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씩 빛바랜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어찌 보면 자신의 청춘이라 할 수 있는 그 시절의 꿈을 꾼다. 꿈에서 깨면 웃음밖에 나지 않는다. 실없는 웃음을 자아내는 내 청춘은 아닌 밤중에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똑똑똑.

 심야는 아니지만 졸린 얼굴로 문을 열었다.

 "고죠⋯⋯ 아니, 너는 고죠로군."

 "자다 일어났네. 그게 무슨 말이야."

 "꿈에서 네놈 조상을 봤다고 하면 믿을 테냐."

 "믿어, 믿어. 굉장하네. 좀 더 자세히 들려 주라."

 아직 비몽사몽해서 허상이 보이는지 고죠가 눈에 아른거렸다. 이제 와서는 내 앞에 있을 수가 없는 그 고죠 말이다. 눈을 씻고 보면 이 남자는 보란듯이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실소를 내뱉었다.

 상식 밖의 일, 앞뒤가 안 맞는 행동. 다행이랄지 불행이랄지 그런 조건 속에서만 통하는 둘만의 유머가 있다. 지금처럼 어떻게 생각해도 여유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닌 상당히 위험한 상황을 그렇게 웃어넘길 수 있다. 나도 괴짜이지만 애초에 고죠 사토루와 어울리면 평범한 사람도 한두 군데쯤 평범함에서 벗어나게 되기 마련이다.

 나는 문을 열고 비켜서는 대신 고죠에게 코를 바짝 댔다. 달달한 냄새. 그런데 과자나 사탕 따위는 아니었다.

 "주정뱅이, 이기지 못하는 술은 마시는 게 아니야."

 "나는 이길 마음이 없었어. 사양 없이 들이부었지."

 "이렇게 되면 맞선 얘기를 꼭 들어야겠는데. 여기서."

 "알잖아, 술 약한 거. 이번 기회에 내 안의 금기를 깨뜨린 거야. 마시고 또 마시고⋯⋯ 기분이 업 되어서 추억 얘기 좀 했어. 한 시간 정도. 뚱한 표정이 전 여친이랑 닮았다고 했더니 물을 끼얹고 나가 버리더라. 나는 젖지 않았지만."

 그야 너니까 물세례 맞을 짓을 하고도 젖지 않을 수 있었겠지. 어떤 느낌인지 마지막 한 마디로 확 와 닿았다. 과연 충격적인 이야기였으나 딱히 짐작 못할 일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본가에 한 번 들러라. 가서 너만 바라보는 불쌍한 양반들한테 사죄해."

 "대신 결혼해 줄 것도 아니잖아. 언제부터 우리 집 양반들을 걱정했다고."

 "걱정하는 거 아니야. 어디까지나 방관자로서 하는 충고다. 무덤에 갇혀 있을 때 나는 고죠 가의 역사를 모두 지켜봤어. 죽은 놈 산 놈 가릴 것 없이 다 알지. 지금까지 그 많은 놈들을 다 저주했다면 내 몸이 남아나지를 않았을 거다. 다시 말해서 너와 내가 원수지간이라 할지언정 그 많은 고죠들이 내 원수가 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시겠지. 아, 닫지 마. 나 조금 쉬어야 돼. 몸이 안 좋단 말이야. 정말 잠깐이면 되니까 들어가게 해 줘."

 "왜 이래?"

 "왜 이러는지 궁금해? 주정뱅이한테 별걸 다 묻네. 이유가 어딨어. 그냥 취한 거지. 여기서 쓰러진다? 잔다?"

 "이 놈이 취한 거야, 머리가 이상해진 거야? 어쭈? 막무가내야? 허락도 없이 쳐들어오시겠다? 와 봐, 인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두꺼운 낯짝과 황소고집. 그리고 현 당주는 기어이 문을 열어제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있잖아, 구체적으로 듣고 싶은데. 그 꿈. 어떤 꿈이었어?"

 "어떤 꿈이었냐고 물어도⋯⋯ 그냥⋯⋯ 닿는 꿈이었는데."

 "야, 너⋯⋯ 어디까지 한 거야. 우리 조상님, 거, 임자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너는."

 "정략결혼이었다 할지라도 내 할아버지는 내 할머니를 사랑해!"

 "누가 뭐래? 말 그대로 닿은 것뿐이야. 그냥 콕! 찔러 본 거라고!"

 "우리 가문을 상대로 그 따위 변명이 통할 거 같아? 여우! 불여우!"

 나가라고 순순히 나갈 놈도 아니고 계속 복도에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물을 따라 줬다.

 "사실대로 말해! 네가 울 할부지 꼬셨지!"

 "꼬신들 만지지도 못할 걸 어쩐단 말이야!"

 이런 시간이니 노바라도 분명 제 방에 있을 것이다. 술에 취한 놈이야 그렇다쳐도 어째서 나까지 거리낌없이 큰 소리를 내 버렸을까. 아무래도 잠이 덜 깼나 보다. 그만큼, 혼란스러울 정도로 닮았다. 수백 년을 뛰어넘는 후손 따위가.

 "나도 알아."

 "네가 알긴 뭘 알아."

 "너, 할아버지의 여자였잖아."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렇다 할지라도 수백 년 전 일이다. 그때는 남자가 여자를 여럿 거느리는 게 평범한 일이었어. 오히려 그러지 못하는 놈이 모자란 인간 취급받던 시절이었지. 네 할아비라고 별 수 있었겠냐."

 스스로 낡아빠진 기억이라면서 여전히 닮은 얼굴만 봐도 부아가 치밀어오른다는 게 한편으로는 수치스럽다. 어떤 이야기는 죽어도 내 입으로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 누구든 마찬가지이지만 최소한 이 녀석 앞에서 만큼은. 현기증이 나고 답답하다. 빌어먹을 꿈만 꾸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나도 컵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풉! 하하하! 진짜야? 본처가 있는 남자인데도 좋았어? 일부다처제는 인간들의 관습일 뿐이야. 너랑은 상관없잖아. 지금도 이렇게 화내면서 필사적으로 감싸려 들고. 본심은 뭐야. 진짜 사랑했나 보네. 사랑만 있으면 다 용서가 되는 거네."

 "⋯⋯."

 "나쁜 습관일수록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거 알잖아. 주술사 가문은 말할 필요도 없지. 옛날하고 다른 점이 있다면 대놓고 두 살림을 차리지는 않는다는 것뿐이야. 그래, 네 말대로 별 수 없어. 당주님도 말이야. 참을 수 없는 일도 있거든."

 무거운 시름이 눈앞을 가렸다.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다. 힘을 써서라도 내쫓아야겠단 생각에 눈을 떴다. 어느새 고죠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평소에도 그가 갑자기 일어서거나 불쑥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친다. 체격만으로 충분히 위압감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정신이 없긴 한가 보다. 거대한 주정뱅이를 상대하고 있다니.

 퍽.

 나는 주먹을 날렸다. 저질러 놓고도 믿기지 않았다. 움켜쥔 주먹에 뜨겁고 아릿한 느낌이 분명 남아 있었지만 그 순간까지도 닿았을 거라고는, 맞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그럴 리 없으니까. 고죠는 내가 뒷걸음질을 칠 때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선글라스를 벗었다. 결국에는 그가 스스로 자초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고죠 사토루에게 시원하게 한 방 먹이는 것. 톡 까놓고 말해서 그것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내게는 절대로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죠가 꼬부랑 할아버지로 전락한 뒤에야 될까 말까 한 일이라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꿈이 실현됐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쾌함 그 이상의 놀라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휘몰아쳤다. 넋을 놓은 채 굳어 버릴 만큼.

 이렇듯 내게 아찔한 경험을 선사한 뒤 그의 반응이 어떤 의미에서는 나를 더욱 두려움으로 내몰았다. 입술을 만졌을 때 분명히 피가 묻어나온 것을 보았지만 그는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린 채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진짜 악마의 소행은 지금부터다. 만약 고죠에게 무하한이 없다고 상상해 보자. 실제로 이것은 더할나위 없는 기회다.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사단의 원흉이 놈들에게 있다. 빌어먹을 고죠 놈들만 아니었으면. 과거에 나를 봉인한 것, 봉인이 풀린 뒤에도 원치 않는 삶을 살게 한 것, 앞으로의 일들도, 여기서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 끝이다.

 "일단 묻겠다. 왜 나를 막지 않은 것이냐."

 "어쩌겠어. 쓰담쓰담이라도 해달라고 할까."

 "차라리 그렇게 하지. 쓰담쓰담 하면 되잖아."

 당황한 나머지 되는 대로 지껄였다. 나는 될대로 되라고 생각하며 고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만질 수 있었고 두드려 줄 수도 있었다. 파란 눈동자를 바라보며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고죠가 얌전히 있어 준 덕분에 뺨을 만지면서 눈꺼풀이 닫히고 속눈썹이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멍해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등골이 오싹했다.

 "흠흠. 보아하니 한동안 여자를 안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긴 한가 보군."

 "말했잖아⋯⋯ 장난칠 생각 하지 마. 이상한 짓 하면 손목 날려 버릴 거야."

 "마음대로 해라. 내가 손해보는 것도 아닌데. 이번에는 대가를 받아야겠다."

 손을 내밀자 고죠가 콧방귀를 뀌었다. 주머니에서 사탕 따위가 나올 거라 생각한 나도 웃기지만 실물 지갑과 카드의 등장에는 과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떨결에 받아든 카드가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자신이 다른 무엇도 아닌 돈의 위력에 압도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따금씩 애들과 밖에서 배를 채울 때 정도는 써도 되지 않을까.

 "고마워. 기분 좋았어. 가지고 싶은 게 뭐야? 예약 필요해?"

 "애들이랑 편의점 갈 거다. 내가 사고 싶어. 정말로 써도 되냐."

 "아⋯⋯ 머리야⋯⋯ 아유, 진짜. 그럼, 그럼. 마음대로 써도 돼."

 피곤했는지 고죠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빛이 성가신 듯 얼굴을 가리기에 취침등을 켜 두고 소등했다.

 "뭐, 뭐야."

 "돈도 받았겠다⋯⋯ 뭐, 그런 거지."

 "아니, 너는, 무슨, 됐거든! 빨리 켜!"

 낄낄 웃으며 다시 불을 켰다. 그 사이 벌떡 일어난 고죠는 이불을 끌어 모아 제 몸에 둘둘 말고 있었다. 참 나, 누가 잡아 먹냐. 나는 바닥에 앉아 침대에 등을 기댔다. 머리 맡에서 고죠가 한숨을 푹 쉬며 침대 아랫쪽으로 돌아누웠다.

 "장난치지 말랬잖아."

 내 머리에 묵직한 손이 올라왔다. 쓰다듬는 손길이 겁먹은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그에 비해 고죠의 목소리와 말투는 소름끼칠 만큼 태연하고 담백하게 들려서 두 개의 감각이 주는 짙은 위화감이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어때?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아⋯⋯ 안 되는 거 알아. 맹세하는데 나는 진심으로 손톱 하나 안 건드리려고 했어. 어떡하지. 내가 만지니까 좀 더, 뭐랄까, 안심이 돼. 이렇게 손을 뻗으면 바로 닿는 곳에 있어서. 만질 수 있어서."

 뒤돌아보는 찰나 그의 손에 뺨을 부딪혔다. 따뜻한 체온이 일부러 닿지 않으려는 듯 근처를 맴돌고, 살며시 스치고, 멈추었다. 그렇게 전과 사뭇 다른 느낌으로 그와 내가 서로에게 닿았다. 불안한 내 마음도 곧 안정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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