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 무려 10 년 만에 고죠 가의 문턱을 넘었다. 여기서 주말을 보낼 것이다. 내 방은 10 년 전 그대로였다. 가구며 물건이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깨끗했다. 나는 방에 들자 마자 이불을 펴고 잠들었다. 아침에는 안잠자기(어멈, 할망구)가 가져온 밥을 부지런히 먹고 마침내 영감탱이를 보러 갔다. 당주님조차 거스르지 못하는 집안 어른이건 뭐건 나한테는 그저 영감탱이일 뿐이다. 내가 네놈들 조상님과도 야 너 했던 사이인데 어쩔 테냐.

 이게 다 고죠의 원치 않는 혼인을 미루기 위한 일이다. 장난짓거리다. 그래도 이것밖에 남은 방법이 없다 하니 감히 비웃을 수 없었다. 애초에 시간 끌자고 벌일 만한 수준의 장난이 아닌데 나밖에 할 수 없다는 말은 부정 못한다.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약혼을 하느냐 마느냐. 양극 간에 협의점이 없다. 반쪽짜리 운우지정이든 몸뚱아리만 내놓든 좌우지간 거래는 필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저쪽의 완고한 입장이다. 뱃심 좋게 중재하고 싶어도 답이 없다.

 낯뜨거운 건 둘째치고 답답하다. 분하다. 고죠가 어떻게 영감탱이와 똑같이 말할 수 있냐고 화를 냈던 것과 같은 이유다. 평범하게 말이다. 좀 더 상식적인 이유를 들어 딴죽을 걸었으면 나도 고개 숙이고 얌전히 들었을 것이다. 나이 차이라든가, 사제 관계라든가, 남들의 이목이라든가. 이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런 거 안중에도 없다. 애오라지 당주님 피를 쪽쪽 빨아먹을 생각뿐이니 가만히 듣다 보면 내가 지금 다른 세상에 와 있나 싶을 정도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답답함과 울분을 생생히 기억해낸 지금 고죠가 다시 한 번 내게 도와 달라 지켜 달라 애원한다면 처음과는 사뭇 다르게 들릴 것 같다. 그에게 결혼은 이 지긋지긋한 신경전의 연장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밤새 부슬비가 내렸다. 내 방 뒷마당에도 아담한 정원이 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도린곁을 살뜰히 꾸며 놓았다. 길체 울타리를 따라 소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가지가지. 품을 벌리다 못해 툇마루까지 뻗은 나무도 있다. 분홍 작약은 만개했고 파란 수국은 제 차례를 기다린다. 허리를 달싹쿵 흔들며 이슬을 뿌린다. 세월을 떠받치는 문설주는 수십 수백 년이 우습다. 등불을 두는 돌 기둥 구름송이 같은 이끼도 그때 그 얼굴들이다. 기억은 옅어졌다가도 불현듯 선명해진다. 눈을 감고 들으면, 공기를 마시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심상마저 든다.

 고죠는 본가를 떠나서도 어찌어찌 해 온 모양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돌아와 처리할 일이 많은지 종일 방에서 나올 줄 모른다. 나는 저녁까지 주전부리하고 느긋하게 정원도 거닐고 했다. 밤이 되자 고대 기다렸던 녀석이 나타났다. 문앞에서 허락을 구하는 녀석에게 들어오라 일렀다. 고죠 못지 않은 덩치가 다소곳이 무릎을 모아 앉았다.

 "내가 갑자기 돌아와서 놀라지 않았니."

 "언젠가는 돌아올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녀석도 고죠다. 원수다. 다만 녀석과는 조금 각별한 사연이 있어 더욱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때는 종종 내 무릎을 베개 삼아 잠들 만큼 귀여운 꼬맹이었고, 한때는 내가 품은 생명을 독약과 칼로 무자비하게 해쳤던 놈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원수들과 함께 있다. 끈질긴 회의감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녀석에게 묻고 싶었다.

 누가 시킨 일이었는가. 녀석은 한결같이 누구에게도 지시받은 적 없다 대답했다. 하지만 애송이가 혼자 그런 짓을 벌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때는 사토루도 믿을 수 없었다. 당주님에게는 어찌 보고했냐 물으니 한 가지 거짓말을 했다 털어놨다. 내가 아이를 거부했다. 그리 지껄인 모양이다. 거기까지 듣고 지체없이 물러가라 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을 불러세웠다. 짜증나게 높은 꺽다리 놈 얼굴을 올려다보며 철썩 따귀를 날렸다. 이제 꺼져. 대설 마음도 없는지 녀석은 실소를 지을 뿐이었다. 끝내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사라졌다.

 본가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기모노를 입는 것이 늙은이들에 대한 예의다. 그제야 나는 두터운 오비를 풀었다. 방에서는 유카타가 적당하다. 오늘은 밖에 나갈 일이 더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죠가 내 방으로 사람을 보냈다.

 아름드리 고목을 지날 적마다 짙은 흉터에 한 번씩 손을 대어 본다. 사념에 잠긴 채 걷다 보니 어느새 나들문 앞이다. 나들문을 지나면 당주님께서 생활하시는 공간이다. 여기에 아주 오래된 연못이 있다. 수면에 비치는 것은 이슥한 밤하늘, 매지구름, 휘영청, 처마의 단청, 괘등. 훈풍에 일제히 물결친다. 둔치에 자란 풀바탈 사이 붓꽃이 따라서 선들거린다. 비단잉어는 어룽어룽 수면으로 올라와 던져 준 먹이를 받아먹고 둥글게 물둘레를 그린다.

 "사토루 님. 부르셨습니까."

 고전 시절부터 교사가 된 지금까지 하냥 새까만 옷만 입어서 무슨 곰가죽이라도 들쓴 것처럼 보였는데 새삼 낯설었다. 박음질 없이 만드는 전통 복식은 자연스럽게 어깨 선을 타고 흘러내린다. 기모노는 몸맨두리를 따라 흐르는 그림에 흥이 있고 취도 있다지만 무늬를 넣지 않고 색과 질감으로만 멋을 낸 것도 단아해 보이고 좋다. 얇은 하오리는 푼푼한 맵시로 여러 개의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고 사르락사르락하며 스치는 소리가 몹시 나긋하다.

 "마침내 나한테 왔구나. 고죠 가 최상위 포식자. 호랑이 스즈카 님. 가만히 차례를 기다리자니 너무 무서운 거 있지. 대단해. 돌아오자 마자 늙은 고죠의 기를 꺾어 놓고 젊은 고죠한테는 따귀를 날리고. 내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어."

 나는 뜨끔했다가 맥쩍게 웃었다. 그야 당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셔야 할 필요는 없다고 해도 오늘 내가 특별히 불러들였던 녀석은 어려서부터 당주님을 도와 이런저런 일처리를 해 왔다. 이번 일도 녀석이 보고했을 것이다. 어떤 질문을 받았고 어떤 대답을 했는지. 그럼에도 나는 내심 고죠가 몰랐으면 하고 부지간 이를 외면했다.

 "이리 와. 가서 앉자."

 고죠는 내 손을 잡고 정각으로 이끌었다.

 정각은 수차례의 중축을 거쳐 전통 양식의 틀만 유지하고 있을 뿐 군데군데 외풍을 띠었다. 마루를 허물고, 다탁도 치우고, 테이블과 소파가 놓였다. 사실상 내 방을 제외한 모든 곳이 적어도 이 정각만큼은 달라졌다. 아직도 등불에 바라지창이면 그것도 우습기야 하겠다만은 그야말로 옛날에 바다 건너 온 값비싼 골동품들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테이블 한편에 놓인 다기들. 저 찻잔을 실수로 깨뜨리기라도 했다가는 틀림없이 어멈의 대노를 사게 될 것이다. 내가 예전에 깨먹은 것만 해도 헤아릴 수 없으니 웬만하면 손대지 않고 보기만 하는 게 좋다.

 소파에 앉은 고죠가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피로한 듯이 떨리는 하얀 속눈썹 그리고 쓴웃음이 보였다.

 "당주님의 일은 잘 되어 가고 있습니까."

 "응. 급한 일은 전부 끝냈어. 겨우 학교를 벗어났는데 너랑 느긋하게 얘기할 기회도 없었네. 본가에 올 때마다 녹초가 되는 것 같아. 그래도 이번에는 네가 있어서 무지 든든해. 게다가 여기에서는 선생님도 제자도 없잖아. 그게 무엇보다도 좋아. 정말. 너무 좋다. 그래서, 어땠어. 이제는 너한테서 듣고 싶어. 조금만 더 들려 주면 안 될까."

 내 허리를 끌어안고, 흔들고, 콧소리에, 으응 애교도 부리니 이걸 선생으로 볼래야 볼 수가 없다. 웃음밖에 안 나온다. 귀엽게 봐 드려야지 어쩌랴. 그래 맘껏 응석부려. 너를 위해 돌아온 거니까. 낯뜨겁긴 하나 차마 말릴 수는 없었다. 아이처럼 무릎에 앉아서는 마지못해 안겼다.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편안했다.

 "글쎄요. 예전만큼 귀엽지는 않더군요. 하지만 가문을 위해 그리고 당주님을 위해 목숨도 바칠 녀석입니다."

 과거에 나는 진실을 알려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의심만 가득했다. 고죠 놈들을 불신하는 것과 별개로 어쩌면 녀석의 말은 거짓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꾸민 일이건, 압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행한 일이건. 이미 수백 년 동안 나를 주물러 온 놈들이다. 사토루가 막았다면 나는 아무것도 못했을 거다. 아무래도 좋다. 그것이 사토루의 바람이었다 해도. 하물며 그가 지시했다 해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 갈 수 있다. 다만 한 번쯤은.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네게 묻고 싶다. 만약 예를 들어서 말이야. 녀석이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행동한다면.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네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잃게 된다면. 어쩔 테냐. 그래도 녀석을 계속 네 곁에 둘 수 있겠냐."

 고죠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짧게 회상하듯이 초점을 흐렸다. 그의 웃음소리 끝에 미처 욱여넣지 못한 거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손은 내 팔을 그러쥔 채 조용히 의지하고 있었다. 소파에 기대어서 쉬고 있는데도 호흡이 조금 빨랐다. 그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는 것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분해서건 두려워서건 지금 그런 기분이 드는 까닭은 모두 지나간 일 때문이다. 이미 갈 곳 잃은 감정이다. 그는 시선을 목전에 둔 채 대답했다.

 "본가를 떠난 이상 녀석이 없으면 곤란하거든. 미안해. 도망쳐서. 당주로서 나는 강해질 수 없었어. 계속 도망치다 보니 이렇게 약해졌어. 그러니까 지금은 네가 나한테 믿음이 가지 않는다 말해도 이해할 수 있어. 어차피 우리는 줄곧 그랬잖아. 너는 나를 의심하고 나는 너를 의심하고. 나라고 전혀 원망하지 않았던 건 아니야. 어쨌거나 그런 것들은 그만 멈춰야겠지. 이렇게 계속 피하기만 할 게 아니라 그동안 서로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슬슬 꺼낼 때가 됐다고 생각해. 천천히 하나 씩. 한숨 돌리고 나서 준비가 되면 다시 얘기하자. 그리고 오늘은⋯⋯ 너한테 가장 익숙하고 편한 우리 모습을 상상해 봐. 그렇게 나를 봐 줘. 여기서만은 너도 그냥 내 스즈카야."

 고죠에 비하면 우습도록 작아서 어쩐지 나도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미 내 몸을 단단히 붙잡아 두고도 저에게 밀착시켰다. 원래 이렇지 않은데. 도리어 당황한 나는 슬금슬금 내뺐다. 가벼운 입맞춤이 뺨에서 입술로, 턱, 목, 어깨. 점점 묘해졌다. 너무도 감흡할 따름이라 내가 먼저 그만하라고 말려야 했다. 한데 갈수록 대담해진다. 밖이라서 부끄럽다든가 함부로덤부로 알아듣고 대뜸 들어가겠냐 묻는 녀석이다.

 "오늘은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 거냐."

 "안 해."

 "어째서."

 "말하기 싫으니까. 뭣하면 네가 하지 그래."

 "내가 할 수 있을 리⋯⋯ 너무하는 거 아니냐."

 "그렇게 너를 거절하면서 나는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아? 네 얼굴에 실망감이 비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내가 고죠를 만지려 하면 으레 듣게 되는 말이다. 안기고 싶을 때. 단지 기대고 싶을 때도. 그의 대답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뭘 해 보기도 전에 어지간해서는 안 돼 한마디에 막힌다. 물론 실망스럽지만 나는 안심하기도 한다. 어차피 거절당할 거라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더는 바랄 수 없고 멈출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발끝서부터 소름이 쪽 올랐다. 여기서는 선생님도 제자도 없다고. 너무 좋다고. 물론 나도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덮쳐도 된다는 법이 있나. 일부러인지 무의식인지 넙적다리를 기어오르는 손길에 놀라 퍼들껑 튀어올랐다. 엉큼한 짓도 어찌 보면 내가 바라던 바인데 단지 안전선을 넘었다는 이유만으로 위기감이 들 줄은 몰랐다.

 과거의 나는 이쯤에서 거의 포기하곤 했다. 팔다리는 짧고 손발은 작다. 하찮은 발악이다. 이대로 꿀꺽. 죽을 수도 없다. 아무렴 발톱 가진 짐승이나 다름없는 애송이에 비할 게 되겠냐만은. 모난 곳 없이 멘지락해도 힘은 그대로다. 웬 구렁이 한마리가 허리를 감은 것 같다. 일어나려 하면 숨이 막혀라 조여든다. 그러다 번쩍 들렸다. 뭐 하는 거야. 어쩌려고 이래. 머릿속만 어지러울 뿐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부추김과 다름없는 가냘픈 목소리였다.

 고죠가 나를 테이블에 눕혔다. 거기서 내 위기감은 절정에 치닫았다. 나는 이제 어찌 되어도 좋으니 저번처럼 코피가 왈칵 쏟아지지나 않았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발버둥치기도 힘들어서 다시 덮쳐질 때는 얌전히 있었다. 그러나 욕심부리고 버텨 봤자 괴로워질 뿐이다. 내일은 학교로 돌아가야 하니까. 우는 시늉까지 해 가며 소리 질렀다.

 "안 돼! 내가 안 돼! 떨어져라! 당주님! 선생님! 악!"

 "치사하게⋯⋯ 어어. 그만하자. 너도 하지 마, 그거."

 그나마 이성이 남아 있을 때 멈춰야지 어떡해 그럼. 너야말로 내가 미치는 꼴을 보고 싶냐 따지려다가 참았다. 고죠는 멀끔한데 내 꼬라지는 말도 안 나온다. 자국이 남지는 않았겠지. 어쩐지 고죠가 시선을 피하는 것 같다. 기껏 주물러 놓고 이런 꼴은 차마 못 보겠나 보다. 나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휘청 하면서 누굴 놀릴 입장이 못 된다.

 "밤이 늦었습니다. 오늘 제가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없는 듯합니다만. 그만 제 방으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내일 일찍 일어나서 약 끓이고 시중들어야 해서요. 사토루 님도 주무세요. 좋은 꿈 꾸시고요. 그럼 저는 갑니다."

 "가지 말라면 안 갈 거야? 같이 들어가서 손만 잡고 잘까? 내일 쉬는 날이니까 좋은 꿈 꾸다 천천히 나와도 돼.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어. 무서워서 어디 말이나 꺼낼 수 있겠어. 당주님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스즈카 님인데."

 걷다가 뒤돌아보니 고죠가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어쩐지 지는 것 같아서 나도 그에게 한마디 해 줬다.

 "참지 못 하게 되면 다시 오마."

 설마하니 전략을 바꾸기로 한 건가. 어떤 전략이든 간에 나와의 육체 관계를 피하기 위한 빌어먹을 작전임은 분명하다. 매번 거절하는 쪽은 고죠였지만 꼭 그가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내가 포기할 때까지 기다려도 된다.

 인간들에게는 사정이 있다. 언제나. 죽을 때까지. 한 순간도 그 놈의 사정이라는 놈에게서 벗어나질 못한다.

 고죠도 제 할아비와 다를 것이 없다. 언젠가는 자식이 생길 테고, 그리 되면 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거다.

 한참을 뒤척이던 나는 결국 방에서 뛰쳐나왔다. 본가에는 좋은 술이 많다. 달도 밝겠다 아무 데나 걸터앉아 마셨다. 왜 이리 취기가 도는지. 바람이나 좀 더 쐬고 들어가려 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그럼 가 볼까. 요바이하러.

 미끄덩.

 앉으려 했는데. 자빠졌다. 그래도 쿨쿨 잔다. 잘 때는 육안이고 뭐고 소용없다. 너는 호랑이 온 줄도 모르냐. 먹음직스럽구나. 계집애들이 탐을 낼 만한 얼굴에다 밤일도 썩 잘한다. 행동거지는 천박해 보일 때가 있지만 비싼 몸이시다. 가만히 있어도 아쉬운 놈들이 알아서 계집을 데려온다. 거절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알 게 뭐람.

 한입에 삼켜 버리기에는 아까우니까 입맞춤부터 했다. 일어나지 말아라. 계속 자고 있어라. 그럴수록 허기가 져서 점점 깨물고 핥았다. 이상하리 만큼 둔하다 싶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깼다. 다 알고도 얌전히 내게 먹혔던 거다.

 "이거 꿈이지."

 "예, 꿈입니다."

 자는 척이라도 하고 있어. 뺨, 목, 어깨. 귀에도 입맞췄다. 귀는 억울하겠지만 어쨌든 했다. 적어도 내가 당한 만큼은 돌려줘야 하는데. 고죠가 내 얼굴을 끌어올렸다. 뭐야. 겁부터 집어먹었다.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러나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사슴같은 눈망울을 하고.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꾸벅꾸벅 조는 내게 그가 물었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그냥 적당히 마셨습니다."

 "아휴, 술 냄새. 저리 가. 뽀뽀하기 싫어. 그럼 그렇지. 꿈과 현실은 달라."

 "어떤 꿈을 꾸셨습니까. 제가 더 재밌게 해 드리지요. 사랑합니다, 당주님."

 고죠가 집게손가락으로 코를 막고 맹맹한 소리로 궁시렁거린다. 뭐라는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술이라면 질색했던 기억이 날 뿐이다. 똑같은 행패를 이미 몇 번인가 당했지만.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맨정신일 때⋯⋯ 만지지 마."

 "사토루 너는 내가 술을 마시는 게 그렇게 싫으냐."

 "싫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음날 기억도 못하잖아."

 "내가 뭐라고 했더라. 벌써 잊어버렸다. 못 들은 걸로 해라."

 눈앞에서 알짱대는 손에도 한 번. 쪽. 그리고 이불 속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갔다. 머리가 아찔하더니 그대로 뚝 떨어졌다. 거기가 하필. 그랬다. 거슬리는 옷가지는 다 치워 버렸다. 이 놈도 여전하구만. 오랜만에 마주보며 인사를 나눴다. 그 다음에는 앙 물어 버리면 그만이다. 입은 막혔는데 기침이 나오려 한다. 쿨럭쿨럭. 토할 것 같다.

 "술버릇은 안 변하는구나. 어디까지 하려고. 진짜 이상해질 거 같아 나. 듣고 있지. 적어도 한 번은 뺄 거야."

 하도 기침해서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토해도 좋다. 더 깊숙이 억지로 밀어넣었다. 되는 대로 삼키고 뱉고. 턱에서 아이고 소리가 난다. 이 흉물스러운 물건이 그래도 싫지 않다. 귀여워 죽겠다. 난데없이 이불 속에 등장한 손이 내 머리를 붙잡는다. 넣었다 뺐다. 혼자서도 잘 한다. 기침에 구역질 소리를 내도 한다. 이래서야 숨을 못 쉬겠다.

 손목을 딱 잡고서 멈추게 하면,

 "기분 좋아."

 얼버무린다. 도리어 거리낌이 없다.

 이게 끝나면 만족하려나. 딱히 더 원한다 해도 나무랄 생각 없다. 억지로 세우더라도 예전보다는 쉬울 거다. 나는 저보다 열 살 이상 많은 장년의 여인이었으니까. 퇴색한 외모, 밋밋한 소리, 무엇보다 안은 속일 수 없다. 시시했겠지. 아무렴 어린 게 좋지. 나도 마찬가지다. 내 몸은 아니지만 그때와는 다른 느낌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

 "기분 좋지. 끝까지 할 테냐."

 이 계집애는 입도 어쩜 이리 작은지. 턱이 빠질 것 같다. 다 좋자고 하는 일인데 등골이 서늘해지고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뱉으려 하면 다시 물린다. 끌려간다. 스적스적. 지적지적. 지옥이 따로 없다. 나 죽는다고 웅얼거리며 버르적거렸다. 쿨럭쿨럭. 쿨럭쿨럭. 내가 미쳤지. 얼마나 더 해야 돼. 거반 눈물에 잠겨 숨을 꾹 참고 버텼다.

 "바보⋯⋯ 됐어, 그만해. 괜찮아."

 나는 겨우 머리를 들었다. 욕하고 싶었지만 입에서 침인지 뭔지를 게게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사람을 찌그렁이로 만들어 놓고 그만하긴 뭘 그만해. 더는 다른 생각 못 하게 입이든 손이든 그냥 덤볐다. 머리맡에서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온다. 목으로 짓쳐들어와 왈칵하면서 꼴깍 넘어갔다. 반은 삼키고 반은 토했다.

 마음대로 하게 두었더니 고죠가 나를 이불 밖으로 끌어냈다. 덮치려는 줄 알았는데 그냥 머리를 베개에 올려 준 거였다. 그는 방안의 모든 혼란, 무질서, 뭐든 간에 정리하고 나서 내 얼굴을 닦았다. 대충. 별로 세심하지는 않았다.

 "저질러 버렸어. 결국 이렇게 됐네."

 이 또한 낭만이라면 낭만적인 순간인 것도 같다만 나는 한쪽 눈만 간신히 떴다. 다른 쪽 눈에 뭐가 들어갔다. 목구멍이 더럽게 아프다. 킹킹 쇳소리만 나온다. 내가 뭘 했나. 아님 당했나. 상황 파악이 안 된다.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

 "아침까지 목소리 닿는 곳에 있을게."

 고죠가 속삭이더니 이마에 키스해 주고 일어났다. 아니, 그러니까. 내 목소리가. 이 놈아. 그래 가라. 상냥하게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면서 들입다 박은 것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 정도 화풀이는 할 수 있다 치고 일단 잠을 좀 자야겠다. 교실에서 만날 때쯤에는 불긋불긋한 자국이 흐릿해지길 바라며, 나는 기절낙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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