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생이라는 터무니없는 처지에 놓여 지금 고전에서 겪고 있는 대부분의 일들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종종 위태로운 순간이 나를 찾아온다. 몇 개인가 악조건이 겹쳐 버린 오늘은 더욱 그렇다. 아침부터 끔찍한 컨디션에 뜨거운 날씨. 무엇보다 짜증나는 점은 지금부터 컴퓨터를 다루는 수업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의 고약한 취향으로 탄생한 물건 따위 알고 싶은 마음도 없고 대부분 휴대전화기처럼 반강제로 접하게 됐다.

 고전은 학교라는 명목 하에 잡다한 지식을 애들에게 가르치는데 모든 수업에 전담 교사를 배치하긴 어렵다. 인력이 부족하고 외부인이 드나들기도 까다로운 환경인 탓이다. 주술사가 귀한 시대이니 교직자는 말할 것도 없다. 고죠는 교직자가 아니라 해도 고전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고 그에게 떨어지는 수많은 임무들만으로도 바빠서 계속 학교에 붙어 있을 수 없다. 가르치는 것은 교사의 본분이건만 그의 수행비서에게 수업까지 대신 맡겨야 하는 형편이다.

 "안녕하세요. 1 학년 여러분. 일일 교사를 맡게 된 이지치 키요타카입니다."

 이지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이런 상황이 좋을 리 없지만 제 나름대로는 고죠의 대리인이라는 책임감을 가진 듯하고 한편으로는 자신도 있어 보였다. 수행비서로 일하면서 익숙해진 것이 비단 교사를 상대하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꼬맹이를 다루어 왔던 경력이 있고 본인도 조금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기본적인 사무 역량을 갖추는 것 또한 소홀히 할 수 없으므로 오늘은 오피스 프로그램을 다룰 겁니다. 오피스란⋯⋯."

 "서론이 길다. 본론부터 시작해."

 "파워포인트와 엑셀을 간단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부족한 몸으로 여러분의 앞에 서는 게 상당히 떨립니다만, 부디 질문이 있다면 손을 들고⋯⋯."

 "그만 됐으니까 진행해. 빌어먹을 교실이 덥단 말이다."

 "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파워 포인트입니다."

 여름이니 뙤약볕은 둘째쳐도 기계에서 나오는 열 때문에 손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그러나 이지치가 눈치를 보는 것처럼 내가 고전에 있는 한 내게는 벗어날 수 없는 그늘이 있다. 그럴 리 없는데도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 같다.

 딸각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멍해진다. 지난날 내 그릇이 사무원으로 일하는 동안 매일같이 똑같은 광경을 봤다. 가끔이었지만 나도 기본적인 것들을 배워서 일을 도왔고 그럴 필요가 없을 때는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퇴근은 아직이냐.'

 '아직이야. 언제나 일하는 건 나인데 어째서 스즈카가 나보다 먼저 퇴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거야. 회사에서도 조금 더 너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스즈카도 컴퓨터 만큼은 진지하게 배워 두지 않으면 안 돼.'

 '웃기지 마. 내가 왜.'

 '하기사,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 내가 쓰러져서 스즈카에게 발표를 부탁했을 때는 정말로 짤리는 줄 알았어. 컨디션이 나빴을 뿐이라고 유야무야 넘겼지만 부장님한테 찍혀서 고생했으니까. 스즈카는 지금 이대로가 좋을지도 몰라.'

 나의 존재. 정체성. 욕구. 그밖의 모든 것을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 그대로면 돼. 내게 그렇게 말해 준 몇 안 되는 인간이었다. 물론 그녀와 수십 년을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저 다루기 쉬웠달까. 이제 와 드는 생각이지만 내 처지도 썩 나쁘지 않았다. 에게 그녀와 닮은 구석이 많아 솔직히 안심했다.

 "엑셀은 복잡한 연산 과정을 버튼과 같은 비주얼 기능으로 만들어 작업 시간을 줄이고 아주 편리한 인터페이스로 방대한 자료를 수월하게 관리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기에 크게 와 닿지 않지만 디지털 세계에서는 찰나의 순간 우주의 흐름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답니다. 1 초! 마이크로 초! 나노 초 안에! 정말 놀랍지 않습니⋯⋯."

 "다음."

 "수식을 입력하고 엔터를 누르면, 짠! 원하는 값을 얻으셨나요? 엑셀은 이처럼 다양한 함수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 함수를 조합해 매크로 버튼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아, 이제 곧 쉬는 시간이군요. 하지만 내친김에 매크로까지⋯⋯."

 "아니, 쉬게 해 줘."

 쉬는 시간에 조금 자 둘 생각이었는데 어쩐지 잠들 수 없었다. 별 수 없이 창밖의 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수업은 계속 이어졌다.

 "마지막 시간에는 오늘 배운 것들을 정리할 겸 예시를 보여 드릴 거예요. 먼저 제가 만든 프레젠테이션입니다. 클릭하면 첫 번째 슬라이드가 나옵니다. 그리고 또 클릭하면 두 번째 슬라이드가 나오겠죠? 이렇게⋯⋯ 어? 어라?"

 휘리릭. 뿅. 뾰로롱. 띠용.

 이지치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그의 프레젠테이션을 조금 손봤다. 그냥 객체 몇 개에 애니메이션 효과를 넣었다. 진행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두 번째 슬라이드로 넘어가야만 하는 이지치와 무조건 입력한 만큼 결과를 내는 파워포인트 간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손가락이 저릴 만큼 하나하나 시간 조절까지 해서 세심하게 넣어 주었으니까.

 "누, 누구입니까. 이런 장난을 치면 곤란해요."

 뜬금없이 승부욕이 타올라 마우스를 클릭하던 이지치가 결국 패배를 인정. 두 번째 슬라이드부터 시작하기를 택했다.

 "여러분 집중하세요. 엑셀 예제입니다. 오늘 배운 것 외에도 활용도 높은 여러 기능들이 많아 넣어 보았어요. 여러분에게는 아직 어려울 수도 있지만⋯⋯ 어어? 대체 누굽니까! 멋대로 함수를 바꿔 놓은 게! 게다가 전부 정확해! 훌륭해!"

 겨우 이 정도로 놀라긴. 어떻게 입력하든 결과가 무조건 지루한 표정의 이모티콘으로 나오게 했다. 실무에서 사용하는 중상급 기능은 잘 모르지만 앞서 배운 기초적인 것 정도는 안다. 이런 장난도 오늘이 처음이라고는 차마 말 못하겠다.

 '스즈카지? 내 프레젠테이션 바꿔 놓은 사람! 그렇게 중요한 자료는 아니지만 이런 장난은 치지 마.'

 '나를 마음대로 부려먹은 벌이다. 애초에 내게 사무원이 되는 게 어떠냐는 둥 헛소리를 하니 그렇지.'

 '스즈카가 더는 훈련 감독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그래서 고죠 군이 다른 방법을 알려 준 거야. 컴퓨터를 제대로 다룰 줄 알면 수행비서로 일해도 좋다고 했어. 게다가 고전에서 계속 일할 수 있다면 내가 없어도 안심이야.'

 '너야말로 내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주제 건방지다. 승급하고 싶다며. 네게도 야망이 있다면 한눈팔지 마라. 내 편의 따위를 생각할 틈이 있냐. 잔소리 그만하고 일이나 빨리 끝내. 퇴근할 때까지 얌전히 있을 테니까⋯⋯.'

 그때도 고죠는 지금과 다를 게 없었다. 쓸데없는 참견이랄까, 어떤 의미에서는 구속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로부터 벗어났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여차하면 몸을 웅크리고 무시할 수도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릇이 원하면 나는 거부할 수가 없다. 그녀는 건방지게도 고죠를 내 보호자쯤으로 여겼다. 특히, 자기가 없을 때의. 그래서였을 것이다. 고죠가 나를 심하게 부려먹거나 말거나 모든 것을 나에 대한 보살핌으로 훌륭하게 포장해 주었다.

 "와, 무서워. 왜 저기서 지켜보는 거야, 고죠 쌤은."

 누군가의 장난이라 믿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그가 복도에서 교실을⋯⋯ 아니, 정확하게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이지치 씨 떨고 있어⋯⋯ 스즈카 쌤도 괜찮아요?"

 우연일까.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설마, 내 장난으로 이지치가 곤란해진 상황을 처음부터 전부 지켜봤던 것은 아니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죠의 눈은 속일 수 없다. 유리창 너머의 그가 가볍게 주먹을 쥐어 보이며 내게 경고를 보냈다.

 "이것으로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수업 땡 하자 마자 고죠가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공포의 인 마이 오피스. 예전에 그릇이 회사에서 당하는 걸 몇 번인가 봤다. 지나친 걱정일 때도 있지만 대체로 좋은 이유 따위는 없기에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조용히 뒤를 따랐다.

 똑똑.

 노크하는 즉시 들어와도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고죠는 나를 소파에 앉게 한 뒤 한동안 일을 계속했다.

 "기다리게 했네."

 고죠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티백으로 간단히 차를 준비했다. 그가 드물게 안대를 벗고 있을 때는 눈을 마주치기가 어렵다. 평상시에도 그다지 얼굴 쪽으로 시선이 향할 일은 없지만 눈동자가 차가운 색이라서 더 그런 것 같다.

 "왜 이렇게 긴장했어. 혼내려고 부른 거 아니야. 그냥 지난번에는 내가 바빴잖아. 차나 마시려고."

 "우이씨, 처음부터 그렇게 말할 것이지. 잘 마시마. 이건⋯⋯ 우롱차냐. 맛이 깊은데. 너도 마셔라."

 "응, 내 차는 네가 타."

 소파에 늘어지는 고죠를 보며 콧방귀를 뀌고는 마지못해 차를 내주었다. 피곤해서인지 테이블 한편에 놓인 과자를 무심코 쳐다보았는데 고죠가 내 앞으로 과자가 든 박스를 밀어 주었다. 잠깐 망설이다 호기롭게 털어넣었다. 단맛에 조예가 깊은 녀석인 만큼 달면서도 썩 훌륭하다. 과연 먹을 만했으나 내 입에는 역시 쓴맛이 조금 필요했다.

 나는 차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내 그릇의 컨디션을 고려했을 때 훈련 감독으로서 계속 일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할 수만 있다면 귀찮음을 감수하고서라도 조금이나마 몸에 부담이 덜 가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헤헤헤⋯⋯ 저어, 고죠."

 "또 무슨 말을 할려고 그래."

 "나는 그러니까 아직 말도 안 했잖아. 왜 인상부터 쓰고 봐. 그러다 그 잘생긴 얼굴에 주름 생길라. 아니, 그냥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저기, 만약에. 내가 지금부터 열심히 공부하면 언젠가 훈련 감독을 안 하게 될 수도 있을까."

 "그럴 생각은 있고?"

 이럴 바엔 처음부터 확실히 말해 둘 걸 그랬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쉬이 받아들여졌을지는 알 수 없다. 애초에 내가 유지의 훈련을 맡은 것도 그동안 열심히 일한 덕분이다. 결국 이 고생길의 마지막은 개인 수행비서였나 보다.

 "어차피 성인이 되기 전에는 운전 못하니까. 그때까지 시간 많잖아. 그밖에 할일도 없고⋯⋯ 공부나 하지 뭐."

 "하하하. 기특해. 이제야 좀 제대로 할 마음이 생겼나 보네. 그래, 까짓것. 훈련 감독 안 해도 돼. 수행 비서도 나름 괜찮지. 네가 공부하겠다는데 무슨 일인들 못 해 주겠어.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계속 그대로. 착하게만 있어."

 합의가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괜한 걱정이었을까. 한편으로는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어떤 조건도 없이 하다못해 약올리지도 않고 끝나다니. 그래도 한입으로 두 말하는 놈은 아니니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도망다니는 것은 그것대로 피곤하고 이 꼬맹이와 고등학생으로 사는 게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면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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