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적으로 병원에 드나드는 것은 상당히 지루한 일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다. 도쿄에서 지낼 때도 마찬가지다. 그때그때 상태를 확인하고 약이나 받아 오면 그만. 이번에는 몇 가지 검사를 더 받았다. 그 후 치료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담당의가 제안했던 당초의 계획은 첫날 치료를 받고 적어도 이틀은 입원하는 것이었다. 경과를 지켜보기 위해. 그러나 병원이라면 질색하는 꼬맹이가 울고불고 떼를 쓰므로 이튿날 오전 날라 버렸다.

 고전 쪽과는 3 일 간 결석으로 이미 얘기가 끝났다. 비록 몸은 만신창이나 하루 반나절의 자유시간을 얻었다. 고삭부리 천덕구니 주제 놀이공원을 가니 어쩌니 달망대는 꼬맹이에게 말이 되는 소릴 해라 핀퉁이를 놓았다. 꼬맹이는 몰라도 나는 안다. 무리하다 정말 골로 가는 수가 있다. 쉬어야 한다. 다만 여전히 문제였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쨌거나 잘 참았다. 그토록 바라던 바깥 공기나 쐬자 하고는 공원을 거닐었다. 슬슬 현기증이 밀려 오더니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비틀거리다 겨우 벤치에 앉았다. 여름인데도 땀은 식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코피. 또 주루룩이다. 손수건으로 슥슥 닦아낸 뒤 킁 삼켰다. 이렇게 혹독한 세상에서는 꼬맹이에게도 내게도 아무런 힘이 없다. 그저 한숨 푹 쉬고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꼬맹이를 말리지 못했으니 내가 혼날 차례였다.

 고죠는 놀랐다. 그뿐이었다. 어떤 상태인지 안 봐도 빤한데 목소리를 듣고는 차마 화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고죠에게 허락을 받은 나는 그의 집에서 쉴 수 있었다. 그가 쓰지 않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쓰러졌다. 약을 먹어야 했지만 물 따를 기력도 없어서 그대로 잠들었다. 그날 밤 고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자만 몇 개 남겼다.

 「일단은 푹 자 둬.」

 「아침에는 들어갈게.」

 「나한테 와 줘서 고마워.」

 나는 다음날 오전 눈을 떴다. 그다지 기분 좋게 일어나지는 못했다. 간절히 깨고 싶어도 깨지 못하고 꿈속을 헤맸더니 배에서 천둥이 쳤다. 말하자면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아직 실신 상태인 몸을 우악스럽게 깨워 일으킨 것이었다.

 넓은 집. 쾌적한 실내. 기숙사와는 비교할 게 안 된다. 내 방에 있을 때는 둘 중 하나다. 덥거나 춥거나. 어느 쪽도 공기 청정기 같은 건 딱히 필요없다 생각하지만. 덕분에 꿈에서도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주방에서 인기척이 났다. 고죠의 뒷모습이 보였다. 냄비가 보글보글 끓었다. 살림하는 도련님이라니 낯설다. 그러고 보니 메구미가 잠깐 아팠을 때도 죽이랑 반찬을 만들어서 기숙사까지 가져 왔지. 나무랄 데 없는 솜씨였다.

 왔냐. 갈라진 목소리로 한마디 건넸다. 고죠가 돌아보더니 왜 맨발이냐며 부랴사랴 실내화를 가져다 발치에 놓았다. 맨발 가지고 웬 야단이야. 발 시릴까 봐 그러냐. 어리둥절하면서도 민망할 따름인지라 신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앉아. 마침 다 됐어. 식으면 먹어."

 미음이 식탁에 덩그러니 놓였다. 솔직히 조금 당혹스러웠다. 메구미를 위해 만들었던 죽이랑은 달랐다. 그건 웬만한 상차림 부럽지 않게 아주 든든해 보였는데. 이건 뭐 옛날 배 곯던 시절에 허기나 면하고자 먹었던 희죽마냥 멀건하다.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문득 본가의 입짧은 영감탱이들이 고집부리던 게 생각나서 픽 웃었다. 어차피 몸이 받질 않으니 아무리 좋은 음식을 다 갖다 바쳐도 물리고는 허구언날 이런 거나 먹었다. 고죠한테는 내가 영감탱이처럼 허약해 보이는 것이다. 며칠 동안 먹은 게 없으니 지금은 이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멀건해도 막상 먹어 보면 그냥 희죽이 아니었다. 일단 육수를 어찌 냈는지 궁금하다. 쩝쩝거리며 찬찬히 맛보았다. 대부분의 약재는 머릿속에서 척척 구별된다. 몸에 좋은 건 국물에 다 들었구나. 겉만 봐서는 모르는 법이다. 숟가락도 필요 없다. 그릇째 들고 후룩 마셨다. 좀 심심하지만 덕분에 잘 넘어가고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나 때문에 곤란했겠구나. 나는⋯⋯ 이제는 답답한 걸 못 참겠다. 병원에 더는 있을 수 없었어. 애처럼 굴어서 미안. 고전으로 가면 꼬맹이들이 수선을 떨 테고 그냥 조용한 공간에서 조금 쉬고 싶었다. 저녁까지는 있어도 될까."

 "내일, 내가 데려다 줄게."

 "그럼 하루만 더 신세지마."

 고죠의 등 뒤로 햇빛이 쏟아졌다. 이제껏 커튼을 친 어두운 방안에 있었던 내게는 그 빛이 너무 밝았다. 점점 심해지는 격통. 메구미처럼 건장한 남자아이와는 비교할 게 못 된다. 죽커녕 물도 버거웠다. 무엇이든 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탐하면 고통받고 그러한 고통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지금 아파 죽을 것 같아도 나는 계속 먹을 거다. 아니면 얘기를 좀 할까. 무슨 말을 할까. 조용히 쉬고 싶어서 왔는데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견딜 수 없었다.

 "됐다. 그냥 이거 먹고 나면⋯⋯."

 "물 따라 줄까. 약 가져와야겠다."

 집이 좋기는 하구만. 돌봐주는 이가 있는 이런 집 말이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다 해결 되니 천국이 따로 없다. 게다가 이 정도 괴로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에 이보다 훨씬 아픈 날도 많았다. 그때 찾아왔어도 같았으려나. 괜히 떠돌았나 싶다. 진작에 빌붙을걸. 후회스럽지만 안심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꾹 참은 내가 대견하다.

 "미안하다."

 "뭐가 미안해."

 "의지할 사람이 너뿐이라⋯⋯."

 "내가 의지할 사람도 너뿐이야."

 "아⋯⋯ 그, 그러냐. 잘 먹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지 얘기해."

 식사 후 나는 널따란 욕조에서 온욕을 즐기고 완전히 흐물흐물해져 나왔다. 그런 다음에는 소파에 늘어졌다. 몸은 이미 낙원에 놓였다. 불편한 것은 마음뿐이었다. 말하자면 너무 편해서 불편했다. 천장이 쓸데없이 높다. 벽이 쓸데없이 멀다. 고죠는 아까부터 왜 저리 서름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남의 집에서 호강하는 나도 있는데 주인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낯을 가리고 앉았다. 뭘 그리 수줍어해. 여자 한두 번 데려오냐. 안 어울리게 내숭은.

 "저기, 고죠. 나는 이제 괜찮다. 너도 좀 쉬어라. 내 집도 아닌데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기는 하다만."

 "우리 집이야."

 "응?"

 "말한 적 없었나. 내가 본가를 나온 이유. 너를 위해서였어. 너랑, 아이랑, 이 집에서 쭈욱 같이 살 생각이었어. 그래서 썰렁한 거야. 네 자리가 계속 비어 있었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지금이, 이게, 완성체라고 봐야지. 알면서 뭘 그래."

 멀쩡한 소파 놔두고 식탁에서 청승떠는 것도 맘에 안 드는데 뭔 산짐승처럼 보이는 게 앉아서 차만 홀짝이는 꼴이 영 낯간지럽다. 훌림목으로 말끝을 흐릴 때 나도 모르게 하 실소를 터뜨렸다. 여기에 또 겁먹지 않았을까 싶다.

 "사토루, 이리 와."

 "왜. 거기서 얘기해."

 "배고프다. 아무리 내가 병자라도 그렇지 그거 먹고 어찌 힘을 내겠니.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간식 좀 다오."

 "맞아, 간식. 어제 샀어. 원래 병문안 가려고 했거든. 퇴원했다는 얘기 듣고 그밖의 모든 일정을 앞당겨서 끝낸 거야. 이지치가 고생했지. 이번에 두둑히 넣어 줘야겠다. 으음. 조금 망가졌는데 누가 엎어 버린 것보다는 낫네. 그치."

 고죠가 간식 상자를 가져왔다. 그 틈에 덥석 잡았다. 뻐티는 걸 우격으로 끌어다 앉히고 꼼짝 못하게 만드니 그제야 단념했다. 나는 흐뭇이 웃으며 간식을 베어 물었다.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래, 내가 엎었던 거랑 비슷해 보였다.

 "그런데 사토루 너는 어찌하여 내게 박대를 당해 가면서도 매번 이렇게 달달구리한 선물을 가져오는 거냐."

 "보고 싶어. 먹는 모습."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까지는 물어볼 필요 없었다. 한입 먹어 보니 익숙한 맛이라 짐작은 했다. 예전에 고죠가 줄서는 것도 마다 않고 사다 줬던 귀한 간식. 그때 나는 내가 아니었다. 정말 미친듯이 먹어댔다. 귤이 다 뭐냐. 무조건 단 거. 과일만이 아니었다. 과자, 사탕, 케이크, 빙수. 그야말로 설탕 한 포대를 앉은 자리에서 가볍게 해치우곤 했다. 광란의 현장에서 고죠가 이상하리 만큼 기뻐했던 기억도 난다. 둘이 교감이라도 하는 것처럼.

 "허허허. 이 놈 맛이 여전하구나."

 "맛있지. 이렇게 좋아할 거면서⋯⋯."

 "흠흠. 내가 잘못했다. 이건 다 먹을게."

 "앞으로 그러지 마. 천천히 먹어도 돼. 풉."

 두 손으로 간식을 집어드느라 싹싹 빌지는 못했지만 죄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나름 혼신을 다해 사과했다. 변명하자면 할 말이 없지는 않다. 강생이란 참혹한 과정이다. 아무리 익숙해져도 직후에 극도로 예민한 상태가 된다. 고죠는 그날 다시 태어난 나와 처음 마주했던 것이다. 가뜩이나 낯선 나를 헤아릴 도리가 없으니 속상할 만했다.

 "너도 고생했다."

 미안한 마음까지 담아 위로한 나는 고죠에게도 간식을 내밀었다. 어허, 어디서 감히 손으로 받아. 아 해야지. 이런 느낌으로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러나 간식보다 안색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얼굴에 고단함이 부르텄다. 그야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왔으니 피곤할 것이다. 잤다 해도 차에서 쪽잠이었겠지. 깜박깜박 하는 눈이 예쁘지 않을 수 없다.

 "요즘따라 왜인지 꼬맹이었던 네가 생각난다. 그때 흉내라도 내 줄 수는 없겠니. 그럼 힘이 날 것 같은데."

 "그건 흉내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때 그 상황에서만 가질 수 있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과 행동이니까."

 "아쉽군. 그럼 그때가 아니여도 좋다."

 "뭐야⋯⋯ 트라우마 극복하기도 아니고."

 고죠는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가 보고 싶다 하니 건뜻건뜻 얼른 해치우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럴 수는 없지. 나는 이리저리 지적하면서 고죠에게 가서 둥그런 모양의 선글라스를 가져와라, 오만방자함의 끝을 달리던 그때처럼 앉는 자세도 고치라 일렀다. 고개는 삐딱하게. 다리는 쫙 벌리고 앉는다. 도련님 양아치 완성이다.

 "야, 난쟁이똥자루."

 퉁명스러운 말투는 둘째치고 싸늘한 눈빛과 목소리가 그때는 나를 혐오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실제로 나는 메구미의 주부가 귀여워 보일 정도로 이미 과거의 고죠에게 웬만한 주술적 폭력 그리고 괴롭힘은 다 당해 봤다. 고죠 가 선조님께서 제 앙심을 후손인 그에게 고스란히 내려보낸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설명이 안 된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애정과 원망이 북받쳐올랐다. 기쁨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이상한 감탄사가 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끝이 아니다. 고죠의 흉내가 시원찮으면 내가 기꺼이 기억을 되살렸다. 더 싸가지없게. 그렇지.

 "왜 학교까지 와서 졸졸 따라다녀. 영감탱이들 수발이나 계속 들 것이지. 감히 누굴 째려봐. 그지 같은 게. 웩. 목 말라. 커피 사 와. 배고프니까 케이크도 사 와. 맛없으면 던져 버린다. 던진 건 어떡하냐고? 알게 뭐야? 네가 먹든가!"

 귀엽다 귀여워. 그냥 건방진 애새끼다. 앳된 얼굴로 악에 받쳐 뻗대는 게 그저 갸륵할 따름이다. 정작 그때는 괴물 같아 보였지만. 쳐다보기도 싫어서 속으로 죽어 버려라 저주했지만. 생각해 보면 나도 귀엽다. 배를 잡고 웃었다. 최선을 다한 고죠는 지쳐 말이 없었다. 뭐 하는 짓인가 싶은지 선글라스를 벗고 한손으로 마른세수를 한다.

 "뽀뽀해도 되냐."

 "마음대로 해⋯⋯."

 이를 어쩌나. 병자인 나보다 더 고달파졌다. 평소 같음 지난번처럼 안 된다 했을 텐데 어쨌거나 힘을 빼 놓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와 무슨 원망을 하랴. 따지고 보면 사토루는 태어날 적부터 저주를 품었던 거다. 고죠와 내가 끝내지 못한 얘기. 이제는 편한 대로 생각하련다. 저주는 풀렸고 정화됐다. 참으로 다행이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내 몸에 변화가 생겼을 때 나를 바라보는 사토루의 눈빛도 변했다. 그제야 안심한 듯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정말 해도 되는 거지."

 "응."

 아무리 흉내라도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뜨뜻했다. 더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성급하게 다가갔다. 무릎으로 앉아 머리를 끌어당겼다. 이러면 둘 다 불편하다. 나는 고개가 아프고 고죠는 허리가 아프다. 큰 놈이 줄어들 수는 없고 작은 놈이 빨리 크든가 해야 할 것이다. 당장 어찌 해야 하는지는 몸이 기억한다. 나보다는 그대가 더 편하게.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된다. 몸이 달아오른다. 입을 더 벌리게 하려다 끝내 거부당했다. 슬슬 피하더니 그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끊어낸다. 싫냐 물으면 그렇다 대답은 못하고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여기서 고집부리면 손해를 본다. 일단 물러나는 척한다. 살살 달래 방심시킨 다음 콱 덮쳐서 삼켜 버리면 된다. 달구만.

 "하⋯⋯ 저기, 숙제! 숙제 있어!"

 "지금 나더러 숙제를 하라는 거냐."

 "그렇지! 지금은 무리겠지! 컨디션이 좀 나아지면 그때 천천히 해도 돼. 이번에는 별로 안 어려우니까. 힘 내."

 "이 망할 담탱이."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거기에는 나도 발끈했다. 고죠를 있는 힘껏 떠밀어서 소파에 가로 눕혀 버렸다. 겨우 쓰러뜨렸으니 이때다 하고 올라타 기를 꺾어 주었다. 그러게 벌리랄 때 얌전히 벌렸어야지. 울면 어쩌나 했는데 의외로 얌전하다. 오히려 웃는다. 반대로 나를 부끄럽게 만들려는 속셈인가. 잔망스런 입술을 꽉 눌러 뭉게 버렸다.

 "오늘 뽀뽀를 많이 하네."

 "으윽. 코피 나올 것 같다."

 "잠깐⋯⋯ 어, 진짜 나잖아!"

 "괜찮아. 잠깐 기다리면 멈춰."

 젠장, 분위기 좋았는데. 코피 때문에 다 망쳤다. 분한 마음에 휴지를 더 깊게 쑤셔 박았다. 물론 내 콧구멍만 아프다. 고죠가 참다 못해 낄낄 웃는다. 야한 생각 때문에 코피를 쏟은 게 아니다. 조금 흥분해서 무리를 했을 뿐이다. 올라탔을 때는 우쭐했는데 고죠가 그렇게 웃을 줄 몰랐다. 달뜬 소리로 내 혼을 쏙 빼 놓았다. 요망한 놈 같으니.

 "고죠. 미안한데, 물 한 잔⋯⋯."

 "괜찮아? 많이 어지러워? 알았어."

 빌어먹을 코피를 이렇게 많이 쏟은 적도 없다. 고죠의 셔츠만 조금 적시고 소파에 떨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는 주방으로 달려간 고죠에게 눈치없이 또 미지근한 물 따를 생각 말고 찬물에 얼음 가득 넣어라 소리쳤다. 주방에서 네 하더니 쟁반에 받쳐 왔다. 은근히 수발도 잘 든다. 벌컥벌컥 한 잔을 다 비웠다. 그래도 후덥지근하다.

 "고죠."

 "응?"

 "숙제 꼭 해야 되냐."

 "왜? 그렇게 하기 싫어?"

 "뭐⋯⋯ 보는 눈이 있으니까 나도 내긴 해야겠지. 그래서 말인데 나한테만 정답 가르쳐 줘. 이번 딱 한 번만."

 고죠는 울상이 됐다. 제 입에서 비탄이 새어 나올까 살며시 가린다. 그 정도로 내가 불쌍해 보이지 않았다면 평소처럼 꿀밤을 놓든지 잔소리하든지 뭐라도 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불쌍한 척을 하지 않았다. 피까지 쏟고 나니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머리가 띵했다. 고죠가 보기에는 꿀밤커녕 말이 나오지 않을 만큼 형편없는 몰골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원하는 걸 말해야 한다. 좀 더 교활해질 필요가 있다. 나는 슬쩍 고죠에게 몸을 부대꼈다. 힘없는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한구석을 찌르기도 했다. 그러자 고죠가 나긋나긋 속삭였다. 잘 들어. 1 번부터─ 의외로 술술 답이 나온다. 어디다 적어 놔야 하는 거 아닌가. 적을 틈은 없고 오오 감탄을 연발하며 새겨들었다. 그러나. ─라고 문제지에 나와 있으니까. 전부 풀이과정이랑 써서 제출해. 이러면서 깔깔 얄밉게도 웃는다. 마지막으로 매달려서 열심히 뽀뽀도 해 봤지만 그는 얄짤없었다. 뭐, 솔직히 그냥 뽀뽀가 하고 싶었을 뿐이다.

 "우이씨. 하면 되잖아. 하면."

 "옳지."

 "대신 오늘 네 옆에서 자도⋯⋯."

 "하하하. 응큼해. 될 리가 없잖아."

 그야 안 되겠지. 그래도 말하지 않으면 네가 모를 수 있으니까. 적어도 마음만은 알아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깜박깜박. 꾸벅꾸벅. 고죠는 저도 모르게 졸고 있다. 한계인가 보다. 무릎을 두드리니 고민도 안 하고 눕는다. 아니, 쓰러진다. 지금은 비몽사몽해서 어디든 눕기만 해도 족할 것이다. 쪽잠이나마 일단 자고 나서 생각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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