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고통과 떨어질 수 없는 몸으로 내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필요한 만큼 자신의 힘으로 치료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만 병마는 환부를 도려내어도 쫓아낼 수 없는 것이다. 별로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쇼코에게 도움 될 만한 이야기를 들으러 와서 차를 얻어 마셨다. 차보다는 약이라 마음이 편안해지는 따뜻함이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군."

 "그걸 지금 알아챈 거야?"

 "단순히 예전만큼은 선호하지 않게 된 것뿐이라고 생각했지."

 한동안 고전에서 나나미를 볼 수 없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던 나지만 쇼코를 자주 만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녀의 방은 약으로 가득하고 내 그릇은 약에 진절머리가 나서 그러한 냄새에 큰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싫어하지 않는달까 친근함을 느낀다. 고죠 가에서 지내던 시절 매일같이 웬수 같은 놈들에게 약을 끓여 바쳐야 했다. 거기에 굳이 덧붙이면 아무래도 옛것에 더 익숙하다 보니 약과 차를 크게 구분짓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덕분이랄지 이제는 약의 맛으로 대략적으로나마 어떤 약재가 들어갔는지 알 수 있게 됐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신장을 보호하는 좋은 약이다. 잡담을 하러 온 건 아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차를 마시면서 좀 더 이야기하고 싶다.

 "잘 지냈니."

 "뭐, 그렇지."

 "고죠는 어떤 것 같냐. 그러니까, 내가 없는 동안⋯⋯."

 "보이는 대로라고 말할 수는 없겠네. 꼬맹이들과 어울리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는 너도 알잖아. 폼잡을 때도 있지만 10 년이나 학교에서 조용히 엎드려 지낸데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나서 애늙은이처럼 풀이 죽어 있어."

 어린시절 제 삼생지연과 웃음보따리 역을 톡톡이 했던 고죠는 나이를 먹고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는데 쇼코는 오히려 더 딱딱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은 누구보다 고죠를 잘 아는 사람이니까.

 지난날을 돌아보면 까마득한 과거의 일과 드문드문 기억나던 일 그리고 비교적 선명한 일까지 떠오른다.

 어느새 잔을 비우고, 나는 일어났다.

 "차가 맛있구나. 너만 괜찮다면 또 오마."

 "기다려. 나도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었어."

 그런데 뜻밖에도 쇼코가 나를 멈춰 세웠다.

 "왜 도망쳤던 거야? 10 년 전에. 그때 너⋯⋯."

 "쇼코 네가 이리도 조심스러운 것은 처음 보는군. 그동안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건만 이제껏 벼르고 있었냐."

 "고죠한테서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고죠는 한 번도 그 얘길 꺼낸 적 없어. 너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어느날 내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그야말로 날개가 돋아난 기분이었어. 어디든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더군."

 고죠 가를 떠난 뒤. 나도 모르게 생각이 깊어질 때. 어느새 나는 자신의 감옥 앞에 서 있다. 문을 열면 끔찍한 일이 반복된다. 그러나 이미 악몽으로 변해 버린 걸 어쩌랴. 빌어먹을 손이 저절로 움직인다. 문고리를 당긴다. 이렇게.

 '네놈들,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내가 왜 이래? 이게 뭐야? 말해! 뭐였어! 나한테 뭘 먹였어! 이유가 뭐야.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누가 시켰냐. 이거, 사토루도 알고 있냐. 설마. 아니야. 저리 가! 나한테 손대지 말라고!'

 생각의 덫에서 벗어나려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수밖에 없다. 쇼코의 얼굴이 흐릿해서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점점 무덤덤해졌다. 의아함과 당혹스러움이 나를 향해 있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났지만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고죠는 내가 도망쳤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고죠 가의 당주로서 명령만 내리면 나를 찾아내는 건 금방이니까. 어째서 지금까지 가문의 힘을 이용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구나. 뭐, 네 말대로라면 녀석도 지친 거겠지."

 "고죠라고 별 수 있었겠어. 가문에서는 너를 선조님 곁으로 돌려보내지 못해 안달이고, 자기가 죽기라도 하면 결국 너도 생매장인데. 문제는 네가 고죠 가의 구속 하에 있을 때만 해도 조용했던 이사회가 떠들기 시작했단 거야.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료멘스쿠나 급의 주령을 풀어 놓고 방치해 둔 셈이니까. 그 책임을 고죠한테 묻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는 너도 알잖아. 그나마 너를 곁에 묶어 두는 게 최선이야. 너는 걔를 떠나면 안 돼. 다시는."

 "내가 천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인간들과 엮이며 느낀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나는 언제나 내 의지로 선택을 한다 생각했다. 한데 어째서인지 매번 너희들의 운명에 휩쓸려 가는 기분이 들어. 너희는 늙고, 병들고, 언젠간 반드시 죽게 되지. 그건 너희들의 운명이다. 내 것이 아니라. 고죠는 날 때부터 당주가 될 운명이었고 실로 그리 됐다. 과거를 짊어진 채 미래도 책임져야 하지. 그러기 위해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제 자손을 차기 당주로 세우는 것이다."

 "이제 보니 돌아온 건 몸뿐이네. 네 마음은 어딨어. 너는 선택한 게 맞아. 너 스스로 고죠의 삶에 끼어든 거야. 이제 와서 모른 척하지 마. 이미 늦었거든.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 말만은 해야겠어. 고죠의 가문이 과거에 너에게 무슨 짓을 했든 고죠⋯⋯ 사토루는 한 번도 너를 져버린 적 없어. 이미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여기서 이러지 말고 걔한테 가서 얘기해. 어쩌면 네가 오해한 건지도 모르잖아."

 "나라고 다 잊은 줄 아냐. 기억하고 있다. 기억난다고. 고죠한테는 비밀이다만 마지막 몇 일은 나도 행복했다.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고, 신물이 난다고, 계속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그러다 깨달았어. 운명의 주인은 고죠지 내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발버둥치고 매달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오해한 채로 내버려 두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지. 나를 죽여도 좋으니 놈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어. 나는 지긋지긋해서 떠났던 거야.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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