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도리 유지. 장난칠 시간 따위 없다. 제대로 하지 못할까. 이건 훈련이야."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더욱 쌤이 주령으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그냥 귀여워요."

 "가소로운 놈. 그거지? 여자애는 때릴 수 없다는 거지? 그렇다면 죽는 수밖에!"

 "그러니까 그런 부분이⋯⋯ 어어, 알았어요. 제대로 하면 되잖아요. 부탁할게요!"

 부웅, 채찍으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무심코 넋을 놓았을 정도의 위력이라 스텝이 살짝 꼬였는데 회피 방법이 심각하게 잘못됐다. 순식간에 두 개의 숨구멍에서 코피가 솟구쳐 나와 춤추는 광경이 슬로 모션처럼 지나갔다.

 일말의 과장도 없이 저승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1 t짜리 트럭에 치인 것으로 착각을 했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지면과 마찰하며 멀리 미끄러져 나왔다. 70 m쯤. 실제로 그랬을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체감하기로는 그 이상이었다.

 유지는 이번에도 당연히 내가 공격을 막아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혼신을 다하라고 핀잔 준 것도 나였으니 도리어 내가 민망했다. 쪼르르 달려와 나를 일으키는 녀석에게 오버하지 말라며 괜찮은 체했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은 그만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 정도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이냐."

 "쌤을 때리는 건 고죠 쌤이라도 못해요."

 "모르는 소리! 고죠는 너처럼 어리숙하지 않아. 머잖아 알게 될 게다. 너와 스쿠나를 하나의 인격으로 보거나 제대로 구별하지도 못하는 놈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렇지, 오늘 일을 고죠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배를 잡고 웃을 테니."

 어떻게든 혼자 털고 일어났다. 보기 좋게 나가떨어져 쪽팔린 건 어쩔 수 없지만 아픔도 창피함도 때로는 좋은 자극이 된다. 흙바닥을 구른 탓에 먼지투성이가 되어 빨리 씻고 싶었다. 일단 치료는 끝냈고 귀찮은 일은 저쪽에 떠넘기자.

 "잠깐, ⋯⋯ 아니, 스즈카."

 "함부로 부르지 마! 닭살스럽게."

 "쌤이 자꾸 꼬맹이라고 부르시니까⋯⋯ 솔직히 의 얼굴로 깔보셔도 저희들에게는 전혀 위력이 없어요. 실은 쌤한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저 때문에 고전에 오셨잖아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음⋯⋯."

 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꼬맹이 상대로 진지하게 요구할 수는 없으니 무언가 재밌는 걸 떠올려내고 싶었다.

 "남자를 데려와라."

 "남자? 잡아먹게요?"

 "잡아먹을 리가 없잖아! 흠흠. 내 말은, 괜찮은 남자가 있으면 내 앞에 데려와 보라는 거야. 소개팅 말이야."

 "소개팅 좋죠. 맡겨만 주세요. 이래 봬도 발이 넓어서 전학오기 전에도 제가 남자애들이랑 여자애들 많이 이어 줬어요. 근데 쌤은 주령이잖아요. 그럼 연애도 주령하고 하시겠네요. 괜찮은 남자 주령⋯⋯ 하하하. 죄송해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한마디 하려다 그냥 웃어넘겼다. 처음부터 귀여운 꼬맹이라고 생각했다. 시건방을 떨어도 용서가 될 만큼. 나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도 제법 귀엽지만 슬슬 정말 돌아가서 침대에 뛰어들고 싶다. 슬쩍 일어나려는 찰나.

 "아아.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쌤, 어디 가요. 제 말 들어 보세요. 저, 딱 한 명 알고 있어요. 엄청난! 남자! 주령! 아, 아마도. 어쨌거나 쌤한테 딱 맞는 녀석이라고 생각해요. 저 믿으시죠? 그쵸? 당장 약속 잡아요. 내일 어때요."

 "무얼 그리⋯⋯ 왜 그리 필사적인 게야. 농담한 거 가지고. 괜찮은 거냐. 상대방한테 물어보지도 않고서."

 "문제 없어요. 내일 수업 끝나면 따로 만나요. 그리고⋯⋯ 역시, 부끄러워하시는 거네요. 또 빨개졌어요."

 "이 놈, 어디서 그딴 헛소리를 지껄여. 어어, 뭐 하는 거야! 내려 놔! 너, 손이 맵다고. 아야야. 바보 녀석이."

 유지가 나를 번쩍 안아올려 일으키고 기숙사로 달려갔다. 내 눈을 의심할 만큼 순식간에 멀어진 그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바보, 진심인가. 농담이라는 걸 어떻게 설명하지. 어찌 되든 간에 오늘은 잠이나 실컷 자야겠다.

 다음날. 방과후 까페에 왔다. 같이 나와도 됐지만 일단 헤어져서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스즈카 쌤, 교복을 입고 나오면 어떡해요. 평소랑 다른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듣고 있다.

 "저는 나름대로 준비하느라 애썼다구요. 예쁘긴 한데, 성의 없어 보일 거예요."

 시끄럽구만. 이것밖에 없는 걸 어떡하라고. 원래 생활하던 곳에서 내 물건은 하나도 가져오지 못했다. 마사미치에게 불평했더니 선심쓰듯이 준 게 이거다. 기숙사 방 하나. 교복이랑 체육복 두 벌. 그렇다고 꼬맹이 옷을 빌리기도 뭐하고.

 그래도 세수는 깨끗이 했는데. 유지를 보니 괜스레 미안했다. 농담으로 뱉은 말에 진짜 고민하다니. 애썼다는 게 확실히 티나긴 했다. 머리모양이라든지, 옷차림 같은. 이런 걸 꾸민다고 하는구나. 소개팅에서 주선자가 빛나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만큼 내게 보답하고픈 마음이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갸륵해서 좀 더 어울려 주기로 했다.

 "이렇게 된 이상 기합이라도 넣어요. 화이팅!"

 마지못해 손바닥을 마주쳤다.

 "정말 괜찮은 남자냐. 여자를 기다리게 하다니."

 "이미 왔어요."

 "어디?"

 "잠시만요."

 카페테리아를 둘러보아도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고 유지는 눈을 감은 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그가 눈을 뜨자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도저히 꼬맹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기세에 압도되어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스⋯⋯."

 "다테에보시."

 유지가 아니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무거운 긴장감으로 고개가 빳빳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스즈카라고 불러. 이제 그 이름 안 써."

 어제 그런 추태를 보이고 바로 다음날 이런 식으로 대면하다니.

 고전에 와서 거의 유일하게 신경쓰였던 일인 만큼, 얼이 빠졌다.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어. 료멘스쿠나."

 "피차일반이겠지. 점점 재밌어지는구만."

 스쿠나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말하진 않았어도 유지의 앞머리가 항상 답답해 보였는데 이마를 드러내니 과연 보기 좋고 속이 시원했다.

 "얘기 들었다. 소문이 자자하던걸. 당주 놈이 죽을 때 같이 매장됐다고. 그 전에 더한 꼴도 당했으면서, 다시 그리워지더냐. 인간 남자의 품이."

 다짜고짜 중심부를 찔렸다. 몇 백 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는 꺼낼 일도 들을 일도 없는 이야기가 되었으니 타격이 더욱 컸다.

 "나도 당신에 대한 소문 들었어. 애송이 하나 다루지 못해서 고죠 상대로 힘 한 번 제대로 못 써 보고 기절했다며. 처음에는 안 믿었는데 사실이더라."

 "아아. 눈 떠 보니 애송이의 몸이더군. 너 말고 누가 그런 발상을 하겠나. 더군다나⋯⋯ 그 계집 말이야. 얼마 남지 않았어. 이미 반송장이나 다름없다."

 "믿거나 말거나 이것만이 인간들과 공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렇게 주술사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애쓰며 연명해 왔단 말이냐."

 "사실,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야. 그게, 내가 아직 모든 인간들을 납득시키지는 못했거든."

 "과연. 알겠다. 엉뚱한 짓을 하고 다니는 동안 주술사들에게 완전히 길들여져 노예 근성이 생긴 것이로다."

 듣자듣자 하니까. 무릎 위 손을 꽉 그러쥐었다. 물론 테이블에 가려져 스쿠나 쪽에서는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 판 해 보자는 거야?"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그랬다. 스쿠나가 유지의 말을 듣고 순순히 나올 이유 같은 건 나를 약올리고 싶다는 것 하나밖에 없었다.

 분해서 치가 떨렸다. 쬐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게 이런 치욕을 당하게 하다니. 망할! 빌어먹을! 고죠 놈들!

 "하하하!"

 저주의 왕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다니 황송할 따름이다. 제기랄. 나는 속으로 죽어라 비아냥댔다. 이야, 축하드립니다. 최근들어 그다지 웃을 일이 없나 본데 오랜만에 빵 터지셨군요. 만족했다면 그만하시죠. 무게잡는 것도 관두기로 한 겁니까.

 "그런대로 반갑구나 스즈카 고젠. 아, 고젠이란 말은 더 이상 맞지 않는군. 당주 놈의 첩으로 그만큼 했으면 이제 놈의 성을 따라도 되지 않냐."

 "내 앞에서 첩이라는 말 쓰지 말랬지."

 기어코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었겠다. 치마가 구겨지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몇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른 건 다 참아도 그 단어만은 절. 대. 못 참는다.

 "스쿠나아!"

 "커헉! 저, 저예욧! 유지예욧!"

 그대로 주먹을 날려 분풀이쯤 할 수도 있었지만 무고한 유지를 차마 해코지할 수는 없어서 이 악물고 멱살을 놓았다.

 "분위기 왜 이래요? 잘 안 됐어요?"

 "⋯⋯."

 "제가 살짝 물어 볼까요?"

 "닥쳐!"

 "으헉!"

 "가만히 좀 있어! 아무것도 하지 마!"

 "죄송해요. 저는 그냥 도와드리고 싶어서."

 무얼 주눅들고 있어. 나 원. 소개팅은 얼어죽을. 슬픔·분노·쇼킹· 3종 세트를 선물하는구만.

 유지에게 차가운 커피를 가져다 달라 부탁하고 나서, 나는 자신의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반대로 개운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반송장처럼 누워 있던 몸. 문득 가슴에 손을 얹어 보면⋯⋯.

 두근두근. 두근두근.

 살아 있다. 그게 중요하다.

 "가져 왔어요. 아이스 커피요."

 테이블로 돌아온 유지가 내 뺨에 컵을 가져다 댔다. 싫은 생각들을 멀리 날려 주는 짜릿한 시원함이었다.

 "유지, 오늘의 일도 고죠에게는 말하지 말아 다오. 놈이 들으면 자지러지게 웃다가 질식사할지도 모른다."

 "안 해요. 그야 잘 됐으면 입이 근질근질했겠지만요. 이건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을 거 같아요. 걱정 마세요."


<제작> Copyright ⓒ 공갈이 All Rights Reserved.
<소스> Copyright ⓒ 카라하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