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겨울이었다. 저녁쯤이었던가. 약속했던 시간이 됐다. 도쿄에서 하루만 더 지내면 나는 후쿠오카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딱히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는데 그날따라 왠지 네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너는 우리가 이별하기 전과 다를 게 없었다. 멋대로 굴며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반대로 웃게 만들기도 했지.
달라진 것은 오로지 너와 내 거리였다. 수 개월 동안 너는 정말 지독하다 할 만큼 내 옆에 오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 전처럼 장난을 치고 시비를 걸었다. 네가 눈을 보여 주지 않아 나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거리낌 없이 대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피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네가 마찬가지로 두려웠다. 그래도 말이야. 나도 잘못한 게 있잖아. 네게 큰 잘못을 했지. 한 번쯤은 용기내어 말하고 싶었다. 그 방에서. 어떤 말이라도. 그날, 우타히메와 쇼코가 당시 화제였던 영화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지. 나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그거 재밌겠구나. 보러 가야겠다. 하니 우타히메가 설레발을 쳤어. 누구랑 보러 갈 생각이냐고. 우습게도 나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랑 갈지 그런 게 뭐 중요하냐. 누구든 가겠다고 하면 아무나 상관없지. 돌이켜 보니 얼굴이 화끈거리는구나. 그렇다.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사토루 네가 말해 주었다면 나는 더할나위없이 좋았을 거다. 쇼코는 진작 눈치챘던 모양이다. 자연스레 제안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줬거든. 싫다 할 줄 알았는데. 너는 의외로 신이 났어. 오늘 밤에 보러 가자면서. 우리 둘뿐이었는데. 네가 우타히메까지 꾀어내서 결국 셋이 됐지. 그렇다고 네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너를 원망하겠냐. 그냥 좀 많이 어색하고 불편하더구나. 영화를 보는 내내 그랬어. 길고 지루한 영화가 마침내 끝났을 때는 도망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더는 일 초도 너희 둘 사이에 끼어 있고 싶지 않았거든. 우타히메랑 가고 싶으면 말을 하면 되지. 기꺼이 원하는 대로 해 줬을 텐데.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끝난 사이였어도 우타히메는 너랑 내가 어떤 사이였는지 알잖아. 즐길래야 즐길 수가 없지. 영화관에서도 억지로 끌려 나온 기색이 역력했는데 네가 제안한 2 차 따위를 가고 싶었겠냐. 나도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다면 원수와 함께라도 상관없지만 그날만은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찌 꼬셨는지 우타히메까지 거들기 시작했지. 나는 분명히 싫다고 했다. 둘이 작당이라도 한 것처럼 붙잡고 놔 주질 않는데 별 수 있었겠냐. 다 큰 놈들이 뭐가 부끄럽다고. 그렇게 가게에 들어갔지만 마음은 이미 저 멀리 후쿠오카에 가 있었다. 너는 전화를 받기 위해서 잠시 일어났고 그 사이 술이 나왔다. 받자 마자 비워 버렸어. 나는 다음날 새벽 기차를 타야 했다. 그러니 먼저 가게에서 나왔지. 몇 분 후에 전화가 오더구나. 왜 먼저 가 버렸냐, 우타히메랑 둘이서 놀아도 재미없다, 어디냐, 어쩌고 저쩌고. 대충 그런 말을 한 것 같은데. 그냥 끊어 버렸어. 몇 번인가 다시 걸려 온 전화는 귀찮아서 받지도 않았다. 그 다음은 뭐 똑같지. 언제나처럼 내 삶을 산 거야. 침대에 앉아 전화기를 만지작대다가 그날 찍었던 사진을 봤다. 고작 사진 한 장 때문에 이렇게 생각에 잠겼다. 왜 이리 생생한지. 가슴이 먹먹하면서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만 하면 됐다 하고 일어나는 찰나. 창밖에서 탁탁 소리가 났다. 아무도 없나 했더니 고죠가 구석에서 빼꼼히 머리를 내밀었다. 서둘러 문을 열고 주위부터 살폈다. "사토루, 거기서 뭐 하냐." "사토루 군, 할 말이 있어." 화단을 가로질러 온다고 머리에 나뭇잎이 다 붙었다. 남사스러워 얼른 떼어낸 뒤 손으로 살뜰히 빗어 주었다. 그러면서 탐스러운 뺨도 쓰다듬어 주고. 저 딴에는 몸을 낮추고 벽에 찰싹 붙었는데 그래 봤자 그 덩치가 가려지나. 다행히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육안이 없어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다른 주력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녀석아, 할 말은 전화로 하거나 메시지를 남기면 되지. 이렇게 여자 기숙사 뒷마당을 어슬렁거리면 어떡해. 시커먼 곰 마냥 안 그래도 위협적으로 생긴 놈이 말이야. 선생님만 아니었음 계집애들이 너를 보고 비명을 지를 거다." "그러니까. 내 방에 놀러 와." "놀라게 좀 하지 마라. 갈게." "네가 좋아했던 과자 사 놨어." 도대체 너는 무슨 생각인지. 아, 지금은 아무 생각도 없다고 했던가. 이렇게 찾아온 것도 말하는 것도 예쁘다. 열 번 쓰다듬어도 부족하다. 살며시 머리를 끌어안으며 입맞췄다. 그제서야 조금은 애타는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과자라. 내가 좋아했던. 뭔지 모르겠다. 나도 기억 못하는 걸 어찌 생각했을까. 문득 처마 끝에서 흔들리는 걸 봤는지 고죠가 이게 뭐냐 한다. 다홍색 동글동글한 감이 대롱대롱. 곶감이다. 학교에서 감 말리는 애는 너밖에 없을 거라며 깔깔 웃는다. 달라고 해도 안 줄 거다. 고죠는 방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하고는 한 번 더 입맞춘 뒤 돌아갔다. 아무래도 고죠가 큰 결심을 한 모양이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계속 생각만 한들 어쩌겠는가. 나는 기숙사를 나섰다. 여유롭게 걷다가 아는 녀석과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고죠의 방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돌아오는 대답. 스즈카라면 암호를 대세요. 좀 부끄럽지만 암호는 이거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이 몸을 문 앞에 세워 두다니 가소롭구나. 하하하. 웃음소리까지 현실감 있게 연기해야 허락을 받고 들어갈 수 있다. 고죠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소파에 앉으려 하니 책상을 탁탁 두드리며 이리로 오란다. 머뭇거리다 과감히 올라앉았다. 그가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만해도 적극적인 것이다. 이참에 마음대로 하게 두고 나는 멀뚱히 앉았다. 그러다 책상 한편에 놓인 흥미로운 물건을 발견했다. 다음 시험 문제임에 틀림없었다.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어찌 알았는지. 쿵. 내리치는 손에 저지당했다. 선생님 물건에는 손대지 않는다. 주의를 주고는 다시 달라붙는다. "출장 잘 다녀왔냐." "응." "내 과자는." "여기 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오, 이거 맛있지. 장인이 정성스레 만든 과자다. 비싼 걸 떠나 주문도 할 수 없어서 그 지역에 가야만 사 먹을 수 있다. 고죠가 없음 엄두도 못 낸다. 데이트 몇 번 더 하면 부자되겠구만. 이제껏 받은 선물 중 제일 마음에 든다. "있잖아, 스즈카. 아까 기숙사에서 보고 있던 거 뭐야?" "보고 있던 거? 그건⋯⋯ 별거 아니야. 그냥 사진이다." "역시 그랬어! 다른 남자의 사진을 보고 있던 거지? 응?" "사진 속에 남자가 있긴 했다만, 다른 놈은 아니야. 너다." 나는 내 전화기를 고죠의 손바닥 위에 순순히 내려놓았다. "갑자기 네가 나타나서 사진을 화면에 띄워 둔 채로 껐다. 너 가고 나서는 안 건드렸어. 이 말도 못 믿겠냐." "헤어진 애인 사진을 10 년 넘게 안 버리고 액자에 고이 끼워서 당당히 전시해 두는 너니까. 그래서야. 흥." "나도 그게 좋은 습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네 사진도 전부⋯⋯ 봤으니까 됐지."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나는 전화기를 도로 빼앗아 주머니에 넣었다. 작년에는 멋대로 집에 들어와서 액자를 부수고 난리치더니. 내게 지금도 생각하냐 물으면 당연히 나는 잊은 지 오래라고 말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와서는 헤어진 애인 같은 것보다 그날 우타히메랑 영화 보러 갔던 기억이 더 선명하다. 이유는 두 말 하면 잔소리다. "기숙사 밖에서 널 조금 지켜봤어. 하도 애틋한 표정을 짓길래. 그거였구나. 말도 없이 가 버린 건 너잖아." "네가 어찌 생각하든 나는 여전히 너희 둘을 응원한다. 지금이라도 잘해 봐. 축하해 줄게. 축가도 부를게." "고마워. 축가는 없을 거야. 그런 떠들썩한 행사가 아니거든. 너한테 많은 걸 바라지는 않아. 여기 있어 줘." "⋯⋯." "차라리 할아버지 시대에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결혼한 뒤 애인을 만들어도 애인이 좀 어려도 문제 없었겠지." "네 할아비를 오해하지 말거라. 고죠는 흠잡을 곳 없는 사내였어. 당주로서 가문에 충실하고 남편으로서 처자식에 충실했다. 내 말 못 믿겠으면 본가에 가서 족보라도 펼쳐 보든가. 충실하지 않았으면 네가 어찌 태어날 수 있었겠니." 그 시대에 고죠는 엄연히 내게도 남편이었다. 사토루는 뭐 헤어진 애인이고. 그런 부분은 확실히 해야겠지만 내 마음속에서 두 남자의 위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정작 동침한 날로 따지면 구차하게 세어 볼 것도 없이 누구보다 내 남편다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내가 여기 있다. 그가 내 몸에 새겼던 수많은 상처만큼 그리움도 원망도 컸다. 쓸데없는 소리 한 벌로 나는 고죠의 얼굴을 밀어냈다. 앙탈부리는 건 또 참을 수 없다. 내 마음이지만 모르겠다. 아무렴 네가 무슨 죄겠니. 나 때문에 당주의 의무도 뒤로하고 아직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 만족해야지. "스즈카. 너한테 있어서 할아버지는 뭐야?" "남편이지. 첩도 아내야. 남편밖에 못 건드려." "그럼 나는?" "너는 내⋯⋯ 미래다. 어쨌든 과거는 아니잖아." 누가 봐도 둘러대는 모양새기 때문에 고죠는 찜부럭했다. 확실히 나는 생각나는 대로 떠들어댔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 최선의 대답이기도 했다. 까놓고 말해서 남편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면 뭐겠는가. 고죠도 같은 생각일 거다. "내 말은, 적어도 마음속으로 말이야. 나를⋯⋯." "쓸데없는 소리 마라. 그런 얘기를 꺼낼 때가 아냐." "그럼 무슨 얘기를 할까? 우타히메를 왜 끌어들였는지는 이미 말했지. 그때는 자신이 없었어. 물론 그게 다는 아니고. 내가 걔한테 도와 달라고 부탁한 거야. 너, 술 좋아하잖아. 술이 들어가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해서. 미안해." "뻔뻔한 낯짝으로 잘도 지껄이는구나. 부끄러운 줄 모르고. 볼 장 다 봤냐. 이제 가도 되지. 좀 떨어져." "하하하. 그래, 나는 너랑 결혼 못해. 이대로는 연애도 무리겠지. 짝사랑이라도 상관없어. 아직은 못 가."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상하리 만큼. 나는 그대로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죠의 안대를 훌러덩 벗겼다. 고죠가 당황하며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방안에서는 숨을 이유가 없었지만 거기에 계속 숨게 두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더니 그새 다시 풀어졌다. 지금 내 비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중요한 건 고죠가 뭘 원하는지다. 이제는 나도 분명히 바라보아야 한다. 그는 포기하라고 한 적 없다. 도와 달라고 싸워 달라고 했다. "나야말로 미안하다." "왜⋯⋯ 무슨 뜻이야." "너를 위해 떠났던 것은 그렇다 쳐도 네 마음을 듣지 않으려 했던 것은 내 잘못이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늦었지만 너한테 사과해야 할 것 같다. 나를 사랑하잖아. 너는 결혼하기 싫은 게 아니야. 연애하기 싫은 것도 아니고. 다만 지금은 네 편이 필요한 거다.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나는 딱히 고죠 가의 안주인이 못 돼도 상관없다. 하지만 나도 욕심은 있다. 네가 원하면, 아니, 네가 원하지 않아도, 내가 안주인이 되어야겠다면 어쩔 테냐." "⋯⋯." 어떤 표정이냐. 얼굴을 봐야겠다. 물론 고죠는 저항했다. 실랑이 해 가며 끝내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힘으로, 강제로. 뭉클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이제껏 내가 봤던 어떤 얼굴보다 빨갰다.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보인다. 왜 몰랐을까. 왜 이런 너를 못 보고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 애태웠을까. 네가 원했던 것도 그저 나였는데. "사토루 너는 내 삶의 끝이자 영원이다." "너한테 있어서도 내가 최강이라는 거네." "당연하지." "그럼 됐어." 너는 내 남편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다. 그럼에도 너의 헤어진 애인에 불과한 내 사랑을 충분히 받을 만하다. 그래 질투가 나서 액자도 냅다 던져 버렸구나. 제 마음 추스르느라 정작 내가 질투하는 건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게지. 그런 너를 어떻게 예뻐하지 않겠니. 예쁘다 못해 그토록 나에게 사랑받길 원하는 네가 한없이 가여워질 지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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