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인의 자식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무인이 되고, 전쟁에 나가 싸운다. 그러다 전사한다고 하는 뻔한 레파토리는, 작금같은 시대에 슬픈 이야기로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설령 그러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내가 자신의 탄생을 남들과 다름없이, 한때나마 일족 사람 모두에게 ‘축복’으로 여겨지기를 원했다는 사실이 더 슬프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현재 센쥬와 우치하의 관계를 생각하면 나는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에다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뿐이라면.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꺄르르 들려온다. 가끔은 나도 또래의 아이들처럼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싶다. 가끔은 내가 웃지 못하는 것이 정말 심각한 문제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곤 한다. 이렇게 살다가 냉소주의나 허무주의에 빠져서 메마른 우물처럼 우울한 청춘을 보낸다면 그거야말로 최악의 전개가 될 것이다. 어른들에게는 이제 겨우 7살 된 여자아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유별나 보이려나. 그럴지도 모르지만, 대개 그들은 나에 대해 둘 중 하나의 태도를 보인다. 미워하거나, 불쌍하게 여기거나.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긴 해도, 굳이 더 싫은 쪽을 고르자면 나는 후자가 더 불쾌하다. 내 생일날 친구들이 놀러오지 않아도 괜찮다. 내게는 그런 녀석들보다 가족의 존재가 훨씬 크다. 두 분께 축하를 받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단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같은 날 집에 들어가는 것이 두렵다. 왜냐면 부끄럽다.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지금까지 키워 주신 두 분의 앞에서, 일족 모두에게 미움받는 못난 딸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천하의 불운아가 되어 감상에 젖어 있는 건 나 자신도 혐오하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숨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별 수 없다. "……." 이파리가 무성하게 자란 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지에 앉으면, 그리고 밑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정수리를 쳐다보면,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내 또래 중에서는 누구도 여기까지 올라올 수 없을 것이고, 이곳의 나를 볼 수도 없을 테니까. 나는 이만큼, 여기까지 노력했다고, 그렇게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 하아─. 그래도 외로움을 느끼는 건 인간의 본성 때문에 어쩔 수 없나 보다. 여남은 거리에 있는, 예쁜 장신구들을 서로에게 보여주며 웃고 떠드는 여자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솔직히 조금 부럽다. 어쩌면 나는 평범한 여성으로는 성장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어른이 되어서도 남자처럼 옷을 입고, 남자처럼 행동할지도… 이런 생각을 해야만 한다니, 역시 나는 사내로 태어나는 편이 좋았다. "." 갑자기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언제나 듣는 소리긴 한데 오늘은 들리지 않는 게 정상이랄까, 쉬는 날이니까 그 목소리를 듣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토비라마 님?" 여자아이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반대쪽,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돌아 앉았다. 토비라마가 내게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조심스레 가지를 딛고 내려가다 확 뛰어내리자 그런 나를 신기한듯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자신들에게 불가능한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내가 이상해 보이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샘이 날 것이다. 그래, 뭐, 지금은 그거면 됐다. 마음껏 부러워하라구. "어쩐 일로 나오셨습니까?" "나라고 매일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줄 아냐." "네, 그런 줄 알았는데요." "됐다. 그보다 나를 따라와라." 뭘까. 혹시 생일 선물? …라고 은근히 설레발치며 토비라마를 따라 그의 사가로 왔다. 원래 쉬는 날에는 그다지 발을 들일 일이 없는 곳이다. 그게 새삼 재밌달까. 뭐든지 간에 토비라마가 나타나 준 덕분에 우울한 생각을 떨쳐낼 수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그의 방에 들어가, 언제나 내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폴짝 뛰어 앉았다. 탁자 위에 낯선 상자가 놓여 있었다. 토비라마는 맞은편에 앉아 상자를 열었다. 내용물을 보자마자 가슴이 찡해졌다. 분명히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다시 봐도 예쁜, 예쁜 장신구. 정말 갖고 싶었는데, 어차피 알아봐 줄 사람도 없겠지라고… 나도 모르게 또 우울한 생각에 빠져서 그냥 지나쳤었다. 바보같이. "분명히 말해 두는데, 나는 너와 걷고 있을 때 네가 다른 것에 한눈 파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덕분에 고민할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네가… ‘예쁘다’라고 아주 노골적인 힌트를 줬거든. 그건 나쁘지 않구나. 내 특별히, 앞으로도 그 정도의 불성실함은 용서해 주마." 토비라마의 능청스런 말투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애써 감추지 않고 기뻐했다. 얼마 전, 토비라마를 따라 일족의 어르신을 뵈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머리에 작은 장신구를 꽂은 여자가 두 사람을 지나갔다. 무심코 그녀에게 시선이 향했고, 나도 모르게 예쁘다고 중얼거렸다. 머리핀에 달린 등나무꽃이 흔들흔들 예쁘게 움직인다. 수공예품이라 완전히 똑같은 모양은 아니다. 그래도 마음에 든다. 어린애가 갖기는 어려운 물건이고 어울리지도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부츠마 님의 아드님께서 아끼시는 시동이라면. 어울리는 건 둘째치고, 선물로 받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이렇게 말이지. "예쁘다……." 이럴 때는 속물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달까, 사랑도 좋고 다 좋지만, ‘부(富)’의 편리함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역시 돈은 어른들이 말하는 술 같다. 삶을 촉촉하게 적셔 주는 것. "헤헤헤……." 하지만 굳이 이런 날이 아니라 해도, 평소에도,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온화하게 내리는 것이 있다면 그건 도련님의 섬세함이다. 내게 있어서 돈보다 값진 것이고, 언젠가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감사합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헤실헤실 웃으며 상자에 돌려놓으려는데, 토비라마가 그것을 저지했다. "어째서 지금 하지 않는 거냐?" "토비라마 님도 참. 어른이 될 때까지 아껴 둬야지요. 걱정마세요, 저는 토비라마 님을 생각해서라도 여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어요. 제 말은 그러니까, 될 수 있다면 사내처럼 살아 보고 싶기도 했지만요." "왜 그런 생각을 해? 넌 전혀 사내처럼 보이지 않는달까, 음… 굳이 말한다면 나는 우리 나이를 고려하더라도 네가 이상적인 여성상에 매우 가깝다고 본다만. 일부러 멀리하다니, 이상하지 않냐." "토비라마 님이 여자로 한 번 살아 보세요. 이런 시대에 ‘이상적인 여성’이라는 게 칭찬인지, 아닌지.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를걸요. 애초에 저는 이번 생에 별로 기대를 걸지 않았어요. 그도 그럴 것이… 에잇, 말하기도 귀찮네요." "내 말은… 잠깐, 기다려. 네가 내 선물을 상자 안에 고이 모셔 둘 줄 진작에 알았다면, 난 그것을 택하지 않았다. 여자가 되겠다느니, 사내처럼 살고 싶었다느니, 이해할 수가 없구나. 너는 지금도 여자다. 게다가, 네가 기대를 버린다 해도 나는 그럴 수 없어. 넌 내 사람이잖냐." 언제나 찰떡처럼 내 마음을 알아채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토비라마도 이번에는 꽤 단호했다. 지금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아껴 두었다가 나중에 좀 더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쑥스러워져서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노라면, 그가 직접 내 머리에 예쁜 머리핀을 장식해 주었다. "나를 위해서라도 더 씩씩해지거라." "……." "왜 그렇게 쳐다보지?" "토비라마 님의 ‘내 사람’이라는 거 말예요… 가끔은 진짜, 뭐랄까,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거 아세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말하고 계시는 거면 앞으로 오해 안 받게 조심하세요. 순진한 여자애들 울리지 말고요." "뭐가 의미심장하다는 건지 모르겠다만, 내 사람이라 할지라도 필요하다면 울려야지. 그런 다음 달래 줄 거다. 그리고… 나 또한 쉽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해. 살이 썩어서 문드러지기 전까지는 내 팔다리가 아파도 떼어낼 수 없으니까. 내 시동인 너는 팔다리 이상이다. 그러니 속썩이지 마라. 적어도 날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잘해 줄 테니까." 모른척하면서 괜히 기대하게 만드는 게 벌써부터 수준급이시네. 그런데 나는 왜 기쁠까. 앞으로 고생할 게 빤히 보인다. 이용당할 줄 알면서 그의 사람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더 얄밉다. "믿어도 되나요?" "믿지 않고 버틸 수 있겠냐." "제가 배신할 것 같진 않으세요?" "하고 싶어도 못 하게 만들 셈이다." 토비라마의 시동이 되기 전, 하시라마에게 자기의 시동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연히 거절했다. 최대한 모욕적인 방법으로… 폭력으로… 그렇게 하시라마의 제안을 거절하고, 얼마 후 나는 토비라마의 사람이 되었다. 그러면 몸이 고생할지언정 적어도 마음은 편할 줄 알았다. "형님에 비하면 나는 아직 부족한 편이다. 너도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정직하게 말해 전자는 아직 허세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후자는 다르다. 그런대로 자신있으니 못 믿겠으면 두고 봐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쩐지 길을 잘못 든 것 같다. 차라리 바보 쪽을 택하는 게 나았을까. 아니, 아니. 역시 아니다. 그 녀석의 선물 따위는 생각하기도 싫다. 나까지 바보가 되어 버릴 거다. "저기, 토비라마 님. 혹시라도 오늘 중에 하시라마랑 마주치시게 되면, 제 말 좀 대신 전해 주세요. ‘나한테 선물 주려고 해 봤자 소용없어, 이 바보야!’라고. 집으로 찾아온다 해도 절대 안 나갈 거라고요." 토비라마는 피식 웃었다. 이런 말을 진지하게 하고 있는 내가 우스워 보이기도 할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알기에 오히려 그에게는 더 어처구니없게 들리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수줍어하면서 약간의 씁쓸함을 느끼기도 하고, 토비라마에게 받은 선물을 만지작거렸다. "형님이 그렇게 무서우냐?" "바보가 얼마나 무서운데요." 당신도 알잖아요, 형이 어떤 사람인지. 이번에도 어떻게든 내 앞에 나타나서 멋대로 준비한, 심지어 그럴싸한 선물을 들이밀 거예요. 그리고 나는 마지못해 받아 주겠죠.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해서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당신이나 하시라마에 비하면 난 아직 약해요. 두 사람에게 얽매여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궁리하는 게 점점 골치아파진다고요, 나는. "이따금씩 널 보고 있으면 분하다." "분하다뇨?" "이상하게 오기가 생긴단 말야. 마치…" "?" "아무것도 아니다. 등나무꽃이 잘 어울리는구나." 비록 향기는 나지 않지만 장신구에 매달린 보라빛 꽃잎은 봄의 그것처럼 사랑스러웠다. 정말 내게 어울리는 걸까. 아니면 토비라마의 눈에 그렇게 비칠 뿐일까.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붉은색 눈동자 너머의 그가 무언가 신중하게 헤아리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마치 장기판 앞에 앉아 고민하는 것처럼. 가끔이지만 종종 그런 기분이 들곤 한다. 자신의… 어떤, 목표를 바라보는 듯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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