까지 업어 드릴게요. 혹시 모르니까. 나머지는 저한테 맡겨 주세요." 같은날 저녁. 숙제도 있고 마침 커피 한 잔이 생각나 교직원 휴게실에 멋대로 쳐들어왔다. 운이 좋으면 한가한 놈을 붙잡아 숙제를 빨리 끝낼 수도 있다. 반대로 운이 나쁘면 그다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놈이 불쑥 나타난다. "훈련하다 쓰러졌다며." "⋯⋯." 결국 알게 됐나. 유지에게 고죠가 알지 못하게 하라 당부했던 이유는 알아 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날은 꼬맹이도 적잖이 충격을 받았을 테고 또 쓰러졌다간 트라우마가 될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그냥 생각하기 귀찮다. 나는 고죠가 뭐라 말하든 흘려들을 요령으로 펜을 놓은 뒤 따뜻한 커피가 담긴 컵을 집어들었다. "무시할래? 급료 줄인다?" "뭐? 갑자기? 빌어먹을. 그래, 훈련중에 쓰러진 건 면목없다. 하지만 내가 농땡이치려고 일부러 쓰러졌겠냐? 훈련은 나중에 보충해도 되잖아. 급료를 줄이는 건 나를 죽이는 거나 다름없다. 잔인한 놈! 네놈이 그러고도 인간이냐!" "인간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 네 상사야. 대충 둘러대면 '아, 그렇구나' 하는 호구가 아니거든. 하지만 괴물도 아니니까. 솔직하게 병원비 때문에 힘들다 말하면 도와줄 수 있어. 대신, 너도 이제 인간들의 처세술을 좀 배워야지." "뭐야 그게. 귀찮은데." "쓰러지기 며칠 전으로 돌아가서, 만약 네가 나를 찾아왔다면 어땠을까. 정중히 양해를 구했다면. 혹시 알아, 조금은 쉬게 해 줬을지. 별것 아니잖아. 스쿠나한테는 애처럼 졸라대면서 왜 나한테는 못해. 영감 임자 얘기는 대체 뭐고." 처음에는 답지 않은 잔소리라 생각해 고죠를 응시하며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고죠가 평소 같지 않달까, 무언가 잘못됐다는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듣자니 어쩐지 불길한 이름이 튀어나오질 않나 그밖에 여러 가지로 마음에 걸렸다. 기분 탓이라면 다행이지만 나는 말없이 일어나 맞은편 소파에 앉은 고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살며시 그를 안았다. "잘못했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건 인정한다. 굳이 말하자면 자존심 때문에 고죠에게 힘들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 내 잘못이다. 하다못해 일하기 싫다고 능청이라도 떨어댔다면 고죠도 괴물이 아닌 이상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을 거다. "진심이다. 다음에는 꼭 네게 말하마." 고죠가 철부지 다그치듯 나를 때렸다. 아프지도 않다. 맙소사.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만큼 속상했던 거냐. 나도 나지만 애초에 그 빌어먹을 애송이는 왜 고죠만 혼자 두고 가서 별것도 아닌 일로 나까지 사과하게 만든 건지 모르겠다. "속일 생각 하지 마. 안 넘어가니까.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거 다 알아. 스쿠나랑은 뭐야. 내가 알아내기 전에 말하는 게 좋을걸. 도대체 무슨 사이길래 영감 임자 하는 거야. 요즘 누가 그런 호칭을 써. 노부부 로맨스 영화 찍냐고. 빨리 말해." "오, 오해다. 생각해 봐라. 본가의 늙은이들도 가끔 그러잖아. 부부 사이에만 영감 임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냥 나이든 남녀끼리 그대나 자네라고 부르는 거랑 똑같아. 근데 나랑 스쿠나 정도면 인제 그게 좀 섭섭하게 들리고 그러니까⋯⋯." 아이고 야단났네. 불씨를 잠재웠더니 곧이어 다른 불씨가 확 피어올랐다. 내가 이렇게 당황하다니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했던 게 맞다. 뭐냐고 묻는다면 뭐든 간에 그건 천년 전 얘기고 지금은 그저 서로 존중하는 사이라 솔직하게 말하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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