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고죠와 메구미를 보았다. 두 사람만 남아 나란히 걷고 있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고죠는 메구미의 어깨를 한손으로 꾹꾹 주무른다. 메구미는 아프다는 듯 조금 언짡은 표정으로 투덜거리지만 함부로 떨쳐내지는 못한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메구미의 입장에서도 고죠를 단지 후견인으로만 볼 수는 없게 됐다. 자칫하면 애매한 관계가 될 수도 있었는데 두 남자는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모범적인 사제관계로 보인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였을지 몰라도 고죠는 메구미의 수양에 진심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구속하지 않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 왔던 것이다. 한 번은 대놓고 이제 메구미를 양자로 들여도 되지 않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는 어차피 거절당하겠지만 자기도 메구미가 고죠 보다는 후시구로인 게 좋다고 했다.

 일단 고죠는 본인으로부터 메구미가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인간으로서. 스승으로서. 같이 살다 보면 서로를 닮게 된다는데, 함께 지낸 시간에 비하면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성격, 말투, 취향도 옷을 비슷하게 입는 것 빼곤 닮은 구석이 없다. 진짜 아비에게 길러졌어도 현재의 메구미가 됐을까라는 의문은 있지만서도.

 "대체 얼마 만이야, 메구미랑 디저트 투어 하는 거. 선생님 쓸쓸했지 뭐야. 좀 더 자주 따라와 주라. 응? 응?"

 "윽⋯⋯ 밥 먹은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잖아요. 물론 아직 먹을 수 있습니다만 속이 울렁거린다고요. 남자끼리 디저트 투어하는 건 둘째치고 셔츠를 가볍게 찢을 것처럼 생긴 주제에 여자 흉내 좀 내지 마요. 저도 더는 못 참습니다."

 "선생님도 남자고 부끄러워. 톡 까놓고 말해서 역겹지. 그래도 디저트 투어에는 그에 걸맞는 기합이 필요해. 목소리 깔고 케이크, 와플, 파르페라고 하면 식욕이 절로 떨어진달까 의욕이 생기질 않잖아. 메구미도 기합 좀 넣어 봐."

 "무슨 기합입니까. 저는 선생님 만큼 단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단 냄새를 풀풀 풍기고 싶지도 않고요. 오늘은 약속한 거라 어쩔 수 없이 갑니다만, 다음부터는 적절한 상대를 고르세요. 여자요. 저보다 꼬시기 쉽지 않습니까."

 "메구미. 오해를 살 만한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 스즈카도 들었지. 나, 제자한테 매도당하고 있는데. 보고만 있을 거야? 사토루는 음식으로 여자를 꾀어내는 저속한 놈이 아니라고, 디저트에 진심인 남자일 뿐이라고, 네가 말해."

 "그래, 메구미. 고죠가 일부러 여자를 울리는 쓰레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나오는 이유는 얼굴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저 얼굴에 속아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금도 정신 못 차리는 여자들이 나쁜 거다. 됐냐."

 누군가를 이런 식으로 비꼬아댈 때는 당사자가 화를 내거나 최소한 민망해하는 반응을 예상하는 것이겠지만 내게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 어차피 통하지 않기 때문에. 내 예상대로 고죠는 흐뭇하게 웃으며 제 미모를 뽐냈다.

 "뭐⋯⋯ 지금은 한눈팔고 싶어도 그럴 틈이 없을 거다. 대부분의 시간을 너희들과 임무에 할애하고 있으니. 고전 관계자라면 네 스승에 대해 모르는 인간이 없을 텐데. 다른 사람을 제 취향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단순히 즐기고 있는 게 아니냐. 주변에 단 걸 좋아하는 녀석이 없잖아. 나도 그렇고. 외롭다고 투정부리는 것까지 나무라지는 말거라."

 "스즈카도 투어에 동참하는 거 어때. 메구미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제대로 어울려 주지 않는단 말이야. 여자애가 있으면 낫겠지. 오랜만에 셋이서 나가자. 사이좋게 한입 씩 양보하고 '아'도 해 주는 거야. 특히 메구미."

 "선생님은 기합이 너무 들어갔어요. 의식 좀 하세요. 애도 아니고 어지간히 '아'는 이제 그만하자고요. 저도 해 드리지 않을 겁니다. 결정됐으면 가요. 선생님이 공부를 봐주신다고 해서 가는 거예요.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하시니까."

 "메구미도 참. 문제집은 잠깐 내려놔도 될 텐데. 소중한 시간은 더욱 아껴 쓰려무나.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아, 그래도 성적은 유지해야 돼. 떨어지면 삐칠 거야. 변명도 듣지 않을 거야. 돌아가면 죽어라 자습해. 메구미 화이팅!"

 "선생님 제자라면 웬만한 건 다 이해받을 수 있다 생각합니다."

 "그런 찌푸린 얼굴로 내 제자라 말하고 다니지 마. 창피하니까."

 결국 마지막까지 누구도 내 의사는 묻지 않았다. 어쩐지 내가 무덤을 판 것 같은데. 가는 수밖에 없나. 확실히 고죠의 디저트 투어에 동참하는 것도 셋이서 외출을 하는 것도 오랜만이다. 이럴 때까지 쌀쌀맞게 굴 필요는 없겠지.

 "메구미, 안전밸트 제대로 맸지? 딸깍 했어?"

 "네⋯⋯ 지금 한 번 더 확인하겠습니다. 딸깍!"

 "출발하기 전에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어. 선생님이 이지치를 엄청 좋아하잖아. 언제나 같이 임무에 나가잖아. 메구미도 알 거야. 내가 운전대를 잡는 건 오랜만이라.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급출발 급정차 등 할 수도 있다는 거."

 "미리 경고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참고로 사이드 브레이크 올라가 있습니다."

 "어이, 고죠. 괜찮은 거냐. 너한테 목숨을 맡겨도 되는 거냐고. 이 놈아, 아무리 오랜만이라도 그렇지. 면허 딴 지가 언젠데 어떻게 메구미 보다 몰라. 출발하기도 전에 헤매는 걸 보니 교통 규칙 따위는 진작에 다 잊어 버렸겠구만."

 "파란불에 출발이고 빨간불에 정차잖아."

 "메구미, 사랑한다."

 "제가 잘못했어요."

 "뭐야, 너희들.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나한테는 무하한이 있다고. 접촉사고를 막는 데 최적화된 능력이라고. 사람, 차, 전부 피할 수 있단 말이야. 모세의 기적도 가능해. 여차할 때는 하늘로 날아오르면 되지.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차는 출발했다. 인간 사이드 미러를 두 개 더 장착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도로를 달릴 수 있었다. 급출발 급정차는 말할 것도 없다.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는 그대로 비행기 타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는 줄 알았다.

 "하하하. 왜 이리 턱이 많아?"

 "앞을 봐! 속도 줄이라고! 오오!"

 오랜만이니까 운전 미숙까지는 그렇다 치자. 행여나 보조석에 앉은 내가 목이라도 부러질까 든든한 팔로 지켜 주는 것도 좋다. 그런데 이게 나를 보호하려는 건지, 나한테 자기 팔꿈치를 보여 주는 건지, 내 목을 치는 건지 모르겠다.

 무사히 카페에 도착했다. 메구미 자리는 두꺼운 책과 필기 도구만으로 테이블이 좁아 보여서 고죠 옆에 앉았다. 메뉴를 고를 때는 고죠가 알아서 하니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 머지않아 화려한 디저트들이 테이블에 놓였다.

 "웩."

 "자, 내가 사는 거니까 많이 먹어. 먼저⋯⋯ 이거부터!"

 고죠가 접시 하나를 내 앞으로 밀어 주었다. 생크림 얹은 케이크 위의 과일과 초콜릿을 보니 머리가 어지럽고 어마어마한 시럽 양에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디저트 카페다 보니 단 것뿐이지만 그나마 우롱차가 위안이 되었다.

 "어때?"

 "어떠냐니⋯⋯ 물어볼 필요도 없지 않냐. 달다. 미치도록 달아. 과일이나 다른 재료의 맛을 전혀 못 느끼겠다. 굳이 이런 것들을 왜 섞어 놓는 것이지. 어차피 한 가지 맛밖에 나지 않는데. 뭐, 그래도 끝맛이 나쁘지는 않구나."

 "하하하. 이것도! 이것도! 차가운 찹살떡. 먹어 봐. 응?"

 "그거 참 요상하구나. 어찌하여 떡을 일부러 냉장고에 넣어서 차갑게 만든단 말이냐. 어차피 속을 것 같으니 묻는다만. 안에 든 건 평범한 팥이 아니겠지. 또 생크림이 나왔다간! 나왔다가는! 하아⋯⋯ 일단 먹어는 보마. 네 추천이니."

 음. 생크림. 포크로 그릇까지 찔러 깨뜨릴 뻔했다. 고죠의 근처에 있을 때 빼고는 냄새도 맡을 일이 없는 것들. 내게 있어서 단 것은 곧 고죠다. 안 그래도 어지러운데 웬수 같은 놈이 머릿속에 가득한 것 같았다. 입속은 말할 것도 없다.

 묵묵히 디저트를 입에 넣을 때마다 조금씩 취하는 기분이었다. 꿈을 꾸는 것처럼 과거의 이런저런 일들이 문득 떠올랐다. 곤란하게 됐다. 웬수든 뭐든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달달한 냄새와 단맛으로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 묘하지 않은가. 좋지도 않은 기억을 되새김질해서 기억만 선명해졌다. 낯이 다 뜨겁고 괜히 따라왔나 싶기도 했다.

 "그건 팬케이크냐. 이리 다오."

 "기합이 제대로 들어갔네. 훗."

 그도 그럴 것이 먹는 것 말고는 할일이 없다. 메구미는 문제집만 쳐다보고 그런 메구미를 옆에서 계속 봐주고 있으니. 여러 가지로 체념하고 먹는 행위에 집중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나조차 의식할 정도면 메구미가 불평할 만하다. 지금은 문제에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 같지만.

 "엄청나게 쳐다보는군."

 "응? 누가? 메구미, 아아. 단 거 먹고 기분전환하자."

 "잠깐 이것만 풀고⋯⋯ 으으, 뭐였지. 그냥 주세요. 아."

 이런 닭살스런 짓은 제쳐두더라도 두 남자가 카페에서 디저트를 잔뜩 주문해 놓고 과외 중이면 한 번쯤 쳐다볼 법도 하다. 나는 들러리다. 잡지에 나올 것 같은 장신의 남자와 귀여운 남학생이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선생님이 체점해 주셔야 돼요. 이거 서술형이니까요."

 "보고 있어요. 지저분해라. 조금 간략히 줄일 수는 없니."

 "다른 과목도 아니고 어학이잖아요. 그 정도는 좀 봐주세요."

 "이 부분에 딱 맞는 관용 표현 있는데 가르쳐 줄까. 귀 대 봐."

 속닥속닥. 두 남자가 키득키득 웃으며 하이파이브했다. 들리지 않았으나 야한 농담임에 틀림없다. 남자끼리 공공장소에서 일부러 소리를 죽이고 할 만한 얘기는 하나밖에 없다. 이제 만족했는지 메구미가 문제집을 덮고 기지개를 폈다.

 "무슨 얘기냐. 나도 좀 웃자."

 "별 거 아니야. 그냥 포크 얘기."

 "음⋯⋯ 네, 맞아요. 포크 얘기요."

 "아아, 포크. 디저트가 너무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자꾸 찔러댄다는 얘기였구나."

 마지못해 장단을 맞췄더니 고죠와 메구미가 꺄르르 웃었다. 유지까지 꼈으면 아주 좋아서 난리가 났을 거다. 그래도 지루한 것보다는 낫다. 음담패설이라면 스즈카 님을 빼 놓고 얘기할 수 없나니. 메구미도 크면 알게 될 거다.

 "메구미는 다른 녀석들보다 성장이 빠른 듯하니 방심하면 안 된다. 잘 감시하거라."

 "무슨 뜻이에요?"

 "메구미에게 전에는 없던 안목이 생겼다는 뜻이야. 이성에 대한 가치관. 여자 말이야."

 "그걸⋯⋯ 이제 와서 새삼스레 얘기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고등학생인데요."

 "그럼 메구미는 귀여운 여자애를 보면서 이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적 있었어?"

 "선생님은요? 있었어요?"

 "풉! 한방 먹었구나, 고죠."

 "선생님한테도 그런 추억이 있지. 지금도 고민해. 어떤 고민이든 고민하는 시간이 줄어든 것뿐이야. 말 나온 김에 좀 더 얘기해 보자. 선생님도 메구미랑 같이 고민하면서 성장통을 함께 나눌래. 제자의 연애 상담 해 보고 싶어."

 "저는 하지 않겠습니다.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거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선생님과 비슷한 생각 비슷한 선택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저도 선생님처럼 모든 걸 가진 사람이 왜 혼자인지 이해 안 되니까."

 "⋯⋯."

 "메구미, 괴롭히지 마라. 그리 눈치 주지 않아도 제자들의 표정 말투 하나하나 신경 써야 하는 게 선생님이다. 선생님에게 제자 보다 신경 쓰이는 건 없다. 네놈들이 발목을 잡기 때문이지. 그건 불쌍하지 않으냐. 나도 듣기 거북하다."

 고죠가 눈빛으로 내게 핀잔을 주었다. 말하면서도 메구미에게 미안했다. 내가 없었더라면 메구미도 얼마든지 마음을 열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나는 들러리일 뿐인데. 아무렇지 않은데. 꼬맹이 주제에 쓸데없이 생각이 많다.

 "메구미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네 말이 맞아. 선생님도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아직 멀었달까 성장 중인 것 같아. 다만 지금까지 제대로 상담할 사람조차 없는 건 슬프네. 선생님도 답례로 메구미한테 상담받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런 건 처음부터 말씀하세요. 선생님의 고민이라면 얼마든지 듣겠습니다. 케이크 한입 드릴게요."

 "아아."

 뭐라고 말해도 사이가 좋다. 메구미도 많이 능청스러워졌다. 고죠는 원래 뻔뻔했지만 메구미 앞에서 만큼은 줏대가 없다 싶을 정도다. 선생님 입장에서도 부모 입장에서도 당신을 닮고 싶지 않다는 말보다 큰 상처는 없을 터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기쁜 표정이었다. 모진 말을 듣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오히려 고죠에게는 효과가 더 좋은 것 같다.

 "사실, 선생님의 고민에는 저도 흥미가 있습니다. 당주님인데, 연애로 고민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택도 없는 소리. 메구미는 우리 가문을 그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구나. 다 옛날 얘기야. 그런 낡은 관습이 아직 남아 있을 리 없잖아. 명문가라도 여자를 납치할 수는 없단다. 당주님도 사랑을 하려면 스스로 노력해야 해요."

 나는 고죠를 빤히 쳐다봤다. 그럴수록 고죠는 더 뻔뻔하게 웃었다. 어쩜 그리도 거짓말을 술술 잘 내뱉는지. 빈정대고 싶지만 메구미 앞이라 참았다. 메구미도 어쨌든 도련님이고 바보가 아닌데 그깟 현실도 제대로 보지 못할 리 없다.

 "선생님에게도 말 못할 사정이 있었겠죠. 농담이라 할지라도 선생님이 이제껏 누구의 앞에서도 꺼내지 않았던 얘기를 제가 들어야 할 정도면 더욱 웃어넘길 일은 아닌 듯합니다. 당주님에게 가장 걸리는 건 아무래도 가문 아니겠습니까."

 "그래. 가벼운 마음으로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니야. 내 앞의 사람들이 같은 가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주장을 하고, 누구 하나는 나가떨어질 때까지 계속할 기세로 싸우기도 해. 그러면서 아무도 나를 당주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지. 하물며 나도 평범한 남자라는 걸 쉽게 인정해 주겠니."

 "인정하거나 말거나 사실이잖아요. 누군가 인정해 주지 않으면 평범한 남자조차 될 수 없는 겁니까, 선생님은. 아무리 떼를 써도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뭐, 저도 그 분들의 마음은 이해해요. 당주님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선생님이 못할 이유는 없죠. 그리고 어쩌면 선생님만 할 수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잘나서든, 못나서든, 미쳐서든요."

 "하하하. 선생님이 어렸을 때 얘기인데. 메구미랑 똑같이 말해 준 놈이 있었어. 메구미처럼 상남자는 아니었고 좀 더 정론에 가까운 말을 했지만. 뭐랄까, 무능력함을 느꼈었지. 그때도. 언제부터 잊고 있었던 걸까. 어쨌든 고마워."

 나는 고죠가 깨작대던 파르페를 내 앞으로 끌고 왔다. 그렇게 계속 생크림을 집어넣다가 어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 왔지만 오기가 생겨서 나답지 않게 객기를 부렸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부족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거 내 건데. 인상 쓰면서 잘 먹네. 스즈카."

 "웩⋯⋯ 이상한 말투 쓰지 마! 토할 것 같아!"

 "뭐, 뭐가 이상한데. 메구미, 내가 나쁜 거야?"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만 속이 니글거려요. 저도 우롱차 마셔야겠어요."

 메구미가 손을 번쩍 들고 우롱차를 주문했다. 나도 한 잔 더 부탁했다. 내 잔은 예전에 비어 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던 고죠가 뭔가 알아차렸는지 의뭉스레 쳐다보더니 기가 막힌다는 듯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만 먹어. 한번에 너무 그렇게 무리하지 마."

 "시끄러워. 닥쳐. 네가 뭔데. 무슨 상관이냐고."

 "돌아갈 때도 내가 운전하는 거 잊지 마. 입 벌려서 억지로 끄집어낸다."

 "그만둬! 윽! 하지만 너의 말대로다. 나한테 이 이상은 무리야. 어지러워."

 티슈를 뽑아 혓바닥을 닦았지만 파르페를 억지로 욱여넣은 탓에 입에서 생크림이 끝도 없이 나왔다. 고죠와 티격대는 사이 메구미는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렸고 결국 민망함을 견디지 못해 화장실로 도망쳤다.

 "실례합니다. 주문하신 우롱차 두 잔입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신지요."

 "고맙습니다. 죄송하지만 티슈가 떨어진 것 같아요.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저, 옆에 앉아 계신 손님은 괜찮으신가요."

 "괜찮아요. 원래 단 걸 잘 못 먹는 친구인데, 저한테 무리하게 어울려서요."

 뜨거운 우롱차를 급하게 마시다 혓바닥을 데었다. 괴로워하다가 무심코 점원의 뒷모습을 쫓았다. 아까부터 고죠를 힐끔거리는 게 신경 쓰였다. 그녀의 볼이 묘하게 빨갰다. 설마했더니 우롱차 두 개 중 하나는 찻잔 아래 메모가 있었다.

 "메구미의 말이 도리에는 어긋날지 몰라도 나 또한 녀석과 같은 생각이다."

 "너까지 왜 그래."

 "가문에 의지해 나약해질 바에는 그 뜻에 반하더라도 네 마음을 따르거라."

 "쉽게 말하지 마. 내가 뭔 짓을 안 해 봤겠냐고. 나 혼자로는 안 돼. 바보야."

 의젓해지려는 나의 노력도 잠시. 나는 멍해졌다. 내가 아는 고죠는 그런 놈이 아니었다. 그렇게 얌전하지도, 덤덤하지도 않았다. 아이였을 때조차 어디서든 아랫것들 앞에서 할말 못 할말 다 했고 쉽게 고집을 꺾는 법이 없었다. 고죠 가 사람들이 모일 때는 나도 고죠 옆에 바짝 붙어 시중을 들었고 그런 모습을 거의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과거 시점이든 현재 시점이든 고죠가, 당주님께서, 가문에 먹혀 버렸다는 사실을.

 "그럼⋯⋯ 솔직하게 말하고 도움을 구해라. 장차 너의 반려자가 될 여인에게."

 "장차 너의 반려자가 될 여인에게⋯⋯ 웩. 무리야. 내가 그런 달달함에는 좀 약해서. 메구미한테 한소리 들은 걸로 모자라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한심하게 징징대라고? 지금도 꽤 아픈데? 그러다가 나한테 질리면 그때는 어떡해."

 "내가 나서 주마. 어떻게 할까. 당주님이 점찍은 여자는 따로 있으니 죽기 싫으면 전부 입 다물라고 할까. 네가 억지로 장가들어야 할 위기에 처했을 때 나도 따라가 상대방 여자에게 네가 얼마나 끔찍한 남편이 될지 가르쳐 줄까."

 "하하하. 네 말 그대로 돌려줄게. 네가 뭔데. 나랑 무슨 상관인데. 언제 우리 가문 사람이 됐냐. 진작 뛰쳐나간 주제 뭐라도 된 것처럼 우쭐대지 마. 너는 모르잖아. 내가 어떻게 몸부림쳤는지. 그래도 두 번째는 나쁘지 않네. 재밌겠어."

 고죠는 나를 보고 있었지만 나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무엇에 한눈팔고 있는지 의아함을 느낀 그가 머잖아 알아차린 것은 찻잔 아래의 작은 종이였다. 그는 말없이 내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그냥 못 본 체하기로 한 모양이다.

 "나랑 얘기할 때는 나를 봐."

 "보나마나 얄밉게 웃고 있겠지."

 "말이 잘못 나왔어. 그러니까⋯⋯."

 고죠는 말을 삼켰다. 내 시선을 쫓다 마침 자리로 돌아오는 메구미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제자를 의식해 나와 거리를 두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가까웠던 건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그를 보고 나도 찻잔을 들었다.

 "다녀왔습니다. 이건⋯⋯ 선생님 거 같은데요."

 "글쎄, 모르겠어. 주문했던 사람은 메구미니까."

 "그것도 그렇네요. 귀찮으니 그냥 버리겠습니다."

 "목소리가 커. 여자애한테는 상냥하게 굴라고 했잖니."

 "선생님한테 듣고 싶지 않아요. 스즈카 씨, 괜찮습니까."

 "나 말이냐."

 "선생님이 나쁜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아닙니까.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광경이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그야말로 여자애를 괴롭히는 나쁜 어른이었거든요. 수상한 사람 취급 받기 전에 제가 와서 다행입니다. 그쵸, 선생님."

 "뭐랄까⋯⋯ 요즘 메구미랑 있으면 냉탕 온탕을 오가는 것 같아. 사춘기는 이미 지나지 않았나. 아끼고 아껴 왔는데. 아이의 사랑은 언젠가 빼앗길 수밖에 없는 거겠지. 뭉클하네.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래도 계속 좋아할 거야."

 "잊으셨나 본데 선생님은 사랑을 요구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가르침을 구해야죠. 그밖에 선생님과 제 사이의 모든 규칙은 선생님이 만드신 겁니다. 처음부터 분명히 해 두셨잖아요. 기억하고 있을게요. 저를 두고 가시지 않도록."

 "고죠, 너. 메구미한테 그런 말을 했냐."

 "아니⋯⋯ 응. 남자들끼리 하는 얘기야."

 "메구미가 너를 괴롭히는 것이나 네가 나를 괴롭히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네가 메구미를 괴롭히는 건 얘기가 다르다. 그래서 어쩔 건데. 선생 때려치울 거냐. 무슨 말을 해도 그 따위로 해. 메구미한테 사과해. 지금 당장."

 "싫어."

 "잘났다 잘났어. 애 앞에서 폼잡고 훌륭한 선생이다 그래. 말 나온 김에 묻겠는데. 그동안 메구미를 잘 돌본 거냐. 제대로 먹이고 입히고 잠은 충분히 재운 거냐고. 설마, 훈련 봐준답시고 아무도 모르게 쥐어박는 건 아니겠지."

 "아니거든. 나는 내 역할대로 메구미를 올바르게 가르치고 있어. 너야말로 무책임하게 자기 역할을 내던졌지. 내가 혼내면 네가 달래 주는 거였잖아. 네가 게을러서 나만 메구미한테 이렇게 미움받고 있잖아. 너야말로 어쩔 건데."

 "그래서 내가 나쁘다? 나는 너를 믿었는데 이제껏 편하게 지내다 싫은 소리 좀 했다고 감히 나를 원망한다? 이제는 너 혼자서도 나름 살 만한가 본데. 이럴 거면 각자 알아서 행동해. 너 따로 나 따로.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라."

 "아니라고 했잖아.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하게 하지 마. 스즈카 바보."

 "힘들면 말하지. 말했음 나도 그렇게 모질게 굴지 않았다고. 바보 고죠."

 화를 내면서도 자신에게 그리 할말이 많았는지 몰랐다. 언제 불이 붙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거다. 불이 붙더라도 최소한 둘만 남겨졌을 때를 골랐어야 했다. 메구미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화해해서."

 그렇게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온 세 사람은 고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차에 올라탔다. 고죠와 단둘이 얘기할 기회가 생길 줄은 몰랐는데. 수다를 많이 떨어서인지 화를 내서인지 가슴이 잉큼잉큼 뛰다 도착할 때쯤 잠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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