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후 내 방으로 돌아가도 할일은 얼마든지 있다. 일단 점잖게 숙제부터 끝내 놓을까 하고 앉았으나 책을 집어삼킬 듯이 쳐다봐도 머리를 잡아뜯어도 문제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공연히 답답함만 늘 뿐이므로 치워 버렸다. 어떻게 하면 답답함이 사라지는지 내가 답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오늘은 쇼코가 일하는 곳에 무작정 들이닥쳤다. 조용히 차만 마시고 일어나자니 조금 아쉽지 아니한가. 그래서 지금 그녀의 책상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쇼코, 고죠는 요즘 어떠하냐. 뭐 들은 거 없냐."

 "이미 얘기했잖아. 나는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어."

 딴에는 이제야 묻는 것인데 설마 일전의 그게 다였나. 그래도 계속 졸라대면 뭐가 나오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고죠나 좋아할 법한 과자 꾸러미가 책상 한편에 뿌듯이 놓여 있기에 이참에 하나 까 먹었다.

 고죠와 쇼코가 어떻게 지내 왔는지. 지금은 어떤 관계인지. 나는 잘 모른다. 어릴 때 어울려 놀았으니 여전히 그러려니 할 뿐이다. 게토가 없는 허전함을 지울 수는 없다. 그래도 남은 둘 사이에 남모르게 통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있잖아, 스즈카. 떨어져 있을 때는 그렇다 쳐도 너는 지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걔랑 만날 수 있어. 그런데도 궁금해서 안달이 날 정도면 차라리 걔한테 딱 붙어서 떨어지지 마. 하루종일. 그래야만 네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는 어때. 너도 안심할 수 있겠냐."

 "맙소사⋯⋯ 너희가 한때는 살벌하게 싸웠다는 거 알아. 여자 문제, 남자 문제로.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아무튼 간에. 걔가 철없던 시절에 불특정다수의 여자와 관계하는 쓰레기였다고 해서 나까지 걔랑 엮일 이유는 없잖아."

 눈밑이 어둡긴 해도 사내 못지 않게 씩씩하구나. 말을 할 때는 더욱 거침없다. 그런 부분이 시원스럽고 좋다. 딱히 뭔 일이 있었다 해도 상관없고 진지하게 둘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면야 뒤로 물러나서 응원해 줄 마음도 있는데.

 나는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10 년이다. 그 공백이 어디 쉽게 메꿔지겠냐. 예전처럼 장난을 치면서도 서로 터놓고 얘기하는 건 쉽지 않아. 대놓고 찾아가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만. 나도 모르게 너무 깊게 파고들어서 도리어 관계를 망칠까 두렵다."

 "내가 볼 때, 고죠는 너한테 숨기는 거 없어. 이번에는 대놓고 티를 내는 것 같던데.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야. 어쩐지, 갑자기 술을 잘도 마시더라. 꼼짝없이 앉아 대신 불평을 들어야 했어. 기다려도 전화가 안 온다는 둥, 그러면서 나나미랑 몰래 저녁 먹으러 갔다는 둥, 자기보다 메구미랑 유지를 좋아한다는 둥. 이게 말이 되냐는 둥."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반성해야겠지. 근데 고죠가 싱글생글 웃으면서 여자 후리고 다니는 게 어제 오늘 일이냐. 그래, 전화하라는 말을 몇 번 듣긴 했다. 나나미랑 밥 먹은 적도 있다. 메구미야 어릴 때부터 봤고 유지는 내가 가르치는 중이잖아. 도대체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야. 그렇다고 술을 푸다니. 마실 줄도 모르면서 탈나면 어쩌려고."

 하다하다 고죠가 탈나는 것까지 걱정하는 나를 보고 쇼코는 결국 일을 손에서 놓았다. 의자 등받이에 드러눕는다. 이것들을 무시해 버릴 수도 없고. 양쪽으로 시달리느라 지쳤다. 조금 쉬고 싶은지 그녀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머니를 뒤적인다. 뭐가 나오려나. 자기 전화기를 꺼내든다.

 "뭣하면 걔 술주정 부리는 거라도 보여 줄까."

 "이 녀석, 그걸 또 찍었구나. 얼마나 취했길래."

 "찍을 만했거든. 네가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일걸."

 쇼코가 내게 전화기를 넘겼다. 그냥 주지는 않았다. 애초에 여럿이서 마시러 갔으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먼저 일어났으며 고죠와 내가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다, 이렇게 딱 잘라 말했다. 꼬투리 잡을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뜻이다. 또 고죠가 저에게는 무슨 말을 들어도 능청스럽지만 너는 이제부터라도 말을 가려서 해라 충고도 해 주었다.

 「정말로 취했구나, 고죠. 네가 그렇게 마셔댈 줄은 몰랐어. 나는 분명히 말렸으니까 나중에 내 탓 하지 마.」

 「누가 취했다 그래. 이거 말이야. 처음에는 이상하더니 마실수록 괜찮아지는 거 있지. 달고 맛있어. 한 잔 더.」

 확실히 둘이서만 즐겼다기에는 화려하게 벌였다. 술병 술잔 빈 그릇 가뜩이나 좁은 테이블 위에 덩치 큰 놈이 엎어졌다. 얼굴은 새빨갛고 눈은 풀렸고 혼자서 병도 못 들 만큼 곤드레만드레인데 쇼코가 한손으로 덤덤하게 술을 따라 준다. 고죠도 술은 이길 도리가 없다. 취해서는 정말 무서울 게 하나도 없나 보다. 마시고 조르고 또 마신다. 쇼코가 볼을 꽉 꼬집어도 저항하지 못하고 앙탈만 부리더니 술잔에 대고 쟤가 나 꼬집었다 일러 준다. 그러다 술잔을 위한 자장가를 부른다. 그 놈이야 그냥 거기 있을 뿐이니 딴에는 무안했는지 화내며 따지기까지 한다.

 「너어, 듣고 있는 거지. 사토루는 아무한테나 노래 불러 주지 않아. 지금까지, 절대, 누구를 위해서도⋯⋯ 아, 부른 적 있었어. 한 번뿐이지만. 그러니까 이걸로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이겠네. 하하하. 들어 줘. 잘 자라아. 웁! 우웁!」

 「차라리 마셔. 그래. 쭉. 제법이네. 마시고 닥쳐라. 마지막 세레나데는 혹시 모르니까 킵 해 놓으라고.」

 「컥! 컥! 이렇게 마시게 하면 어떡해! 못 마시는 거 알면서! 기분이 이상해. 어떡해. 눈물 날 거 같아.」

 「이번에는 또 뭐야. 부탁이니까 울지 마. 쓰러져도 곤란하지만 우는 게 어떤 의미에서는 제일 무섭거든.」

 속상한 일이 있으면 술 먹고 울 수도 있는 거지 왜 그리 모질게 굴었냐. 이런 눈으로 나는 쇼코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래도 그걸 다 받아 줬으니 쇼코는 게토 대신 고죠의 동성 친구 역할도 마다 않는 것이다. 고죠가 쇼코를 아끼는 건 지당한 일이기에 그런 마음을 의심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면 안의 고죠는 쿨쿨 자고 있었다. 아직 남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머잖아 이마를 잡고 신음하며 일어났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겠지만 어쨌든 불편했던 모양이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하얀 녀석이 녹고 녹아 쇼코의 어깨 위에서 조금씩 흘러내린다. 달달한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다. 귀엽긴 한데 이래서는 각도가 안 나온다. 잠투정하는 녀석을 억지로 일으켜 깨워 놓았다. 여기서부터는 이리 될 걸 염두에 두고 찍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고죠의 손이 다시 잔으로 향할 때는 무심코 이 놈아 그만 마셔라 하고 말릴 뻔했다. 잠결에 물인 줄 알았는지 빨간 혓바닥을 내밀며 괴로워하다가 줄줄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심지어 이런 것도 있었다. 메구미랑은 사귄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고죠는 말하면서도 기가 막혀 웃는데 나는 감히 웃을 수 없었다. 거기서는 쇼코도 그럴 리가 있겠냐고 애한테 질투하지 말라고 다그쳤다. 화면을 뚫고 들어가 입을 막고 싶었다. 아니 그러지 마. 울리지 마.

 「적어도 언제까지 네 말을 들어야 하는지 알려 달란 말이다. 나를 고문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라는 거 있지. 이제는 한 달도 안 돼서 집에 가겠다고 야단이야.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내가 잘해 주잖아. 그냥 여기서 지내면 안 돼?」

 「더는 선택사항이 아냐. 스즈카도 이해할 수 있게 얘기하면 돼. 차라리 방금 한 말을 똑같이 해 주는 건 어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오히려 단순할수록 좋아할 거야. 그냥 말해. 걔가 왜 남았으면 하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미쳤어? 싫어! 아니, 내가 먼저 말하긴 싫다고. 그럼 내가 걔한테 매달리는 게 되잖아.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전부 내팽개쳐 버리고 떠난 건 걔였는데, 왜 구차하게 빌어야 돼. 나는 못하니까 네가 해. 그래 줄 거지. 쇼코. 아, 쇼코.」

 「나 좀 내버려 둬.」

 「왜 남았으면 하는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곳에 있음 나도 신경 안 써. 혼자서 무슨 꿍꿍이를 할지 모르니까 내버려둘 수 없는 거야. 어떻게 하고 싶은지. 내가 급료 주는데 당연히 나를 위해 일해야지. 그래도 내 손해야. 걔가 얻는 게 더 많잖아. 그런 곳보다 훨씬 안전하고, 궁상떨지 않아도 되고. 필요한 건 여기 다 있잖아. 그렇게 싫으면 가라 그래. 나도 너 진짜 싫어라고 전해 줘. 꼴 보기 싫어. 가까이 가기 싫어. 만지기 싫어. 다시는 안 볼 거야.」

 고죠의 한마디 한마디가 지난날의 일들을 생생히 떠올리게 하면서 내 가슴을 푹 푹 찔러댔다. 괜히 아플까.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나는 그야말로 너덜너덜해졌다. 잠깐 멈추고 숨을 돌려야 하나 고민할 때 손이 파르르 떨렸다. 작년의 나였다면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고죠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건만 이제 와서 보니 하나같이 절절하다.

 「어차피 너랑 걔는 선을 넘은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 안 해?」

 「으응? 무슨 소리야? 선은 진작에 넘었지! 쇼코, 나도 남자야.」

 「말하면서 잠들지 마. 내 말은, 한참. 갈 때까지 가 버렸다는 뜻이야.」

 「어지러워⋯⋯ 우이씨. 그러니까아. 이미 갈 때까지 갔다고. 14 년 전에.」

 계속, 계속, 나는 머리를 가슴에 묻고 그대로 달팽이마냥 움츠러들었다. 혹시나 쇼코가 보고 있을까 봐서다. 고죠는 그때 취하기라도 했지 나는 지금 취할 수도 없다. 완전 동상이몽인데 결국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게 무엇보다 감격스럽다. 문득 쇼코가 전화기를 뒤집고 카메라를 향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내게 묻고 있는 거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고개를 든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쇼코. 고개를 끄덕이니 소리 없이 감탄한다.

 「그만 일어나.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이거 스즈카한테 보내 버린다.」

 「와, 농담이지. 네가 메이 씨보다 더 나빠.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게.」

 「협박당하는 게 익숙한가 봐. 그러게 약점 잡힐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하하하. 차라리 내가 동료들이랑 제자들이 다 지켜보는 데서 고백할게.」

 나는 화들짝 놀라서 쇼코의 전화기를 내동댕이쳤다. 쇼코가 낄낄 웃으며 그걸 주워 제 주머니로 돌려놓았다. 내가 방금 무슨 소릴 들은 거냐.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냐. 말은 하고 있는데 말이 안 나왔다. 고죠야, 안 된다. 너는 당주잖아. 교사잖아. 다 잊어. 그리고 결혼해. 지금 당장이라도. 머릿속에서 나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그래서 학교에 던져 놓고 오긴 했는데. 어떻게 됐어."

 "그날⋯⋯ 닿았지.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그냥 닿았어."

 작년의 고죠는 제대로 취하면 혼자 일어나지도 못했다. 애초에 술을 좋아할 수가 없는 체질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새 늘었나 보다. 적어도 그날은 변함없이 능청스러웠다. 맞선이 아니라 회식이었구나. 오해라고 말하면 되지. 왜 고집을 부린담. 사실을 알았다면 나도 공연히 타박하지 않았을 거다. 심지어 때리기까지 했으니.

 화면에 비친 날짜를 보고 알았다. 어쩐지 먼 과거 같은데 얼마 전의 일이다. 나는 생각도 못했다. 그때만 해도 고죠는 나를 만지기조차 꺼렸으니까. 지금도 주변 사람들과 내 눈치를 보긴 마찬가지니까. 아무리 그렇다지만 몰랐다니. 눈앞에서 놓치다니. 나라도 냉정해야 하는데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도망쳐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였다. 알고 있는 거냐. 사토루. 이건 재앙이야. 불이야. 불을 꺼야 해. 나한테서 그 저주스러운 말이 나오기 전에.

 "뭐 어쨌든. 내 앞에서는 내숭떨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바랐던 건 이런 게 아냐. 쇼코, 부탁이다. 도와줘."

 "이래서 이걸 마지막에 보여 주고 싶었던 건데. 안 돼. 이미 봤으니까."

 "하지만 독약 하나쯤은 가지고 있겠지. 내게 다오. 마시고 죽어야겠다."

 "어차피 너는 고죠 가에 '뼈를 묻어야' 되잖아. 벌써부터 서두를 거 없어."

 쇼코가 내게 간만에 유쾌한 웃음을 보여 줬다. 이런 표정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10 년도 넘은 것 같다.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만큼 시달렸으면 짓궂은 마음이 생길 법도 하다. 게다가 내가 잠깐 잊을 뻔했다. 쇼코는 고죠의 친구다. 이제 보니 좀 닮았다. 고죠처럼 웃고 있어서 그런가. 그것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래서 밉지 않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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