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병에 꽂아 둔 장미는 시들어 가고 있지만 아쉬워할 틈도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쉬는 날이 돌아왔다. 가뿐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옅은 화장을 하고 거울 앞에 서자 풋풋한 소녀가 내게 미소지었다.
입술을 만져 보았다. 이질감이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살아 있다는 증거에 지나치게 익숙해지는 것. 그러나 오늘만은 나도 그녀에게 응석부리고 싶다. 기분 좋은 날이니 고민은 뒤로 미루어도 좋겠지. 약속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문제집이나 들여다볼까 했지만 차분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나밖에 없는 방에서 괜스레 주위를 살피고 오랜만에 침대 밑에서 상자를 꺼냈다. 내 물건이라고는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이 전부다. 내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것들. 버리지 못한 것들이기도 하다. 수첩, 사진, 편지, 영화 티켓도 있다. 티켓은 처음으로 현대식 영화관에 갔을 때 썼던 것이다. 영화의 내용은커녕 제목도 티켓을 다시 꺼내 보지 않는 이상 기억해낼 수 없다. 생각날 줄 알았건만.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생각했건만. 기억이 흐려지면 그리움도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니까 기억조차 나지 않는 물건은 이제 됐다. 나는 상자 안에서 버릴 것을 추려 한곳에 모아 두고 수첩을 집었다. 요즘 사람들은 다이어리라 하던가. 필기 용도로만 쓰이는 게 아니라 날짜를 보고 사진을 끼워 놓기도 한다. 다이어리 앞쪽은 내 글씨로 가득하다. 뒷쪽으로 가서 손바닥 만한 달력을 넘기면 사진을 끼워 넣을 수 있는 주머니가 나온다. 고죠와 동기들이 학창시절 찍었던 사진들이다. 그때부터 보관했던 나머지 사진들은 전화기 안에 있다. 스마트폰으로 바꿀 때 이번에야말로 전화기에서든 마음속에서든 지워 버리겠다 각오를 다졌는데 고죠가 새 기기에 고스란히 옮겨 주었다.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보지 않았길 바란다. 그게 본인 신상에도 좋을 테니까. 그래도 사진을 전부 보관하기에는 부족해서 나중에 앨범을 하나 장만했다. 이 앨범만큼은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사수해야 한다. 비장한 마음으로 앨범을 구매한 날 표지에 누구든 허락 없이 펼치면 죽이겠다고 경고문을 써 놓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내가 스스로 펼칠 때도 어쩐지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이 떨린다. 흠흠 헛기침을 하고 조심스레 표지를 넘겼다. 오직 한 사람의 사진을 보관하기 위해 처음으로 샀던 앨범이고 아마도 마지막이 될 것이다. 고죠 사토루의 일생이라 이름 붙여도 될 것 같다. 어린시절부터 20 대 중후반까지. 고죠의 모습들이 전부 담겨 있다. 떨어져 지내는 동안 고죠의 스무 살 이후 사진을 이토록 많이 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말하자면 그거다. 암거래. 이따금씩 메이가 물건을 가져오면 안 되지 안 돼 하면서 스스로를 뜯어말리면서도 상당한 값을 치르고 데려왔다. 메이 녀석. 처음에는 인심 쓰는 척하더니 나중에는 동영상까지 가져와서 점점 감당하기 힘든 금액을 불렀다. 인간들의 뻔한 장사 수법인데 알면서도 당해낼 도리가 없다. 메이가 가장 값을 높게 부른 건 다름아닌 고죠가 무언가를 먹고 있을 때 찍은 동영상이었다. 쓸데없다 생각하면서도 뭐에 홀린 것처럼 보게 된다. 고죠의 일을 조금 거들어 주고 대가로 촬영을 부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중간에 인터뷰도 한다. 맛이 어떤지부터 최근 관심사와 고민까지 물어보고 이성에 대한 마지막 질문은 언제나 애매하게 끊어 버린다.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나같이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놨는데 그 중에서도 찹쌀떡 먹는 동영상은 정말 피를 흘리며 손에 넣었다. 농담이 아니다. 돈은 고사하고 자기 대신 특급 주령을 비밀리에 처리해 달라고 해서 죽는 줄 알았다. 제목도 무슨 최강 교사 야밤에 탱글탱글 같이 지어 놓고 웃기지도 않는다. 고죠가 알면 화내겠지. 아니면 자지러지게 웃거나. 「메이 씨도 별난 사람이네. 아무리 나라도 이해가 안 돼. 아무래도 좋지만. 이런 걸 찍어서 뭘 어쩌려고.」 「돈이야. 돈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거든. 눈에 붕대를 감은 아저씨의 먹방 수요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더 모르겠어. 뭐 덕분에 일도 처리했고 찹쌀떡을 먹고 있기만 하면 되니까 불만은 없어. 아아. 음, 맛있어.」 「흠⋯⋯ 이번에는 한입에 다 넣어 봐. 카메라를 보면서. 그리고 좀 더 입에서 오물오물 소리가 나게 해 줄래.」 「어이, 지금 이거 보고 있는 녀석. 있다면 말이지. 무슨 생각인 거야. 만나서 얘기 좀 하자. 오빠가⋯⋯ 오빠든 형이든 간에. 천천히 들어 줄게. 방에서 혼자 이상한 거 보지 말고 나가자. 거기 어디야. 인생에는 즐거운 일도 많아.」 「스톱. 고죠 군. 그런 대사는 금지라고 했잖아. 동영상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나는 무편집 보장으로 고객과의 신뢰를 지키고 있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조용히 찹쌀떡만 먹어. 내가 질문할 때만 대답해 주면 돼. 알겠지?」 메이는 필요없는 대화라 생각했을지 몰라도 나는 볼 때마다 키득키득 웃는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무의미한 고민들이 사라지고 후련한 기분이 된다. 탱글탱글한 찹살떡을 맛있게 먹는 장면도 좋고 시시콜콜한 인터뷰는 더 재밌다. 「고죠 군, 만나는 사람 있어?」 「없습니다. 동침은 하지만요.」 「좋았어. 그런 솔직담백함. 그럼 고죠 군의 마음은 어때. 어머, 어리둥절한 표정 짓지 마. 무슨 말인지 알잖아. 지금은 만나지 못하지만 계속 생각했다든가. 관계하는 동안 상상했다든가. 지금 이 순간에도 미치도록 보고 싶다든가.」 「하⋯⋯.」 「미안. 이건 필수 항목이라. 후후.」 「그거 말이지. 만약의 얘기지만 나한테 그런 여자가 있다 해도 내가 왜⋯⋯ 내가 왜! 혼자 끙끙 앓고 있겠냐? 어? 덮칠 거야! 마음만 먹으면 찾아갈 수 있거든! 아예 보쌈해 올 수도 있거든! 되게 간단하지. 그래, 너! 거기서 딱 기다려!」 재밌다고 웃으면서도 고죠가 카메라 앞으로 불쑥 다가와 소리칠 때는 꼭 나한테 말하는 것 처럼 들려서 매번 놀란다. 이미 몇 번이나 봤고 마음의 준비까지 했는데도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그게 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리즈를 모으다 피까지 봤어도 이렇게나마 대리만족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메이에게 털린 돈이 아깝지 않다. 고죠의 말을 반복해 듣다 보면 그 시점에서 이미 내가 본다는 사실을 눈치챘고 정말로 나한테 화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진실은 알 수 없다. 의심했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알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꺼냈던 물건을 상자로 돌려놓고 시계를 봤다. 고죠와 약속했던 시간이 됐다. 거울을 보며 다시 한 번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어려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나름 공들여 화장한 얼굴과 말끔한 옷차림 덕분에 그런대로 괜찮았다. 마침 전화기가 울렸다. 고죠였다. "음⋯⋯ 나다. 도착했냐." 「그럼. 좀 더 기다릴까.」 "미안하군. 지금 나가마." 고죠에게는 참으로 어렵게 잡은 휴일이다. 새삼 부담이 될 것은 없으나 나와 함께 즐겁게 보냈으면 좋겠다. 적어도 지난날과 같은 결과로는 끝나지 않길.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원하던 것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아이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약속 장소는 고전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으로 정했다. 감추려고 하면 도리어 어색해 보일 수 있고 차라리 당당한 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신중해야만 했다. 고죠가 차를 세워 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에 들면 좋겠구나."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사실은 내가 말을 꺼내지 않았어도 고죠는 멀리서부터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듯이 웃으며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 줬다. 모처럼 선물받은 귀한 옷에 구김이 생기지 않도록 스커트를 반듯하게 펴서 조심스레 올라탔다. 고죠가 벨트를 채워 주려고 다가왔다. 나는 그의 뺨에 입맞췄다. 꿀밤부터 예상하고 눈을 감았다. 물론 아니었다. 차가운 손이 얼굴을 감쌌다. 살살 어루만졌다. 어느 쪽이냐. 고민이 무색하게도 그는 내 이마에 뽀뽀를 돌려주었다. "정말 괜찮아?" "응." 고개를 끄덕이자 고죠는 싱긋 웃었다. 돌아선 뒤에도 같은 표정일 수 있었을까. 앞으로 계속 실망감을 감추긴 힘들지도 모른다. 절실히 원할수록 서로 지치고 결국에는 한계가 온다. 그의 품에 안겨 잠드는 날은 끝내 오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한테는 뭐라고 말했어." "무슨 말이 필요한데. 선생님이 해 봐라." "내, 내가? 어⋯⋯ 어⋯⋯ 꼭 그래야겠어?" "농담이다. 이번만큼은 내 너를 지켜 주마." "하아⋯⋯ 미안해. 너, 뭐야 그 표정. 웃지 마." 고죠가 우동만 먹다 한이라도 품었는지 점심 메뉴 선택에 상당히 강한 의지를 보였다. 한도 풀어 줄 겸 그가 예약한 곳에 갔다. 철저히 독립된 공간. 안타깝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데 어쨌든 마음 푹 놓고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습관이란 무섭지." "참으로 그렇구나." 본가에서는 좋든 싫든 다른 하수인들과 번갈아 가며 고죠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 그릇의 위치를 바꾸거나, 음식을 접시에 담아 주거나. 귀찮지만 익숙해지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물론 지금은 어디까지나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다. "본가로 돌아가고 싶어?" "기숙사도 나름 지낼 만하다." "그런 뜻으로 물어본 거 아닌데." "무슨⋯⋯ 시, 시끄럽다. 먹기나 해." 고죠가 나를 흘겨보며 겉웃음을 지었다. 하던 대로 하고 있는데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아까부터 깨작거리며 먹는 둥 마는 둥이다. 어렸을 때도 삐딱하게 굴긴 했지만 결코 식사 중에 농담 따위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들키면 나만 곤란해진다. 발끈한 탓인지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내 발로 뛰쳐나와 다시 돌아간다니 말이나 된단 말인가. "집안 어른들은 힘이 많이 빠졌어. 오늘 내일 하는 나이가 되어서 겁이 나는 거겠지. 그동안 쌓은 업보라든지, 내세라든지. 그렇게 꼿꼿했던 양반들이 말이야. 더욱이 조상묘를 든든하게 지켜 주던 존재도 예전에 집을 나가 버렸으니."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세월은 당해낼 재간이 없지. 세대 교체는 인간들의 숙명 아니더냐. 물론, 곯아빠진 영감쟁이가 됐어도 녀석들이 태어나 처음 조상묘를 찾아 절을 올릴 때의 앳된 모습을 나는 여전히 다 기억하고 있다." "싸울 기력도 없는 영감쟁이들을 뒷목 잡고 쓰러지게 할 수야 없지. 그래도 우리 세대 놈들은 내가 통제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마. 돌아오고 싶을 때는 돌아와. 언제든. 고전을 졸업할 때까지는 기숙사에서 지내야겠지만." "하하하. 마침내 수백 년 동안 미루어 둔 숙원 사업을 이룰 수 있겠구나. 이 몸께서 고죠 가의 안주인이 되어 제대로 한 번 주물러 보는 거지. 내가 없으면 입만 살아 나불대는 놈들이 우리 사토루 님을 괴롭힐 테니 생각해 보마." "우리 사토루 님? 할망구가 들으면 기절하겠다." "그럼 정신차리는 약을 지어 올리지. 이건 어떠냐." 나는 음식을 젓가락으로 조금 집어 고죠에게 내밀었다. 완벽히 예절에 어긋나도록 교태까지 부리며 졸라대니 고죠가 마지못해 허락했다. 어느덧 연륜이 묻어나는 당주님은 장난스레 미소짓는 얼굴에도 품위가 있어 반할 지경이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디저트 먹으러 갈까." "딱히 상관은 없다만. 또 먹으라는 거냐." "네가 언제 먹었어. 나만 먹었지. 식사에는 별로 흥미가 없어 보여서 하는 말이야. 내친김에 좋은 경치를 보여 줄게. 너, 상경하고 나서 도쿄의 전경을 내려다본 적 없었지. 스카이 라운지에 있는 카페인데 그런대로 괜찮을 거야." 스카이 라운지라. 말로만 들어서는 어떤 장소인지 감이 오지 않았는데 실제로 보니 건물을 하늘까지 닿을 듯 높게 지어 놓고 꼭대기에서 왕처럼 도심을 내려다보도록 설계된 곳이었다. 커다란 유리가 벽을 대신하고 있었다. "제대로 즐기고 있는 거 맞아?" "뭐⋯⋯ 근데 왜 하필 호텔이냐." "일부러 스카이 라운지를 골랐으니까. 몇 군데 더 있긴 하지만 여기가 좋을 것 같았어. 그렇게 일일이 의식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오늘 이런저런 것들을 내려놓고 담담한 마음으로 나온 거잖아. 단순하게 눈앞의 즐거움을 만끽하자." "그리 말하니 남사스럽긴 하다만 일리가 있구나. 아무래도 이런 경치는 쉽게 잊어버릴 수 없을 테니까. 현실로 돌아간 뒤에도 생각나겠지. 한 번쯤 다시 온다 한들 어차피 너랑 나는 점잖게 디저트만 먹은 뒤 떠날 테고 말이야." "그럼 손 정도는 잡을 수 있는 곳으로 갈까." "오늘은 네 마음대로 해라. 어디든 따라가마." "꼭 부추기는 것 같네. 나는 즐기지 못해도 상관없지만 너는 오늘 무조건 즐겨야 돼. 내가 제안한 데이트니까. 저번처럼 되면 곤란하거든. 그걸 어떻게 만회하겠어. 그래서 지금 어느 때보다도 네 웃는 얼굴이 보고 싶은 거야." "흥. 부추긴 거 아니다. 나는 그저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네 계획들이 하나같이 훌륭해서. 어차피 지금은 너 아니면 나를 이런 곳에 데려와 줄 사내도 없으니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재주껏 나를 웃게 해 봐라." "네, 네." 고죠는 달다. 원래 그런 놈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정도를 넘어서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정신이 혼미해지도록 달았다. 아무리 데이트라고는 하지만 이 놈 웃는 얼굴 정도는 언제나 보는데. 그런데도. 그는 정말 한없이 달달했다. 까페에는 내가 만족할 때까지 머물렀다. 그 다음 우리는 미술관으로 갔다. 워낙 넓다 보니 사람이 지나다녀도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죠와 손을 잡고 관람했다. 나는 옛 그림에 대해서만 조금 아는 척했다. 모르는 작품이나 현대 미술 앞에서는 겸손한 태도로 설명을 들었다. 제법 흥미로운 점들이 많았다.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정말이야? 원본을 직접 눈으로 봤어?" "아, 그렇다니까. 그 양반 집에 가서 봤다." "대단하네. 이럴 때는 천년의 역사를 지닌 네가 부러워. 예전부터 이 그림을 왠지 모르게 좋아했거든. 원본이 밀수된 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서 결국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됐어. 저기, 원래 어떤 느낌이었어? 색감은?" "어쩐지 알 것도 같구나. 네가 이 그림에 끌리는 이유. 그림 속의 여자는 그 시점에서 이미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죽어서도 여전히 빛날 수 있는 존재는 나 정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실제로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상상에 맡기마. 그때도 기분 나쁜 그림이었는데 차라리 낡은 게 낫군. 색감이라. 너무 옛날이라서 기억이 안 나." "결국 뭐야? 주령?" "그럴싸한 추측이다. 저주받았다면 어딘가에서 불태워졌어도 이상하지 않지. 하나 유감이구나. 주술사 양반. 작가는 시체를 그린 것뿐이다. 어째서 죽은 여자를 이토록 아름답게 묘사했을까. 이건 영혼 결혼식에 사용할 그림이야." "와⋯⋯ 예상 외네. 하지만 옛날에도 흔한 일은 아니었겠지. 우리 가문도 당주가 처자식 없이 죽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그런 의식을 치렀던 것 같아. 너도 알다시피, 최근까지. 그러니까 내가 뭐라 말할 자격 없지만. 무섭겠다." "무섭겠지. 그래도 생매장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최소한 무덤에는 안 들어가도 되잖아. 청상과부라도 계속 살아 갈 수 있잖아. 죽은 사람과 결혼해서 결국 자기가 죽을 때까지 수절해야만 하는 것은 물론 괴로운 일이다만." "스즈카는 괴로워도 참아 줄 거지." "뭐야 갑자기. 뭐냐고 그 질문. 쓸데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 기다리지 마.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 "내 말은, 둘 중 하나만 고를 수 있다면. 가만 있어 보자. 으음⋯⋯ 내 유지에는 뭐라고 적는 게 좋을까." "그러니까 왜 다른 선택 사항이 없는 건데! 젠장! 아, 알았어. 무덤에 넣지 마. 차라리⋯⋯ 할게. 수절할게." "하하하." 조용한 미술관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죠는 그대로 콧노래를 부르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농담이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에 이상하리 만큼 유쾌한 웃음으로 이를 대신했다. 주술사들의 머릿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었을까. 웃는 것부터 제정신이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 생각하면 소름끼친다. 두려워서 거스를 수가 없다. "사토루 님, 장난치지 말아 주실래요." "뭘, 지난 10 년 동안 잘 했잖아. 아냐?" 부정해도 소용없는 사실이었기에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긋지긋한 웬수의 가슴팍을 마구 때렸다. 아직 성장 중인 짧은 다리로 하찮은 발길질도 서슴치 않았다. 당주는 빌어먹을 당주의 할아버지까지 걷어찼을 것이다. 고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원망을 담아 백 번 천 번을 때린들 그런 식으로는 소용이 없었다. 그에게 무하한이 있거나 없거나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때리지도 못하고 손이 얼얼해졌는데 숨까지 차올라 결국 그만두었다. "이건 도저히 부정 못하겠네. 진짜였구나." 마지막 일격을 위해 손을 번쩍 들어올렸지만 내리칠 힘이 없었다. 고죠가 내 손을 잡아 내리고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다정한 손길조차 원망스러웠다. 치욕스러움과 안도감이 뒤섞여 나는 갈증을 호소하듯 매마른 신음을 토해냈다. "10 년이나 외롭게 하고. 모처럼 만나서 만져 주지도 않고. 진짜 나쁜 놈이다. 그치. 어떻게 갚아 줘야 할까." "다정하게 웃지 말고 부드럽게 쓰다듬지도 마라. 필요할 때만 곤란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하면 된다. 여자가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하면서 마음의 무게까지 덜어 주는데 저밖에 모르는 놈 따위가 그리 쉽게 반성할 리 없지 않으냐." "너의 그 신랄한 반어법이 그리웠어. 신나게 돌려까다가 결정적인 순간 비수를 꽂는 것까지 여전히 완벽하네. 거기서 더 세게 나가도 돼. 해 봐. 나를 반성하게 만들어야지 기분 좋게 해 주면 어떡해. 너어. 자꾸. 그렇게. 할 거야?" 콩콩 이마가 부딪혔다. 안절부절 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거울을 꺼내 보지 않아도 어떤 색이 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당사자가 이런데 고죠를 힐끔거리다 이 광경을 목격한 여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뭐 그리 좋은지. 미술관에서 나왔을 때는 하늘이 주홍색 장미와 같은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고죠가 답답했는지 외투를 벗어 팔에 걸치고는 조금 걷지 않겠냐 물었다. 슬슬 야외의 공기가 그리워지기 시작했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문화시설이 밀집된 지역인 만큼 미술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공원이 있었다. 커다란 인공호수의 가장자리를 둘러싼 산책로와 구름다리로 행인들이 지나다니고 다리를 통해 공원과 상가를 오갈 수 있는 공원이었다. "화장 좀 고치고 오마." "다녀오세요." 처음부터 짙은 화장은 필요치 않았다. 굳이 손대지 않아도 사과 같은 뺨 앵두 같은 입술은 탐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딱히 고칠 데도 없었지만 나는 여유부리지 않고 서둘러 고죠에게로 돌아갔다. 단란한 웃음소리.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였다. 그 피가 어디 가랴.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두 명의 낯선 여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저기⋯⋯ 괜찮다면 함께 어떤가요?" 묘령의 여인은 운명의 짝이라도 만난 것처럼 수줍어서 어쩔 줄 몰랐다. 스스로 다가가는 것도 마다 않는다.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나를 본 고죠는 여인에게 무어라 말하더니 유유히 내 옆으로 걸어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일을 겪었던 예전의 나는 어떻게 그토록 의연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그때는 괜찮았는지도 모른다. 고죠가 다른 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눠도 눈앞에서 함께 사라져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레 동요한다니. 이러다 내가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다. 벌써 몇 번이나 죽었지만. 고죠의 팔이 눈치도 없이 나를 감싸안았다. 여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나는 고죠를 냅다 떠밀고 그와 떨어졌다. 고죠가 능구렁이처럼 다가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대놓고 질투하냐 말하지 않았을 뿐 마음껏 나를 놀려댔다. "데이트는 얼어죽을. 야밤에 탱글탱글을 보는 게 낫겠다." "찹쌀떡 먹고 싶어? 맛있는 곳 알아. 근데 제목 잘 지었네." "눈치챘군." "그야 눈치채지. 나한테도 있어. '마왕의 딸 혼신의 미끌미끌 고전 탈출기'라든지 '길 잃은 주령 S 씨의 덜덜 떨리는 밤'이라든지. 최강의 지갑을 털어 버리다니 메이 씨는 타고난 장사꾼이야.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니까." "그걸 왜 사." "그러는 너는." 예전에는 그런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간단히 말해서 암암리에 주술사의 일을 대신 처리하고 보수를 나눠 갖는 것이다. 생활비, 병원비, 그밖에 여러 가지 이유로 돈이 필요했다. 가끔 메이에게 조금 별난 요구를 받기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그거였다. 주술사들이야 원래 미친놈들이고 인간들은 죄다 변태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 "나 말이야, 지쳤을 때 가끔 봐. 그거 전부 전화기에 넣어 놓았거든." "뭐? 이런 미친⋯⋯ 자, 잠깐. 여기서 재생하지 마. 보여 주지 말라고!" 돈이 필요했던 것은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메이 그 녀석은 도대체 돈을 위해 얼마나 짓궂은 일까지 할 수 있단 말인가. 교류회 때 눈에 띄면 꼬맹이 시절처럼 꿀밤을 때려 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상당히 기묘한 경험이었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혼자가 아니면 보기 곤란할 정도의 위험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런 걸 떠나서 부끄러웠다. 「스즈카는 이미 천년 전부터 존재했던 거니까 그런 점에서 인간 남자들은 너한테 아기나 마찬가지네. 그렇지. 어른들은 모두 애들을 놀리는 걸 좋아하잖아. 나도 좋아해. 이런 얘기를 해 줄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서 오직 당신뿐이야. 인간, 주령, 뭐든 겪어 봤을 거 아니야. 대답해 봐. 지금 추억을 회상한다면 어떤 기억이 먼저 떠오를까.」 「일단⋯⋯ 내가 기억력은 인간과 같은 수준이라는 걸 말해 두지. 나도 수치심이라는 게 있다. 뭐냐 그 질문은. 아무것도 다를 건 없어. 너희들이랑 똑같아. 키스를 많이 해 주면 그걸로 만족해. 평범하게 다정한 녀석이 좋다고.」 「좋은 대답이야. 하지만 아기들에게는 좀 더 명확하게 얘기해 주지 않으면 안 돼. 교묘하게 답변을 피해 가는 것도 용서 못해. 그럼 이해하기 쉽게 질문을 조금 바꿀게. 스즈카 님. 혼자 있을 때 누굴 상상하면서 위로 받으시나요.」 「듣자 듣자 하니까 이상한 것만 물어보는구나. 돈도 필요없고 다 필요없으니까 여기서 나가게 해 줘. 이 방, 힘을 전혀 못 쓰겠잖아. 옛날 일은 잊어버렸어. 떠올리고 싶어도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기껏해야 10 년 안의 일밖에⋯⋯.」 너무나 기가 막혔던 나머지 나는 손을 쓸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고죠의 스마트폰으로 손을 뻗었다. 나쁜 놈. 손이 닿지 않았다. 목 놓아 애원하며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가 화면을 끄고 나를 달랬다. "그러니까 너도 아기를 혼자 두지 말았어야지. 한 번은 의뢰한 적도 있었어. '외로운 주령 마마에게도 사랑의 XX가 필요해'. 왜 그것만 안 찍어 준 거야. 보수도 내가 메이 씨보다 열 배로 불렀잖아. 나라는 걸 알고 거절했어?"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수상하잖아. 가운데 XX란 글자가 특히. 가끔 기분 나쁜 영화나 책 표지에도 있던데 무슨 뜻이야. 내용도 이상해. 한 시간 동안 가만히 누워 있으라는 둥, 배를 만져 보라는 둥, 도대체 그런 게 왜 보고 싶은데." "찹쌀떡 먹는 나를 보려고 목숨 걸고 특급 주령과 싸운 너한테 듣고 싶지 않아." "네가 그건 어떻게 알아. 찹쌀떡은⋯⋯ 귀, 귀엽잖아. 보기만 해도 배부르잖아." "나도 내가 귀여운 건 인정해. 그러니까 기분 나쁘다고 말하지 마. 너무하네 진짜." 너무하다 해도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나의 탄식은 수상한 제목의 비디오 따위와는 상관없는 한숨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생각났다. 거절하고 나서 메이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가 말했다. 안 된다고 했더니 울더라. 왜 그런 말이 신경 쓰이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 알겠다. 진짜 그랬을 리는 없지만 잊어버렸다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큰소리로 껄껄 웃었다. 죄책감을 끌어안은 채 웃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넌즈시 호수를 돌아보았다. 결국 이렇게 될 거였다면 나나 이 놈이나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건지. 갖잖기 그지없는 자신의 부끄러움에 몸이 떨렸다. 고죠는 그런 내 손을 잡고 호숫가를 걷는 내내 놓지 않았다. 마주닿은 감각이 간지럽기도 은근히 괴롭기도 했다. 그렇게 밤이 됐다. 하루가 끝나 가고 마지막 일정을 위해 다시 차에 올라탔다. 저녁 식사를 하러 간 곳은 까페처럼 아늑한 분위기의 작은 가게였다. 일부러 내 취향에 맞추어 골랐다는 것은 딱 보면 알 수 있다. 이번만큼은 내가 사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끝내 거절당했다. 어른이니 선생님이니 편한 대로 낯을 바꿀 때는 당해낼 수가 없다. 어쨌거나 우동을 한 번도 먹지 않은 것만으로 고죠는 만족한 듯했다. 뭐라 말해도 내가 즐거우면 고죠도 편안해 보인다. 낮에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른 표정. 말투. 무엇보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았다. "이거 맛있다. 너도 많이 먹어. 담아 줄게. 아 해 줄까." "왜 이리 수선을 떨어. 알아서 먹을 테니 거기 두어라." "나도 시중들 줄 알아. 너 설마 다 잊어버린 건 아니지." "⋯⋯." "스즈카 고젠. 말하기 싫으면 그냥 잊어버렸다고 해도 돼. 어쨌든 지난 일이니까. 이 자리에서 터놓고 얘기해 보자. 줄곧 너랑 얘기하고 싶었어. 나는 내가 일방적으로 외면당했다고 생각해. 친구한테. 심지어 애인한테도. 둘 다 내 생각은 묻지도 않았잖아. 이유가 뭐야.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어? 아니면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 거야?" 말하는 모양새만 봐도 어지간히 벼르던 일인 건 알겠다만은 내 눈에는 조금 유별나게 자신을 칭송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떠날 적 자신에게 고죠에 대한 억한 심정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여기서 그에게 죽어도 좋다. "스구루는 너와 떨어져 있을 때도 너를 의지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네 얘기를 들어 볼 마음이 전혀 없다." 그래도 결국에는 돌아와서 저를 위해 일하고 억지 웃음이라도 짓도록 끈질기게 애태웠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다. 평소에도 남몰래 인상쓰면서 머리를 감싸쥐는 것이 못내 신경 쓰였다. 이제는 무슨 영문인지 손이 명치를 덮고 있다. 듣자하니 쇼코에게 가끔 진통약을 받아 먹는다던데 그런 까닭이 아닌지 싶었다. "처음부터 내게는 너와의 대화가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다. 네 시간을 낭비할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나 좀 가엾기도 하니 이유만큼은 알려 주마. 스구루의 말을 빌리자면, 그래, '사토루는 바빠'라고 할 수 있겠군. 그게 다야." "⋯⋯." "화내지 않는 거냐." "화 안 내. 고마워. 돌아와 줘서. 솔직히 기대도 안 했거든. 너로 인해 어떤 것들은 정말 거짓말처럼 좋아졌어.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 그건 나도 몰라. 다시 불행해지면 그때야말로 너를 많이 원망할 거야. 내 말 기억해 둬." "그저 바람이나 쐬자고 나온 것이라 여겼는데 이제부터 그것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구나. 아무것도 내어 줄 마음이 없는 놈이라면 배신을 두려워하지도 않을 테니. 나를 떠보려는 것이냐. 기왕이면 재미있게 해 다오." 고죠와 제대로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내가 과거의 그 어떤 순간보다 정직했음을 전하고 싶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있었다. 나의 거짓말. 나라고 어찌 듣고 싶지 않을까. 가끔은 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술은 없는 것인가." "뭘 자연스럽게 술을 찾고 있어. 미성년자가. 안 돼. 그리고 기숙사에서 몰래 야금야금 마시는 것도 그만둬. 나 네 담임이야. 그렇게 쳐다보지 마. 나도 잘한 거 없지만 이 정도 잔소리는 할 수 있거든. 걸리기만 해. 맴매할 거니까." "맴매라. 그것도 좋지." 지금은 메뉴판을 보면서 여유부리고 있어도 체벌 강도에 따라 맴매의 세기가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웃을 일만은 아니다. 어쩌면 등짝 한 대 맞고 끝날 수도 있지만 술식 하나로 정신과 육체를 놓아 버리는 경험까지 할 수 있다. 그 정도면 처벌 수준을 넘어섰다고 본다. 무하한이라 부르는 것보다 두려워할 만한 이름이 있을 터인데. "내가 모르는 사이 너도 물러졌구나." "그래야만 견딜 수 있는 일도 있더라." 사실은 그저 먹는 모습이 더 보고 싶었을 뿐인데 고죠는 그런 줄도 모르고 답답한 표정으로 찬물만 벌컥벌컥 마셔댔다. 아무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며 들떠 있기로서니 너무 능청을 떨었던 것은 아닌지 문득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슴푸레한 밤이 되었다. 고전으로 돌아가기 전에 근처 공원을 조금 걷기로 했다. 도쿄의 밤은 떠들썩하지만 외곽으로 갈수록 소란과 멀어진다. 두 사람의 인기척뿐. 과연 그 이야기를 꺼내기에 적합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스즈카. 나한테 뭔가⋯⋯ 할 말 있지 않아?" "없지는 않다만. 어찌 운을 떼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나도 그래. 이번만큼은 먼저 시비걸어 줘도 괜찮은데."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고죠가 팔에 걸치고 있던 외투를 내게 덮어 주었다. 밤하늘을 덮은 것처럼 낭당한 외투 속에서 거짓말 같은 여름날의 한기가 맨살을 에워쌌다. 정작 내게 필요한 따스함은 없었다. 미술관을 나설 때부터 입지 않고 걸쳐 두었으니 온기가 느껴질 리 없다. 그래도 고죠의 체취는 짙게 남아 있어서 꼭 붙잡았다. "너를 좋아한다." "하하하. 사랑해." "안기고 싶다." "응⋯⋯ 알아." "그래, 어쩌면 좋을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십 년을 길들인 습관이다. 그래도 지금밖에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위해 고죠는 일부러 자신을 가리키는 말도 바꾸었다. 예전처럼 자연스럽지 못하고 위태롭게 들렸다. 어차피 교사가 된 현재를 과거로부터 떼어 놓을 수는 없다. "사토루. 화내지 말고 듣거라." "뭔데. 혼날 것 같으면 하지 마." "그저 내가 너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말해 주려는 것뿐이다." "어쩐지 익숙한 전개인데. 벌써부터 화나려고 해. 안 들을래." "들어. 나한테 나중에 써먹을 변명거리 하나 던져 준다 생각해." "⋯⋯." "네가 원하면 나는 앞으로도 네 제자 행세를 할 거다. 이렇게 가끔 변덕도 부리면서 너와 바람쐬러 나오겠다. 네가 원하면 다른 여자를 안아도 원망하거나 질투하지 않겠다. 나한테 감출 필요도 없다. 네가 원하면 지금 네 제자들 그리고 언젠가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 일해 주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쯤은 있겠지. 그래도 나는 만족하지 못할 거다. 너에게 품은 욕망을 다 털어내기 전에는. 나중에라도 나를 안을 마음이 생기거든 와라. 안아도 된다." "내 대답은 너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을 거라 믿어. 미안한데. 나는 네 희생을 거절할 생각 없어. 그래 해 봐. 뭐든 상관없으니까. 이렇게 막막한 건 처음이야. 10 년 전보다 백 배 천 배는 답답해. 그만큼 너를 더 좋아하게 됐기 때문이겠지. 예전처럼 무시해 버릴 수는 없을걸. 스즈카 고젠. 그걸로는 안 돼. 부족해. 차라리 나를 위해 싸워." "이해가 잘 안 되는데. 고작 내가 너를 위해 무엇과 싸울 수 있단 말이냐." "뭐든지. 나를 귀찮게 하는 모든 것과 싸워 줘. 그리고 하나 더. 료멘스쿠나." "스쿠나?" "나도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어. 직감이야. 그래야만 만족할 것 같아." "차라리 같이 죽자고 해라. 젠장, 웬수 같은 고죠 놈들. 저주가 따로 없다니까." 고죠가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와락 끌어안는다. 다붓다붓 거칠게 쓰다듬고 응어리를 털어낸다. 꽉. 아주 꽈악 안아서 숨이 턱 막혔다. 아무리 좋은 게 좋은 거라지만 뭐든 지나치면 좋지 않다. 품에서 벗어나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가 선글라스를 벗어 주머니에 넣고는 내 허리를 안은 채 들어올렸다. 가볍게. 그러나 불쑥 치솟아서 발이 허공에 놓였다. 나는 곧 그의 하늘색 눈동자에 시선을 빼앗겼다. 반짝이는 그것도 나를 비치며 웃음빛을 띠었다. 시시덕거리며 웃다가 그게 재밌다고 또 웃고 그러다 주체하지 못할 만큼 크게 번졌다. 고요했던 밤이 떠들썩해졌다. 볼이 얼얼하고 따끈해져 겨우 멈추었을 때쯤 고죠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만연했다. "제자들이 알면 어떡하냐." 걱정스레 말하면서도 나는 순간을 만끽했다. 달달한 냄새가 가득 밴 옷을 시나브로 만지작거리며 슬근슬근 몸을 부대꼈다. 더할나위없이 안심되었다가. 긴장되었다가. 두려울 만큼 아찔했다. 그러면서 점점 숨이 가빠졌다. "너, 애들이 바보인 줄 알아?" 고죠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숨이 닿을 때 내 가녀린 목이 벌벌 떨렸다. 언제나 점잖게 굴던 그의 커다란 손이 주제도 모르고 내 몸을 마구 더듬었다. 당돌하게 움켜쥐기도 했다. 아랫배가 단단해지고 팔다리는 힘없이 늘어졌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건 다섯 살짜리 아기도 알아. 유타랑 다른 셋은 벌써 능글능글해. 뇌물을 써야 할 정도야." 학교는 청춘의 환락장이다. 분위기에 휩쓸려 애간장을 태우면서도 정작 내게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 매번 통절하고 먼눈을 판다. 그렇게 아웅다웅 지내며 수업시간에는 칠판을 쳐다보고 한 번씩 생각으로만 더듬더듬 만져 본다. 맨송맨송 시간을 떼우다 손이라도 스치면 잡아 볼까. 젠장. 속으로 욕하며 돌아서서는 맥쩍은 마음에 시비를 걸었다. 그게 다 담탱이 시선 끌자고 한 짓이다. 어깨너머 목소리라도 들으면 그래도 좋았다만 모든 게 풀 끝의 이슬이다. 여긴 학교가 아니고 본가 사정도 지금은 알 바 아니다. 그만하면 나로서는 선우후락한 것이다. 복잡한 생각을 모조리 뒤로 한 채 허겁스레 입술을 탐했다. 거쿨진 사내답게 탐탐한 입술은 눈에 보이는 대로. 녹녹하고 따뜻했다. 알콩달콩하게 재미를 보는 사이 숨이 차오르고 몽롱한 기분이 됐다. 희뿌연 의식 속에서 옛 기억이 떠올랐다. 사토루의 젊음은 언제 튈지 모르는 불똥이었다. 차를 타고 가다 혹은 길을 걷다 방에서 심심풀이로 껄덕대다 갑자기 덮친다. 뭐에 꼴리는지 당최 알 수 없다. 작아도 성인 여자라 결코 가볍지 않건만 근처에 디딜 만한 게 없으면 들쳐안아서라도 따먹는다. 고등학생이면 한창 때니 그러려니 해도 내 몸은 죄가 없는데 영문도 모르는 채로 당했다. 작다고 놀림받고 난쟁이똥자루라는 굴욕적인 별명으로 불리면서도 다 참았다. 그래도 키 차이는 고죠도 나도 어쩔 수 없다. 겨우 내 발로 섰다 싶으면 얼마 못 가 또 물장구를 치게 된다. 벽이라도 짚을 수 있으면 그나마 형편이 좋은 것이다. 마주보고 안아올리면 도련님의 머리를 잡아챌 수도 없고 교복을 붙잡고 매달려 봤자 주욱 미끄러진다. 어쩌다 지쳐서 목을 끌어안기라도 하면 질색팔색하고 숨 막히니까 놓으라며 귀를 깨물어 버리는 놈이었다. 비명을 질러도 들은 체 만체. 저만 좋으면 그만. 이러니 같은 날 씻으려고 옷을 벗다가 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핏자국을 보는 것은 예삿일도 아니었다. 누가 보면 괴한이라도 만난 줄 알겠다 궁시렁대고는 생각해 보니 별로 다르지도 않아서 나 혼자 빨래를 하며 클클거렸다. 사타구니가 욱신거릴 때마다 기가 막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내가 한심하고 가엾다. 한편으로는 분하기도 하고 묘한 오기가 생겨서 고죠가 좀처럼 허락하는 일이 없었던 늘큰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너도 당해 봐라. 제대로 전해지긴 했는지 고죠는 아픈 기색도 없이 응 하고 신음만 했다. 당주님 체면 다 어디 갔는지 치마꼬리 잡듯이 다붙어서는 혀를 엉기어 왔다. 숨을 내보낼 틈도 없었다. 껀정이랑 하려니 자꾸 흘러내리고 고죠도 놔 주긴 싫어서 내 사타구니에 허벅지를 들이밀다 그만 고간에 핀 꽃을 건드려 꺾을 뻔했다. 나는 매달린 채 심지어 입이 틀어막힌 채 애처로운 신음을 지르며 파르르 떨었다. "하하하. 어떡해. 어디 상자 같은 거 없나." 여유롭게 바닥을 딛고 서 보려 해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휘청했다. 실없는 소리는 무시한다. 사내에 면역이 없는 숫처녀의 몸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10 년을 한 놈만 지긋하도록 바라봤던 미련한 자신을 탓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위에 올라가 볼래. 그래, 거기. 괜찮아." 잡아 주지 않았다면 바위에 올라서다 발이 삐끗해 넘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훨씬 작지만 한결 수월하게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졸린 것도 아닌데 눈꺼풀이 무거웠다.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죠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가 걸쳐 준 외투와 함께 와락 안기니 몹시 애틋했다. 내 것이라 말하기 두렵지만 그만큼 소중한 느낌이었다. 훌부들한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고죠의 앳된 얼굴이 잠시 보였을 때 그래도 좋아했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니고서야 그럴 수 없다. 그렇게 원망했던 놈을 고집스레 원하고 원하지 않았다면 과거와 겹쳐 보며 웃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뭐가 달라질까라는 씁쓸한 의문과 오랫동안 가슴에 키워 왔던 모호한 감정 또는 서로를 향한 의심은 쉽게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은 시야에 비친 모든 것이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처럼 유난히 밝고 깨끗해 보인다. "조금만 더⋯⋯." 고죠가 내 얼굴을 끌어당겼다. 입술이 맞붙고 떨어지는 끈끈한 소리가 호젓한 공원을 가득 채울 만큼 컸다. 어째서인지 풀벌레도 울어 주지 않는다. 달뜬 숨소리는 어지러이 뒤섞였다. 안타까운 한숨까지도 메아리처럼 울린다. "기분 좋다. 그치. 근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지금 네 모습. 눈을 못 쳐다보겠어." "이해한다. 선생님이니까. 기다릴 수 있다. 오늘은 피차 긴 밤을 보내게 될 텐데. 잠이 오지 않거든 전화해라." 고죠가 미적지근한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더니 무언가 깨달은 듯 내 이마를 콕 찍었다. 그러나 저도 참을 수 없이 민망한지 고개를 휙 돌린다. 이제 보니 귀가 벌겋다. 집게손가락으로 귓불을 야릇하게 쓰다듬어도 얌전하다. 고전에 도착할 때까지 어떻게든 가라앉혀야 하므로 나는 순순히 손을 거두었다. 그래도 바위에 올라서기까지 했는데 그냥 내려가기 섭해서 불그스름한 뺨과 입술에 한 번 더 진하게 키스했다. 다음은. 생각만 해도 터질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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