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원한 밤바람을 조금 쐬고 싶어서 밖으로 나왔다. 그만 들어갈까 하다 발걸음을 돌려 교직원 휴게실로 왔다. 그냥 혹시나 하고. 슬쩍 문을 열어 봤다. 빙고. 고죠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혼자. 내가 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입술을 동그랗게 내밀어 뜨거운 김을 후 불어낼 때 내 가슴도 차와 함께 물결쳤다.
들어가고 싶은데 입 꼬리가 내려가질 않는다. 아무리 정을 통한 사이라 해도 이렇게 헤벌레한 낯짝은 보일 수 없다. 나는 머리가 보이지 않게 몸을 최대한 숙이고 쪼르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 고죠가 앉은 소파 뒤에 숨었다. 어깨를 쿡 찌르면, "네." 반대쪽도 쿡 찌르면, "네, 네. 누구십니까." 하며 고죠가 능청스레 어울렸다. 내 다섯 손가락이 현을 타는 것처럼 그의 어깨부터 팔까지 두드려 내려간다. 여기에는 가볍게 무시하기로 답하는 고죠다. 그 정도로 물러나면 섭섭할 테니 입으로 부드럽고 야릇한 바람을 만들어 그의 귀에다 불었다. 무시하려 해도 이건 어쩔 수 없을 거다. 그가 움찔하고는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았다. "쏟을 뻔했잖아. 또 우리 집에서 일하고 싶은가 보네." 냅다 끌어안고는 뺨에 뽀뽀했다. 쪽 쪽. 잔소리를 해도 어렸을 때처럼 질색하고 밀어내도 그저 귀엽기만 하다. 정말로 싫거든 무하한으로 막거나 확 밀쳐 버리면 그만이지 계집애처럼 우는 소릴 내는 건 뭐냐. 앙탈부리는 것 아니더냐. "강제로 뺏어 보라지 않았냐. 원하는 대로 해 준 거다." "그래도⋯⋯ 여기서는 언제 누가 올지 모르니까. 안 돼." 고죠가 안대만 벗으면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도 봐주는 셈치고 놔 줬다. 아무리 둘 뿐이라지만 학교 안이다. 더 고집을 부려 봤자 나만 괴로워진다. 지금도 참기 힘든데. 담탱이가 너무 요염하다. "시간이 꽤 늦었는데. 집에 안 가고 예서 뭐 하고 있었냐." "뭐 하고 있었게. 이거 네 시험지잖아. 지금 채점하는 거야." "그렇구만. 내놔." "하하하. 부끄럽긴 한가 봐. 너, 보충 수업 때 보자. 으이그." 뺏으려다 실패하고 그냥 포기했다. 왕 주먹이 턱 밑을 오간다. 내 실력은 진작에 까발려졌으므로 부끄럽지도 않았다. 늦깍이 공부로 시작해 여기까지 왔으니 칭찬받아 마땅하다. 서술형은 대충 맞았다고 쳐 주지. 야박한 놈. "가만히 있어 봐. 아직 다 못했으니까. 흠. 이건 제대로 썼네." "시험지로만 판단하지 마라.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아냐." "알지, 알지. 그래도 현실은 냉정한 법이야. 틀렸고. 완전 틀렸고." "그, 그만 그어. 아니, 좀 작게 그어라. 왜 그렇게 크게⋯⋯ 아이고." 꼬맹이들 기분을 알 것도 같다. 내 손이 알아서 이마를 탁 친다. 이게 자책할 일인가. 공부도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닌데. 이런 종이 쪼가리 한 장 숫자 몇 개에 인생의 성패가 달린 것마냥 몰아붙이는 어른들이 나쁘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니 세상은 춥다가도 따뜻해지는 법이거늘. 결국 저들이 스스로 주변을 얼어붙게 만드는 셈이다. 메구미는 이번에도 만점인가. 그래도 상반되는 결과를 보니 꿀찜하다. 부끄러운 게 아니라 분한 거다. 아무렴 선생님한테는 메구미처럼 말하지 않아도 잘하는 제자가 예뻐 보이겠지. 관심을 받아도 한 번 더 받고. 그건 좀 부럽다. "채점 끝. 그보다 스즈카. 너야말로 요즘 교직원 휴게실에 드나드는 이유가 뭐야. 솔직히 말해. 뭐 하러 왔어." "그걸 몰라서 묻느냐. 당연히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지. 나도 훈련 감독이고 체육 선생님이랑 다를 게 없잖아. 따지고 보면 학생이자 교직원이란 말이야. 뭐, 그래. 솔직히 오늘은 다른 속셈이 있어서 왔다. 너한테 손대러 온 거다." "피곤하네. 어깨라도 주무르든가." 그 놈 어지간히 애태우는구나. 이럴 때 보면 아주 기회다 하고 일부러 더 잔인하게 구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처음부터 흑심을 품고 들어와서 끌어안고 뽀뽀했으니 딱히 할말이 없다. 속으로 끙 앓으며 못내 고죠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나마 만질 수 있다만. 불안한 마음이 없잖아 있다. 내게 접촉을 허락했던 것도, 강제로 뺏어 보라 말했던 것도, 고죠가 처음에 가졌던 의지와는 다르다. 내 발을 묶어 두기 위해서였든 뭘 위해서였든 그는 사제지간을 택했고 우리는 실제로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고죠도 한순간의 감정에 휩쓸렸을 뿐이다. 언제 정신을 차려서 나를 내쳐도 이상하지 않다. 마음 한쪽에서는 아직은 모르는 일이라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이미 결정된 일이라 한다. 고죠도 답답하겠지만 나는 줄곧 억눌려서 계속 자제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좀 더 단둘이 있고 싶다. 만지고 싶다. 이런 생각에 빠져 나도 모르게 손끝에 힘을 실었다. 고죠가 나를 휙 돌아보았다. 그야 아프겠지. 그러나 누군가 내게 지금 아프고 말 거냐 10 년 더 기다릴 거냐 묻는다면. 차라리 앓고 말겠다. "손대게 해 주면 바람 안 필 거야?" 고죠는 내게 충분히 너그러웠다. 그런 놈 앞에서 잘났다고 떠들어 봤자 나만 부끄러워진다. 그가 돌아앉더니 안대를 벗었다. 그리고 나를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좀 심쿵했다. 짓궂은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사랑스러웠다. "세 번." "응?" "뽀뽀해도 돼. 세 번만." "참지 않아도 되는 거냐." "안 되지. 자신 있으면 해." 나는 고죠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먼저 불그스레한 뺨에. 다음으로 이마에. 마지막 한 번은 조금 뜸을 들였다. 머리를 쓰다듬자 기분 좋은 듯 그가 눈을 감았다. 입술에는, 뭐, 그냥 귀엽게. 쪽 하고는 금방 떨어졌다. 더는 욕심부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애태우고도. 모르겠다. 그대로 손에서 빠져나갈까 봐 겁이 났던가. 어쨌거나 기쁘구나. "너도 빨리 집에 들어가라." 고죠는 말없이 웃었다. 생글생글. 그런 얼굴을 장난처럼 살살 꼬집고 돌아섰다. 나를 따라 움직이는 시선까지 완벽하게 귀여워서 흐뭇했다. 휴게실에서 나와 문을 닫은 뒤에는 당연히 내 눈이 그를 쫓아도 볼 수 없었다. 달달한 냄새도 없었다. 왜인지 코가 시큰했다. 가슴이 따끔했다. 한동안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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