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쥬 토비라마. 센쥬 일족의 당주 부츠마의 차남인 그는 올해로 다섯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러니까 이제 겨우 나보다 한 살 어린 도련님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하필이면 내가 시동으로… 아니, '보모'로 발탁되어서 그의 유모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알고 있던 것은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 센쥬 토비라마에 대해 몇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첫째, 그는 나처럼 책읽기를 좋아한다. 둘째,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철부지 꼬맹이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뭐, 그의 핫바지 같은 형 하시라마보다는 똑똑할 거라 기대하고 있다. 적어도 화단 앞에 옹송그리고앉아 혼잣말을 하거나 담벼락을 넘어 들어온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는 모양이니까.

 앞으로 내가 시중들어야 할 도련님이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올 때마다 손을 깨끗이 씻도록 일일이 간청을 드려야 한다면 내 인생은 정말, 정말, 지금보다 더 끔찍해질 것이다.

 나라가 수십, 수백 개의 부족으로 갈라져 전쟁이 만연한 시대에 무사의 자제 정도면 아주 나쁜 것도 아니지만, 아무리 멍청하다 해도, 게으르다 해도, 여자인 것보다 더 큰 패널티는 이 세상에 없다.

 그렇다.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죄. 단지 그것 때문에 나는 도련님의 시동 따위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도망이라도 치고 싶지만 나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센쥬 일족의 본거지를 떠나는 순간 내 운명은 둘 중 하나로 정해지는 것이다. 타부족의 무사들에게 포로로 붙잡히거나, 화적들에게 붙잡혀 갈기갈기 찢겨지거나.

 그렇게 개죽음을 당할 바에는 도련님의 시동이 아니라 사창가의 시동이 된다 해도 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훗날을 도모해야 할 때다. 이제 와서 가랑이 사이에 뭔가를 붙이고 다시 태어날 수도 없으니.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악 물고 버텨서 끝까지 살아남기로 작정했다.

 처음 귀인과 만날 때는 시동이 다과를 가지고 들어가는 관례가 있다.

 세공 장인이 무늬를 새겨넣은 쟁반과 그릇, 도자기 장인이 빚은 주전자와 찻잔… 염병할.

 욕지거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유모에게 야단맞지 않도록 이번에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무사히 시동 생활을 마치고 싶거든 가시 같은 성정부터 둥글게 다듬는 편이 좋을 거다.' 아버지께서 내게 늘 말씀하셨던 말씀이다.

 이제 나도 젖먹이가 아니니까 알아서 기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다. 천둥벌거숭이 장남 대신 차남이 후계자 자리를 이어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토비라마 님, 저 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책으로 배운 예절을 그대로 따르니 안에서 도련님의 앳된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예절이고 뭐고 잊었다.

 벽장 가득 꽂혀 있는 눈부신 보물들… 지금까지 내가 읽어 보지 못한, 아니, 구경도 하지 못했던 상서로운 책들이 가득했다.

 무심코 침흘리며 바라보다 하마터면 차가 흘러넘칠 뻔했다. 서둘러 이성을 되찾고 첫마디를 끊었다. 사람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토비라마와 나의 대면식이었다.

 "안녕하세요."

 "나중에 천천히 둘러봐도 좋으니 내 책에 차를 엎지르지 말거라."

 목소리는 영락없는 5살 도련님이었지만 말투는 부츠마 님과 똑 닮아서 마치 어른 같았다. 단지, 젖먹이들의 혀 짧은 소리는 도련님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마치 '나듕에 천천히 듈러봐됴 됴으니까 내 책에 챠를 엎디르디 말거라' 하는 것처럼 들려서 귀엽다고 생각해 버렸다.

 "나중에 빌려도 됩니까?"

 내가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묻자 토비라마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나를 돌아보았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 붉은색 보석을 반질하게 닦아 놓은 것처럼 눈동자가 촉촉하게 반짝였다.

 둘 다 부츠마에게서 태어난 자식임이 분명한데도 형과는 생김새가 많이 달랐다.

 하시라마가 부츠마의 유년기 시절과 판박이라면 토비라마는 미인으로 정평난 어머니 쪽 유전자를 물려받아 예쁘고 가냘픈 외모였다.

 "닳아서 떨어질지언정 책장 안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에게 읽혀지는 걸 책도 원할 거다. 왜냐면 그게 책의 소임이니까."

 나는 찻잔에 차를 따르며 토비라마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아마도 토비라마는 나와 만나기 전 나에 대해 미리 조사했을 것이다. 내가 시동이 되길 꺼려했다는 이야기도 들었겠지.

 "감사합니다."

 나의 대답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책처럼 자신의 소임을 다하겠다는 맹세. 어쩌면 토비라마는 내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너는 내 곁을 지키게 될 것이다. 음… 이 차, 네가 직접 내린 거냐?"

 "예."

 어지간히 썼는지 토비라마가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혓바닥을 빼꼼 내밀었다. 잠시뿐이었지만 그런 행동에는 분명히 아이다운 품성이 어려 있어서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대충 어림잡아 한 꼬집 정도면 될 줄 알았는데 찻잎을 너무 많이 넣었다 보다. 차를 내릴 때는 유모에게 폭풍 잔소리를 들으며 다과를 완성한 뒤였던 터라 귓구멍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귀인과 시동이 처음 만나는 날이지 토비라마와 내가 결혼하는 날이 아니잖은가.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여 준비해야 하나 싶었다.

 혹시라도 도련님의 성격이 뭐 같아서 내가 마음에 안 든다며 쟁반을 엎어 버릴지 누가 아는가. 그러면 정성스레 준비해 봤자 소용 없지 않은가.

 "보아하니 차를 내리는 것에는 흥미가 없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책이라면 다르겠지. 편식을 해도 책은 가려 읽지 말라고 했다. 저기 다과에 대한 책이 있으니 가져가서 읽어 보거라."

 "그리 하겠습니다."

 나는 토비라마가 가리킨 책장 앞으로 가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과연, 다과의 모든 것이 상세하게 쓰여 있었다.

 시동으로서 귀인을 따른다는 것은 역시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었다. 책의 두께만 봐도 나의 귀인께서는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책을 향한 너의 진실한 마음 만큼 내일은 쓰지 않고 맛있는 차를 내어오리라 나는 믿고 있겠다."

 "예……."

 부엌이 아닌 방에서 공부할 수 있다면 한결 수월하겠지만 시간을 하루밖에 안 주다니. 아무리 책을 사랑하는 나라도 뜨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내일도 맛없는 차를 내어온다면 학문에 대한 나의 열정까지 의심받게 될 것이다. 내 자존심을 걸고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밤을 새서 '제1장 다과의 기본'만이라도 정독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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