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학교 휴게실에서 뜻밖의 사고가 있었다. 그걸 수습하려면 고죠의 집안일을 거들어야 한다. 집을 비울 때 약속대로 다섯 번만 다녀가면 된다 했다. 고죠가 이유 모를 사정으로 본가를 떠난 이래 그의 집은 처음 구경한 것이다.

 오랫동안 신세졌다 하는 이로부터 세심한 관리를 받아왔음은 물론이요, 좁은 기숙사 방에서 생활하는 내가 보기에는 사치스러운 집이라. 이래서 여짓껏 장가들 생각을 안 했구나 하면서도 횅댕그렁하니 조금 딱하기도 하였다.

 집안일이라 함은 청소, 세탁, 요리가 기본이다. 청소 도구를 포함한 대부분의 현대식 가전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놀라운 성능을 자랑한다. 다만 오랜만에 하는 집안일이 영 버겁다. 나도 한동안 누군가에게 의존해 온 까닭이다.

 기숙사에 돌아와 느긋이 샤워를 하면서 향긋한 미온수로 몸에 묻은 피로를 씻어냈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싸고 침대에 던져 놓았던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부재중 전화 1 건. 그새 고죠가 내게 전화를 했다. 메시지도 남겼다.

 출장 마치고 왔구나. 이번에는 상당히 까다로운 임무였는지 여느 때보다 시간이 걸렸다. 동행자였던 이지치가 떠나기 전 근심을 내비친 고로 한 번쯤 나도 괜한 생각을 했던지 묘하게 몸의 힘이 빠져나가고 마음이 놓였다. 생각해 보면 이지치는 고죠와 일하면서 으레 그렇듯 하루하루 늙어 가고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나 왔어.」

 「벌써 자는 거 아니지?」

 하기야 자기에는 이르지. 기숙사에 들자마자 녹초가 되어서 쓰러졌음을 감안하면 기절해도 이상치 않다만은, 메시지를 받은 지 이미 30 분이 지났으므로 이제 전화하면 고죠는 샤워 따위의 이유로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단 메시지를 남기기로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고는 '미안, 씻느라 못 받았다'. 그뿐이었다. 원체 느린 손가락이기도 하거니와 매번 의도치 않은 글자가 만들어져 애를 먹는다. 혼자 낑낑대고 있으니 전화기가 부 울린다. 열심히 끄적이고 있던 것이 그만 보이질 않게 되어 벙찌고 말았다. 받자마자 봤으면 대답 좀 하라고 아우성이다.

 "거 참, 이제 금방이었는데. 스마트폰은 처음인 거 알면서 좀 기다려 줄 수 없냐. 일부러 대답 안 한 게 아냐. 글자를 쓸 시간이 부족했다. 이게 자꾸⋯⋯ 바났다라고 써지잖아. 겨우 다 쓰고 보내려는 찰나 네가 전화한 거다."

 「가르쳐 준 거 다 잊었어? 배울 생각 있긴 해? 내가 설명할 때 딴생각 했겠지. 그러니까 수업시간에도 진도를 못 나가지.」

 "딴생각 한 적 없어. 그냥 집중할 수 없었던 거지. 근데 너도 이상하잖아. 내가 읽었다는 건 어떻게 알아. 감시라도 하냐."

 고죠는 얼핏 우물우물하나 싶더니

 「그 비밀을 알기에는 아직 한참 일러!」

 하고는, 그래 가지고 바쁜 현대인들 틈에서 어떻게 살 거냐는 둥 별 걱정을 다 한다. 나도 한마디 한다면 그 바쁜 현대인들이란 것들은 답장 기다릴 인내심조차 없어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까지 알고 싶어 한단 말이냐 할 것이다. 누가 인간 족속 아니랄까 봐, 겉으로 고상한 척하며 속내는 하나같이 음흉하기 짝이 없다. 죄다 저주나 받았으면.

 생각은 그러했으나 나는 누구와도 다투고 싶지 않았다. 고작 다섯 날일지라도 엄밀히 따지면 내가 뒷바라지한 것이다. 전에는 없었던 너그러움이 생겼다. 어쩌면 고죠가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할 때 오히려 안심하는 이가 나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만큼 여러 면에서 공감할 수 없는 놈이므로.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나긋이 말했다.

 "못된 주령들과 싸우다 저주받지는 않았니."

 「집에 일찍 들어오지 못하는 저주에 걸렸어.」

 "그렇다면 내가 도움이 되지는 못하겠군. 그 저주는 이미 천년 전부터 이 세상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뿌리내린 것이라 너무 강력하거든. 밥은 먹었냐. 벌써 이런 시간이니 밖에서 먹었겠지. 식탁의 것들은 그대로 두면 된다. 내일도 갈 테니."

 「도시락 먹긴 했는데⋯⋯ 사토루 군도 오늘은 조금 힘들었어. 보상이라 생각할래. 살쪘다고 놀리기만 해.」

 "내 말을 담아 두고 있었냐. 되는 대로 지껄였을 뿐이다. 달달한 냄새 때문에 정말 취하기라도 한 것 같았어."

 나도 좀 별나다고 생각하지만 달달한 냄새를 맡으면 머리가 아프다. 그 모습이 취한 사람 같을 만큼. 그런데 고죠는 사내 녀석이 씁쓸한 멋이란 게 없다. 생크림처럼 단 것에 과일처럼 신 것 아주 어지럽다. 예전에 비하면 괜찮은 듯도 한데 트라우마 탓인지 그저 요즘에도 고죠가 주머니나 소매에 사탕을 감추고 있지 않나 퍽 의심이 간다.

 그래서 그날 버럭했던 것인데 실상은 돌려 말할 방법을 찾지 못해 화내는 일도 많다. 고죠가 살을 찌워 봤자 지금보다 험상궂은 몸이 될 뿐이다. 그런 것 보다는 설탕이 건강을 해칠 수 있다 하니 줄이는 게 어떠냐 말하고 싶었다.

 「하아⋯⋯ 솔직히 말이야. 앞으로는 사양 좀 해야겠어. 방심하다 진짜 아저씨 몸매가 되면 어떡해. 근데 이게 다 뭐냐. 하하하. 고죠 가 비전 요리법이 여기서 나오네. 본가에서 나온 뒤로 이런 전통 음식 입에도 안 댔는데. 맛있겠다.」

 생각보다 좋은 반응이다. 어렸을 때부터 질려서 못 먹겠다 투덜댔으면서 본가에 대한 그리움이 아주 없지는 않았나 보다. 수화기 너머의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먹는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전화기를 멀찍이 두고 조용히 웃었다. 지금까지 무의식이었다 할지라도 분명히 내 얼굴에는 드러났을 것이다. '귀여워'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캬아. 달아. 스즈카, 간보다가 취하지 않았어?」

 "취하지 않았어. 어쩐지 전보다 많이 익숙해졌다."

 「내 옆에 있으니까. 그야 익숙해지지. 예전에도 그랬잖아.」

 "그런 것까지 기억하냐. 먹는 데 방해될 것 같은데 끊을까."

 「아니, 계속 얘기해. 옆에다 놓을게. 먹을 때 조용한 거 싫어.」

 내가 인간들에게 무관심했던 사이, 전화기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희대의 발명품으로 거듭났다. 비단 영상뿐 아니라 음색도 그렇다. 전화기를 가까이 대지 않아도 저쪽에서 우물거리며 먹는 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린다. 심지어 호흡까지. 틈틈이 상상해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만약 지금 그의 맞은편에서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면. 고죠는 다이어트니 식단 조절이니 조잘대면서도 남김 없이 다 먹었다. 배 부르겠다, 기분 좋겠다, 깨끗이 씻는 일만 남았다.

 하의만 입은 채로 양치를 한 뒤 비누칠을 하고 헹구고 타올을 두 장이나 아낌 없이 써서 닦는다. 수면크림도 꼼꼼히 바른다. 어째서 이토록 자세히 알고 있는가. 나는 고죠가 잠들기 전 행하는 모든 과정을 스피커 폰으로 듣고 있었다.

 물론 그러는 동안 나도 몇 번이나 끊어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고죠가 먹으면서, 씻으면서, 할 거 다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나가서 도무지 끊을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다. 결국에는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함께했다.

 "더 분부하실 게 없다면 끊어도 되겠습니까? 사토루 님?"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 일은 내가 잠들면 끝나는 거잖아."

 여기가 고죠 가였어도 내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나 실제 본가에는 보는 눈이 많아 정중한 말투를 사용해야 할 때도 있다. 시간이 흘러 그것마저도 익숙해져서 이제는 존댓말을 쓰면서 딱히 존중한다는 생각도 없다.

 그럼에도 새삼 민망해진 까닭이 비단 낯뜨거운 농지거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인칭(俺様)을 비롯해 고죠의 아랫사람을 대하는 말투가 내 기억에는 아이 것으로 남아 있는데 중후한 목소리로 들으니 같은 대사도 다르게 들렸다.

 나는 차분한 마음으로 고죠에게 물었다. 이런 내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할지언정 이번에야말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태연한 얼굴로 일을 제안해 올 줄은 몰랐다.

 "내가 그 자리에서 죽을 각오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네 생각에 변함이 없다는 것에 놀랐다. 좀 소름끼치기도 하고."

 고죠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너를 만나기 한 시간 전 보고를 받았어. 그야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지. 기가 막혀서. 솔직히 화도 났지만 어쩌겠어. 한편으로는 머리가 차갑게 식어서 냉정해질 수 있었어. 그리고 너에 대해 전에는 하지 않았던 생각을 해 봤어.」

 "스승과 제자로 지낼 수 있다는 생각 말이냐. 그러면서 왜 내 제안을 받아들였던 거냐. 데이트 말이야."

 「이미 품어서는 안 될 마음을 품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해. 내가 몹쓸 인간이지.」

 서로의 한숨 소리를 듣고, 나는 냉장고 안쪽에 숨겨 두었던 음료를 꺼냈다. 물론 술이었다. 술이 필요했다.

 "참, 유지한테 솔직하게 털어놨다. 좀 더 일찍 알리지 않아 미안하다. 네가 기숙사로 찾아왔던 그날밤 유지가 물었다. 너와 무슨 사이인지, 언제부터였는지, 앞으로 어쩔 셈인지도. 내 어쭙잖은 말주변으로 달래거나 타이를 필요도 없었지."

 「세상에⋯⋯ 그래서, 어디까지 알게 됐어? 예전에 너랑 나랑 그랬다는 것도 알아?」

 "야, 인마. 그걸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해? 고등학생인데 그 정도는 말 안 해도 알겠지!"

 「아, 아는 거야? 그 애들도? 와⋯⋯.」

 "웃기고 앉았네!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

 당시 대화 자체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돌려 말하기도 했고 유지에게 제대로 전해졌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더구나 고죠와 내가 어울릴 무렵에는 고죠도 유지 또래였으니 어쩌면 유지는 순수한 교제였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나는 과거에 고등학생도 아닌 도련님에게 잡아먹혔다. 고전에 입학하기도 전이었다.

 그런 고죠이지만 넉살떨고 있어도 지금 느끼고 있는 부끄러움은 진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그도 어쩐지 제자들과 관련되면 어리숙해 보인다. 반은 거짓이고 반은 진실이다. 안쓰럽기도 하고 조금은 귀엽기도 하다.

 취침등을 켜면 방이 아늑하게 느껴지고 서서히 졸음이 밀려 온다. 나도 자신의 침대에 누워 이불을 어깨까지 덮었다. 지친 몸을 위로하는 편안함과 허전한 마음을 채워 주는 그리운 목소리가 기억 속 부드러운 손길처럼 나를 어루만졌다.

 "그러니까 일의 문제가 아니라 집의 넓이다. 너 혼자 사는데 왜 그렇게 넓은 집이 필요한 거냐. 당분간은 계속 독신일 거잖아. 아무튼 특별히 편의를 봐 줄 건 없다. 신경 쓰이는 건 남아 있는 한 가지 부탁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언제 얘기할 거냐."

 고죠의 집이 넓은 이유. 거기에 대해서는 고죠가 얘기하고 싶지 않다면 나도 다시 묻지 않을 생각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 집에서 무언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봤다. 선반에 놓아 둔 것으로 보아 딱히 숨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만. 어찌 보면 나와도 연관 있는 물건이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고죠가 쓰기에는 너무 작아 보였다고만 해 두자.

 두번째 주제로 넘어가서, 나는 아직 고죠에게 지난날 언급했던 부탁에 대해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했다. 처음에는 고죠가 마땅히 생각해 둔 게 없어 일단 약속을 받아 두려고 꺼낸 말인가도 싶었으나 어째선지 그 부분의 이야기는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 지난 뒤에는 일부러 나에게 조바심을 느끼게 하려는 것일 수도,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겠다 했지만 돌이켜보니 터무니없는 부탁이었으므로 말하길 주저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전자라면 모를까, 후자라면 그렇다. 신경 쓰인다. 고죠는 베개 또는 이불에 얼굴을 반쯤 묻은 채 새근거릴 뿐이었다. 그는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차분한 숨소리와 함께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나지막이 말했다.

 「지난번에 잠깐 얘기했지. 우리 가문의 비즈니스에 대해.」

 "그랬지."

 「너한테만은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 뒤에도 상대방 쪽에서 사람이 몇 번 찾아왔어. 사실, 이번이 딱히 처음도 아니야. 나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른 가문의 여자들과 엮이게 될 거야.」

 "응."

 「응이라니⋯⋯ 하하하. 아, 그래서 그 부탁 말인데. 심술궂은 생각 안 해. 나한테 남은 방법이 이것뿐이라서. 마침 너한테 맡기기 딱 좋달까,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렇게만 알고 있어. 걱정 마. 오히려 재미있을지도 몰라.」

 재미만 있다면야. 나는 마지못해 웃었다. 불현듯 어린 고죠와 본가를 휩쓸고 다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작은 문제라도 일으키지 않으면 지독한 따분함을 견뎌낼 도리가 없었기에 나도 녀석과 어울리는 것에 꽤 진심이었다.

 "사토루."

 별로 원망하지 않으니까 고민하지 마라. 그렇게 머릿속으로 정리한 뒤 자신에게 확인받듯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으로 그쳤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음을 안다. 그래도 아직은 말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아니다. 목소리가 졸린 것 같은데. 그만 자는 게 어떠냐."

 「아직 끊으면 안 돼. 주술의 전성기 시대 고죠 당주님 이야기 해 줘.」

 "네, 네. 당주님의 명령대로. 눈을 감아라. 듣고 나면 바로 자야 한다."

 어떤 일화가 좋을까. 이제는 흐릿한 과거 속에서 부끄러운 기억을 전부 걸러내고 나면 사실상 이야깃거리가 많지는 않다. 고르고 또 골라 이야기를 시작한다. 호흡을 길게 늘어뜨리며 뜸을 들이고 들려 오는 숨소리에 귀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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