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는 동안 몇 번이고 반복했던 강생은 나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언제까지 이런 일을 반복해야 하는가 의미 없는 고민을 하고, 실의에 빠지고, 예민해져서 감추고 있던 이빨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침내 새 몸에 적응하고 나면 혐오하던 인간들과 태연하게 어울리며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 간다.

 그리고 현재 내 삶은 일하고 공부하는 게 전부다. 최근에는 집안일도 하고 성실하게 수업을 듣고 있다. 학교 생활은 내 몫이 아니지만 시험 당일에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질 수도 있다. 그럼 내가 대신 문제를 풀어야 한다. 수업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 예습이든 복습이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오늘도 나는 자신의 기숙사 방에서 머리를 싸맸다.

 그러던 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가 보니 소포였다. 늘 그렇듯 가족이나 친구에게서 온 거라 생각했는데 기사가 스즈카 씨 앞이라고 해서 처음으로 내 이름을 적고 받았다. 바닥에 내려놓고 수취인명을 다시 확인했다. 분명히 나였다.

 고급스러운 상자에는 예쁜 옷이 들어 있었다. 고등학생의 몸에 걸쳐도 어색하지 않은 산뜻하면서도 가벼워 보이지 않는 정장. 내게 그런 물건을 보낼 사람은 한 명뿐이다. 적당한 것으로 하나 골라 보내겠다 예고하기도 했었고.

 예전에도 고죠가 기모노나 유카타를 자주 보내 주었다. 후쿠오카에서 지내던 시절 나는 온천마을의 여관에서 일했는데 자연스럽게 전통 복식을 하게 됐다. 규정은 딱히 없었지만 나야 옷이든 무엇이든 옛것을 좋아하니 말이다.

 고죠는 여관에서 숙박도 했다. 딱 일주일. 매년 겨울 중 바쁜 휴가철에 우리 여관에서 제일 큰 방을 예약해서 미리 선점해 두고 식사는 가장 정성들인 메뉴와 전통주를 부탁했다. 고죠는 술을 못 마신다. 나는 못이긴 척 그의 초대에 응했다. 고된 하루를 보낸 뒤에 나도 휴가 기분을 내면서 같이 푹 쉬고, 맛있게 먹고, 밤을 보내는 것이다.

 그랬으니 의심받는 건 당연하고 한 번은 아예 내년까지 예약하고 가는 바람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거의 확신을 심어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웃긴다. 나도 무슨 생각이었는지. 여전히 이런 일을 하는 고죠의 생각은 더 모르겠다.

 다시 돌려보낼까 고민한 적도 있지만 물건 하나에도 다 사연이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번에도 그냥 옷장에 걸어 두었다. 옷에 대해서는 잠시 잊기로 하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저녁까지 집중한 덕에 그런대로 성과가 있었다.

 "나머지는 고죠한테 물어보면 되겠지."

 기지개를 펴자 책상에 놓아 둔 전화기가 울렸다. 고죠의 메시지였다.

 「잠깐 보자.」

 그런 짧은 메시지였던지라 이유는 아직 모르고 구태여 묻지도 않았다. 그때처럼 먹고 마시자고 부른 건 아닐 테고. 갑작스러웠지만 나는 기숙사를 나섰다. 자신의 방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내가 고전에서 안심할 수 있는 장소였다.

 하지만 밤에 오는 것은 처음이려나. 고죠는 마루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했을 때부터 신경 쓰였던 꽃다발은 애써 무시했다. 그보다는 오늘따라 유난히 밝고 선명한 달이나 풀벌레의 울음소리에 더 관심 있는 척했다.

 "⋯⋯."

 "⋯⋯."

 아무 말도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입을 굳게 닫은 고죠 때문에 나도 덩달아 과묵해졌다. 그렇다고 새삼 어색하다는 건 아니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긴 정적 끝에 마침내 주홍빛 장미 꽃다발이 내 앞으로 확 다가왔다. 코끝에 아른거리던 은은한 꽃향기가 물씬 풍겼다.

 "한 번 더, 데이트하지 않을래?"

 처음에는 장난인가 싶었다. 그날 이후 제대로 얘기해 보지도 못했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면서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예쁜 옷에 꽃다발. 무릎 위의 손가락이 내 마음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숨어들었다.

 "왜⋯⋯ 혹시, 미안해서 그러냐."

 "사과의 뜻도 있고. 아부 같은 거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거 알잖아. 이래 봬도 긴장했는데. 받을 거야, 말 거야."

 데이트는 둘째치고 옷은 이미 택배로 받아 버렸고 꽃다발도 거의 코앞까지 들이밀어서 이미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대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계속 대답을 기다리게 하는 것도 서로 민망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네가 말한⋯⋯ 타협이라는 게 이거구나. 지난번에는 네가 내게 양보했으니 이제 내 차례인가. 그거면 되겠냐."

 운명을 짊어지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희망을 품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슴을 채우는 것이다. 무리하게 다른 것으로 대신하다 결국 병들고 만다. 운명을 피한 채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됐을 때 우리는 서서히 무너진다.

 "하아⋯⋯ 응, 그거. 그거면 돼."

 그래도 나를 원한다면 외면하지 않겠지만 그때는 나도 적잖이 속상할 것 같다. 사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과거의 게토도 현재의 고죠도 어차피 그 속은 한낱 인간일 뿐이다. 아무리 넘어뜨리고 상처입혀도 꿋꿋이 다시 일어나서 바보짓을 하고 세상과 장난칠 궁리를 한다. 그래, 네놈들이 아무리 커 봤자 꼬맹이지. 죽을 때까지도 철부지겠지.

 "나는 너를 만지고 싶었다. 너와 동등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경솔한 짓을 했다고 생각한다. 너부터 시작해 네 제자들까지. 꼬맹이들이랑 어울리다 보니 덩달아 무모해진 것 같다. 말하지 않아도 알 거다. 우리는 각자 짊어져야 하는 운명이 달라. 여짓껏 잘해 왔잖니. 앞으로는 네게 필요한 것만 생각해라. 원하는 것 말고."

 잘하면 과거의 실수 정도는 만회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것도 생각하면 참 우스워. 때로는 그렇게 새로운 핑계와 변명 거리를 찾기도 하거든. 스구루도 동경하던 네가 여자 뒤에 숨어 변명하는 꼬라지는 죽어서도 보고 싶지 않았을걸. 나중에 친구한테 등짝 맞고 서러워하지나 마. 하려면 진작 했어야지. 하여간, 꺽다리 싱검쟁이 놈.

 다시 생각해 보란 뜻에서 꽃다발을 밀어냈으나 기어이 내게 돌아왔다. 고죠가 꿋꿋이 손을 내민 채 말했다.

 "마음을 따르라며. 도움을 구하라며. 그러더니 이제 변덕이었다고 말하는 거야? 그래, 나도 이런 내가 솔직히 한심해. 그래서 너한테 도와달라는 거야. 차라리 화를 내고 욕해. 강제로 뺏어 보라고. 스즈카. 나, 이렇게라도 너한테 말하고 싶어. 너처럼 솔직해지고 싶어. 지금은 그냥, 싫다는 이유 아니면 받아. 나랑 데이트 안 해도 돼. 부탁이야."

 고죠의 부탁이 내게는 그 어떤 것보다 강압적이었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할 수도 없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옷이랑 같이 보내든가. 데이트도 묻지 말고 강행하든가. 한편으로는 고죠가 너무 얄미웠다. 그래서 빼앗듯이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가슴에 짓눌린 꽃들이 바스락대며 앓는 소리를 냈다. 가슴이 뭉클했다. 아아. 나도 꽃을 좋아했구나.

 흐뭇하게 바라보며 꽃잎 하나라도 떨어질까 보듬었다. 어느새 나는 주홍빛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었을 만큼. 나는 몸을 옆으로 틀어 고죠와 마주앉았다. 그 사이 안대를 벗은 고죠는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눈이 마주쳐서 그대로 퐁당 빠져 버리는 줄 알았다. 두 눈에 웃음이 어린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여인이 한없이 어여쁘기만 바라는 사내의 눈빛.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더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죠에게 다가갔다. 이를 알아챈 그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한쪽으로 기울어지던 내 머리가 허공에 놓였다. 몸의 중심도 함께 무너졌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그대로 쓰러질 뻔한 나를 거리낌없이 안아 줬다. 있는 힘껏. 그것만으로 나는 감격에 겨워 흐느끼는 소리를 냈고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고죠는 안타까운 한숨만 내쉬었다.

 "용서해라. 네가 싫다면 하지 않으마."

 "싫은 거 아니야⋯⋯ 내가 애원했잖아."

 조금 더 보고 싶은 그 눈빛은 사라졌다. 그리고 평소와 같은 경박스러울 만큼 밝고 명랑한 웃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둥그렇게 말린 입 꼬리를 한 대 때려 줄까 하다 그냥 투정부리듯 꾸물거리며 느릿느릿 그에게서 떨어졌다.

 "지금은 너를 보고 있으면 속이 터진다."

 "거기까지만 해. 나 또 징징거리기 전에."

 사내들은 이성을 따를지언정 본능이 결여된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걸 위안 삼아 인내하기로 했다.

 "기억나냐. 내가 후쿠오카의 여관에서 일했을 때."

 "당연히 기억하지. 그때보다 예쁘지는 않네. 달이."

 "고죠 네가 온천을 그리 좋아하는지 몰랐다."

 "너 보러 간 거야. 한 번은 죽이려고도 갔었고."

 그랬지. 나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실이지만 어쨌든 지금 멀쩡히 살아 있으니까. 확실히 후쿠오카에서 봤던 달은 조금 더 예뻤다. 공기가 맑아서든, 온천이 있어서든, 음식이 맛있어서든. 환하게 빛나는 달을 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관광지다 보니 축제도 자주 열린다. 하루는 축제가 한창일 때 나를 찾아온 불청객들이 있었다.

 거리에 일렬로 늘어진 가게들을 가로질러, 나는 달리고 있었다. 나를 노리고 온 주술사 두 명과의 목숨을 건 추격전이었다. 며칠 전부터 축제 준비로 단단히 혹사를 당했고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에 금세 숨이 차올랐다. 고전에서 파견했다면 오로지 처형만이 목적이겠지만 놈들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주술사들이었다. 그들은 단죄보다 사냥에 가까운 행위를 한다. 그런 점에서 더 악질이고 실제로 돈만 되면 더러운 일도 마다치 않는다.

 나는 스즈카 고젠이다. 그깟 조무래기 주술사 놈들을 상대로 꼴사납게 도망이나 다닐 그릇이 아니다. 옛날이었다면 말이다. 도망치는 와중에 코끝이 찡해졌다. 마음속으로 포효하며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으로 달렸다. 비술사들이 휘말리지 않게. 실수로 비술사를 죽이기라도 했다간 그때야말로 지옥이 펼쳐졌을 것이다. 진짜가 올 테니까.

 그때, 하늘에서 장막이 펼쳐졌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당연하게도 나는 벗어나지 못했다. 나를 쫓던 주술사들도 당황했다. 놈들이 주춤한 사이 몸부터 숨기려고 두리번거리는 찰나였다.

 "스즈카 고젠. 오늘에야말로 거시기하자."

 "좋다. 그 전에, 한 번만 안아 줄 수 있냐."

 너무나도 익숙한 주력을 장막 안에서 느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예상, 아니,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고죠를 발견하자마자 일부러 그에게 돌진했다. 같은 시간 바로 뒤에서, 비유하자면 사냥꾼의 화살이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죠가 나를 구해 줄 이유는 없지만 찰싹 달라붙어 있는 한 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화살을 막을 것이다.

 내 판단은 옳았다. 그때만큼은 무하한 만세를 외치고 싶었다. 나를 처형하러 온 놈에게 잡혀 있다는 사실은 제쳐두고서라도.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놈들의 의뢰인이 어떤 목적으로 그들을 내게 보냈는지 알게 됐을 때부터 공황에 빠져 있었다. 꼬라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식은땀으로 가득한 얼굴에 머리카락은 헝클어졌고 입고 있던 기모노는 어깨가 드러나도록 흘러내렸다. 보다못한 고죠가 다른 무엇보다 먼저 내 옷매무새를 만져 줬을 정도다.

 "너 왜 그래."

 "죽여 줘! 지금 당장! 봉인이라도 좋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저것들이 못 오게 해라. 나한테 손대지 못하게 해. 부탁이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이건 못 참아. 무덤 속에 들어가는 게 훨씬 나아. 저것들은 인간이 아니야. 괴물이야."

 "왜 그러냐니까. 꼴이 이게 뭐야. 전부 말해."

 "나를⋯⋯ 팔아먹으려고 했어. 변태 부자한테!"

 "변태 부자? 그게 뭐야? 풉! 하하하! 완전 웃겨!"

 고전에 있으면 비록 자유는 없을지라도 주술사들에게 습격받을 일 또한 없으니 안전만큼은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다. 반면 후쿠오카에서는 일년에도 몇 번씩 그런 놈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그 일이 있기 불과 얼마 전. 나를 노리던 주술사가 장막을 쓰지도 않고 쫓아오다 비술사 한 명을 죽였다.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냅다 도망쳐 버렸다. 주술사가 사고치고 주령에게 뒤집어씌우는 건 예삿일도 아니다. 아마도 그 일이 이사회까지 전해져 처형이 결정되었고 다른 누군가 나서기 전 고죠가 움직였을 것이다. 내 추측은 그렇다.

 "하나만 묻자. 죽은 비술사 말이야. 네가 한 거 아니지."

 "어차피 이미 조사는 끝났을 거 아니냐. 내가 안 그랬다."

 고죠는 말없이 픽 웃었다. 그 놈이 최선을 다해 잔예를 지웠다 한들 어차피 고죠의 육안에는 선명하게 보였을 것이다. 거기서 바로 오해를 풀지 않고 거시기하러 온 건 괘씸하지만 내가 후쿠오카를 떠나지 않은 이유도 그것이었다.

 "고죠 가 놈이가. 이야, 도련님이 이 시골까지 먼 일이고. 방금 그건 또 모꼬. 분명히 맞았는데. 말짱하네."

 "무하한 아이가. 내 첨 봤다. 뭘 밀고 땡기고 옘병을 한다카드만. 스즈카 고젠. 니 지금 으델 앵겨 있노."

 그 사이 놈들이 따라왔다. 나는 고죠에게 계속 붙어 있었다. 결단코 떨어지지 않을 각오로 아예 끌어안았다.

 "고전에서 보냈나. 와. 목을 따 버릴라꼬."

 "그래도 가스난데. 너무 매정한 거 아이가."

 "스즈카는 우리 선조님께서 봉인하셨고 수백 년 간 고죠 가 사유지에 묻혀 있었답니다. 엄연히 임자가 있어요. 마음대로 처분하면 곤란해요. 심지어 변태 부자한테 팔아먹으려고 했다니. 그런 발상은 도저히 못 따라가겠네요."

 "가진 게 돈밖에 없는 양반들의 유일한 취미를 욕하믄 쓰나. 존중해 드려야지. 우리 어르신께서 그쪽 설화 속 미녀에게 흥분한다 카셔서 기껏 잡아다 놨더니 금마를 확 쌔리뿌고 튀었다 안 카나. 다 된 밥에 재를 확 뿌리 삤다."

 "그래도 우리는 느그들처럼 피도 눈물도 없지는 않다. 이래 보믄 그냥 가스나잖아. 그제. 우째 살처분을 하니. 피비린내 좀 나도 괜찮으니까 죽이지 마라. 주력은 봉인하든지 말든지. 그 가스나 몸뚱이만 이쪽에 넘겨 주믄 된다."

 그냥 죽이라고. 살처분이든 뭐든 하라고. 변태 부자 저리 꺼져. 내가 이렇게 이를 북북 가는 동안 고죠는 조용했다. 놈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다 듣고 있으면서도 애써 무시하며 덤덤하게 내 머리나 뺨을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고죠 사토루 니도 그렇다! 목을 따러 와서 뭐 그리 애지중지 만지고 있어. 소름끼친다. 고마해라. 마 변태가."

 "같은 변태라도 나를 그쪽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죽기 보다 싫다잖아. 죽어도 나한테 죽겠다잖아. 그치, 스즈카. 어떡하지. 고죠 가 비전 도둑 때려잡기를 보여 줄까. 아니면 그냥 내가 좀 밀고 당겨서 엉덩이를 개발해 줄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이쪽도 너희가 소중하게 지켜 왔던 걸 받아 가야겠어. 그럼, 처녀 졸업 축하해."

 축제가 피날레에 접어들어 형형색색 불꽃이 밤하늘을 장식했다. 화려한 축하연 속 엉덩이를 부여잡고 쓰러진 놈들의 비명은 펑 펑 터지는 폭죽 소리에 기가 막히게 묻혔다. 지켜보는 나도 무하한의 진정한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됐다! 치라! 간다 가! 이제 다시는 볼 일 없을 기다! 변태 새끼야!"

 "고죠 사토루! 너마저! 대체 주술계의 미래는 을매나 암담한 기야!"

 계집애처럼 앙앙 울면서 큰소리치더니 놈들은 불꽃놀이가 막을 내린 뒤 피가 철철 흐르는 엉덩이를 겨우 들어올려 도망쳤다. 그 꼴을 보니 조금 지나쳤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잡혀갔을 때 잠깐이라도 울컥했던 걸 생각하면 속이 시원했다.

 "사토루."

 "응?"

 "미안⋯⋯."

 "으응? 뭐가?"

 놈들이 지껄인 말들은 진작에 잊어버렸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도 현시점에서 고죠가 주술사들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게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하고 조상을 능가하는 명세지재라는 점에도 이견이 없었다.

 "나 때문에 괜히 휘말렸잖니. 겨우 저런 놈들에게 모욕적인 말이나 듣고. 변태라든지, 정말 미안하다."

 "괜찮아. 틀린 말도 아니잖아. 내가 정말 너를 죽이러 온 거면. 변태처럼 끌어안거나 만지면 안 되겠지."

 이렇게 된 이상 책임을 물어도 곤란하지만 담백하게 인정하거나 웃어 넘기는 것도 그다지 개운하지는 않았다. 속이 빤히 보이는데 감출 생각도 없는지 고죠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만지지도 않은 살갗에서 눅진한 느낌이 났다.

 "모처럼 보내 준 기모노를 버렸네."

 "안 버렸어. 더럽혀지지 않았으니까."

 "이제 필요없어. 새걸로 갈아입어. 어쨌거나 이 마을 풍속이 너한테 꼭 들어맞아서 보기 좋아. 본가에서 입던 것들도 어울렸는데. 보내 줄게. 그리고 나 아직 체크인 안 했거든. 안내해 줘. 여기까지 오는 거 쉽지 않으니까 친절하게."

 그렇잖아도 민망한데 본가에서의 생활을 머릿속에 그리자 얼굴이 겉잡을 수 없이 달아올랐다. 고죠가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 생각나는 것이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당시에 입었던 기모노의 무늬까지 떠올리게 만드는 기억들.

 "조금은 달라진 줄 알았더니. 임무 중에 한눈파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이번에는 휴가도 아니고 출장이잖아. 내가 결백하다는 걸 알면서 아무것도 보고하지 않고 신나서 달려온 거냐. 참을 줄도 알아야지. 됐으니까 따라와라."

 고죠 가를 떠나 10 년. 머릿속을 비우기에 충분했고 마음속을 비우기에도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도 냉담해졌다. 이따금 고전에서 고죠의 일을 돕기 전에는 일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이였다. 그럼에도 외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 때문이다. 티격대면서도 존중해 왔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죠를 두려워하고 피하면서 한편으로는 믿고 싶었다. 그래도 감히 나를 어찌하지 못할 거라고. 결과적으로 내 생각은 틀렸다. 지난 겨울 깨달았다. 진실은 그가 나를 정말 죽이려 했다는 것이고 그 일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럼 도대체 이게 다 뭐냐. 이미 모든 걸 내려놓고 체념한 여자의 술주정이다. 마지막 발악이다. 고죠의 손에 죽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내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한 모습을 더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래 봬도 천년이란 세월을 통틀어 누구보다 강하게 나를 원하고 뜨겁게 안아 준 사내였다. 고죠 사토루는.

 고죠에게 받은 꽃다발의 의미를 생각하면 할수록 벅차오르는 감정이 오히려 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나는 꽃 하나를 취해 고죠에게 내밀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마지못해 받더니 애먼 꽃을 손으로 괴롭히며 말했다.

 "교류회 기간에는 많이 바쁠 거야. 그러니까 너랑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

 "교토부 교직원들도 오겠지. 떠들썩해지겠구나. 외로울 틈이 없을 것 같은데."

 "모두와 어울리는 게 즐겁긴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아.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오직 스구루뿐이었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아니라고 해도 어쩔 건데. 또 나랑 우타히메만 두고 사라질 거야? 무턱대고 의심하지 마. 내가 애도 아니고. 그럴 나이 한참 지났어. 둘만 남겨지면 부끄러워하고, 손만 스쳐도 얼굴 빨개지고, 애들은 참 좋겠다. 그치."

 "애들이랑 과정이 다를 뿐 어른들도 똑같다. 오히려 거리낄 것이 없지. 마침 조건도 맞잖아. 그때 나는 너에게 함께 나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너에게만. 그랬더니 네가 우타히메에게 묻더구나. 둘 사이에 끼어서 내가 즐거울 거라 생각했냐."

 "우타히메를 끌어들인 건 내 잘못이야. 솔직히 그때는 자신이 없었어. 너랑 제대로 마주보고 얘기할 자신이. 그 지경이 되고도 여전히 내가 실의에 빠진 애새끼일 뿐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너 혼자 가볍게 털고 일어나는 꼴은 보기 싫어서. 너도 나만큼 불편하라고 그랬어. 마음 고쳐먹었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더라. 전화도 끊어 버리고."

 "우타히메가 어렸을 때 너 좋아했던 거 아냐."

 "네가 질투했던 건 알아."

 "너도 우타히메에게 마음이 있었던 거 다 안다."

 "질투할 때의 네 표정은 지금도 조금 보고 싶네."

 나는 고죠를 빤히 쳐다보았다. 고죠도 내게 한 송이의 꽃을 돌려받고 나서 내심 기분이 언짢아진 모양이었다. 그런데 과거의 일 때문에 빈축까지 샀으니 아무래도 눈발이 설 것 같다. 고죠가 미간을 찌붓 찡그리고는 못내 투덜거렸다.

 "걔가 어쩌다 나를 보고 얼굴이 빨개졌다 해도 한때는 스구루한테도 그랬어. 나나미한테도, 하이바라한테도 그랬을 거야. 심지어 쇼코한테도 그랬는걸. 그게 뭐 어떻다는 게 아니라, 그때는 다 그래. 애들의 청춘 사업일 뿐이라고."

 서로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새침데기가 되는 여자애나 짓궂은 장난을 치는 남자애나 꼬맹이들에게는 흔한 일이다. 되돌아보면 소소한 이야깃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꼬맹이가 눈치챌 정도면 어지간한 복장대기가 아닌데 차라리 성이 풀릴 때까지 포달이나 부릴걸 그랬다.

 "그래서. 이제 바람 안 필 거냐."

 "너는. 너도 나 두 번 죽이지 마."

 뽀로통한 얼굴로 내숭을 떨었더니 고죠는 가소롭다는 듯이 더 뚝뚝하게 받아쳤다. 서로가 우스워서 서운한 마음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웃음이 났다. 겸연쩍은 마음에 해들거리고 그러다 밤이 소란스러워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

 "난쟁이똥자루, 너 자꾸 말 돌릴래. 사토루 군 데이트하고 싶어. 어쩌면 좋아."

 "내킬 때만 안아 주는 사토루 군이구나. 그렇게 원한다면 나한테 키스해 봐라."

 의기양양 재잘대고도 억눌린 사내에게 맹렬히 덮쳐지는 순간에는 살 떨리는 송연함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별안간 잡아채는 거친 손에 우련한 얼굴. 엄살이 아니라 뻣뻣하게 굳은 뒷목이 아릿해서 시름이 절로 날 지경이었다.

 닿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닿았다 착각할 만큼 아슬아슬했다. 손가락이 굽어지며 내 뒤통수를 긁어내렸다. 나는 겨우 작게 신음했다. 충동이 일었을지언정 애초에 고죠는 무엇도 취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순순히 내게서 물러났다.

 그는 거리낌없이 내팽겨쳤던 꽃을 다시 주워 바라보았다. 어둠속에서도 너울거리는 눈동자와 달리 생기 없는 얼굴이 소르르 기울어졌다. 어렴풋이 들리는 한숨소리에 나도 착잡한 마음이 들어 축 처진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오싹오싹 전율이 흐른다. 여인의 본능. 고죠가 발산한 것은 사내의 본능이기도 했으니 한숨 속에 분명 다른 것이 섞여 있었던 셈이다. 그래도 나는 처음부터 쉽게 손대지 못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를 도발할 수 있었다. 잠깐 발끈했을 뿐이지 그건 어떻게 생각해도 욕정과는 달랐다. 고죠에게는 자괴감을 남겼을지 몰라도 말이다.

 아이들에게 심지어 내게도 더러 유쾌한 모습만 보이려 하는 고죠가 여유롭게 웃지 못할 만큼 애태우는 것을 못 본 체하기란 어렵다. 나는 고죠를 달래는 척하다 그의 뺨에 입맞췄다. 쪽 할 때 내 손이 움찔할 정도로 그의 몸이 단단해졌다.

 또 한 번 질겁하고 희열하고 나도 자제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제 수컷은 들어가도 될 것 같다. 코 자라 얘야. 자장자장. 이러면서 씩 웃었더니 고죠가 으이그 하며 꽃을 막 휘두르고 야단이다. 하마터면 꽃으로 맞을 뻔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품에 쏙 들어갔다. 별로 타격도 없으면서 그가 비틀거리며 앓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 웃어넘긴다.

 "너 그렇게 웃는 거 되게 오랜만에 본다. 아니, 내가 본 적 있긴 했던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무튼 나한테 많이 보여 줘. 안 그럼 잊어버릴 거야. 인간들은 결국 모두 너를 잊어버려. 다른 고죠한테 또 괴롭힘 당할지도 모르고."

 "네가 마지막 고죠야. 앞으로 내 삶에 다른 고죠는 없을 거다. 생각하기도 싫어. 차라리 먼저 갈래. 인간들은 천천히 걷는 게 안 되잖아. 내가 너보다 빨리 걸을게. 뛸게. 그리고 너를 앞질러 갈 거야. 네 바람대로 뻔뻔하게 웃으면서."

 내 바람은 그것이니까. 내가 마지막까지 웃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과거에 내 남편이 하지 못했던 일. 네가 대신 해 줬음 좋겠다. 후손이잖아. 그런 쓸데없는 말들을 덧붙이게 되는 일은 없었다. 이마를 향해 다가오는 꿀밤이라 하기도 뭐한 손을 보았다. 그러나 차마 아프게 하지 못하고 그는 단지 부드럽게 타이르듯 나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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