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년을 걸쳐 내려오는 인간의 풍랑과 풍화가 담긴 역사서. 그러나 여느 책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체감하는 시간은 고작 한두 시간일 뿐이다. 책 한 권 분량의 재밌는 이야기랄까.

 살벌하게 대립하던 세력이 통합되어 평화를 맞이했다는 구절을 읽을 때마다 생각하곤 한다. 페이지를 넘기듯 현재의 상황을 피할 수는 없는 걸까. 하다못해 빠르게 지나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오늘따라 부슬비가 내린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어서 어둑할 때 억지로 환하게 만드는 건 토비라마도 나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등불 대신 촛불을 켜 둔다. 종이가 주홍빛으로 은은하게 물들었다.

 이런 날에는 얌전한 선비 같은 토비라마의 곁을 조용히 지킨다. 책을 읽다가 사색에 잠기고, 목이 마르면 차를 마시고… 내가 할 일은 그게 전부다.

 책장 앞에서 뭘 읽을까 고민하다 묵직한 역사서 한 권을 빼들었다. 나도 가지고 있는 책이라 이미 몇 번인가 정독했지만 왠지 모르게 손이 갔다.

 "어라."

 팔랑거리며 종이를 넘기는데 갑자기 쪽지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틀림없이 누군가 책 사이에 꽂아 두었을 테지만, 토비라마라고 하기에는 쪽지가 견뎌낸 세월이 그의 나이보다 더 많아 보였다.

 "토비라마 님, 이것 보세요."

 조심스레 꺼내자 토비라마가 읽고 있던 책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어 이쪽을 향했다.

 표정을 보니 역시 본인도 모르는 일인 것 같았다. 어차피 주인에게 잊혀진 물건이니 그냥 펼쳐 보기로 했다.

 "어째서 나는 발견하지 못했지?"

 "책을 읽으면서 꾸벅꾸벅 졸았던 게 아닐까요?"

 "그럴 리가."

 "토비라마 님도 가끔은 졸 수 있죠 뭐. 그 정도는 인정해도 괜찮잖아요. 원래는 다섯 살 남자아이가 역사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거든요."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책은 고모님께 받은 것이다."

 "저희 어머니께서 주셨다고요?"

 친족들 가운데 부츠마 님과 연배가 비슷하신 분은 어머니가 유일하다. 그래서인지 두 분은 어렸을 적부터 친남매처럼 각별히 지내셨다고 한다. 하시라마도 어머니를 아버지의 친남매로 여겨 예전에는 고모님이라고 불렀다.

 토비라마까지 그럴 줄 몰랐는데… 뭐, 도련님은 대화만으로 충분하니까 누구처럼 때려 가며 정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때는, 부츠마 님을 외숙부라 부르는 걸 그만두고 하시라마의 습관까지 바꾸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

 '너는 나랑 결혼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멋대로 내 가족이 되지 마!'라고 절대로 톡 까놓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결국 하시라마가 내 마음을 알아 줘서(?) 다행이었다.

 지금은 내 요청을 받아들여, '사부님'이라 부르고 있다. 한때 나랑 같이 어머니 밑에서 수학을 하기도 했으니까.

 "저희 어머니를 고모님이라고 부르는 건 그만두세요."

 "어째서?"

 "저랑 토비라마 님까지 사촌지간이 되어 버리잖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다. 다른 호칭을 생각해 보도록 하지."

 예상 이상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아무리 빠릿빠릿한 도련님이라 해도 놀라울 정도다. 불현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바보 하시라마랑은 너무 달라서.

 부끄럽지만, 나는 지금부터 차근차근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워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이곳에서 살아 가는 방법이니까.

 "이 쪽찌에 적힌 글귀들… 어쩐지 눈에 익다 했더니, 저희 아버지 글씨체네요. 그리고 이건… 으음, 확실하지 않지만 어머니의 예전 글씨체 같아요. 두 분께서 붓으로 대화를 나누신 모양이에요."

 두 분의 대화는 한 토막씩 여기저기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순서를 알 수는 없었지만, 흐름을 따라서 천천히 읽어 나가다 보니 내용이 대략적으로 짜맞추어졌다.

 - 놀라지 말아요. 오늘 정원에서 누군가 내 등을 떠밀었어요.

 - 부츠마 님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니 믿기지 않아.

 - 누구든지 가까이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겠죠.

 - 만약 당신이 유산한다면 나는 센쥬의 처녀를 욕보이고 도망친 비겁자가 되겠군.

 - 이제부터 저들은 전쟁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거예요. 당신을 타지마에게 보내는 것도 함정일 테니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가지 마세요.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게 뻔해요.

 - 당신과 아이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저쪽에서 눈치 채지 못하게 할 테니 걱정 마.

 -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요. 내 집처럼 느껴지지도 않구요. 이제 아무도 믿을 수 없어요. 부츠마는 예전과 달라요. 당주가 되고 나서부터 오로지 득과 실만 생각하는 냉혈한 같아요.

 - 당신의 형제를 믿어. 모든 게 나 때문이야.

 "……."

 마지막까지 읽은 뒤에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쪽찌를 접었다.

 "뭐라고 적혀 있냐?"

 "그, 그건… 비밀입니다. 연애편지라서요."

 정말 부츠마 님께서 어머니 뱃속에 있던 나를 이용하려고 하셨을까. 이 쪽찌가 토비라마의 책에 끼워져 있던 이유는 어쩌면 어머니께서 의도하신 건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린 그에게 경계심을 심어주기 위해, 딸을 이용하려 들지 말라는 경고를 하기 위해.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예…?"

 "나를 보는 네 눈빛이 갑자기 낯선 이를 보는 듯해서 말이다."

 "……."

 하시라마는 부츠마 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토비라마는 뼛속까지 부츠마 님을 빼닮았다.

 나도 알고 있다. 어머니께서는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계시겠지. 자신을 위해 이 쪽찌는 다시 책에 끼워 두는 편이 좋을까.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듯 토비라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쪽찌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끝까지 연애편지인 척, 부모님의 사생활이라며 능청을 떨어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치하와 센쥬의 관계. 지금까지 단순히 증오심만을 축적해 온 것은 아니다. 상처 입힌 만큼 상처 받고 거기에는 반드시 책임이 뒤따랐을 것이다. 머잖아 하시라마와 토비라마가 부츠마 님의 뒤를 이어가겠지.

 희생을 줄이려고 최선을 다 해도 어린아이 생명 하나를 지키는 것이 고작이다. 그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내게도 전장에서 피를 흘리는 것 만큼 고통스러울 거라 생각하면 솔직히 두렵다.

 "토비라마 님, 일전에 말씀하셨죠?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는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당신의 사람이 되면, 그러니까, '의미만 있다면' 한없이 아껴 줄 수 있다고… 이제 보니, 하시라마랑 형제가 분명하네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글쎄요-."

 덕분에 어떻게 해야 제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두 사람 곁에 남을 수 있는지 알게 됐어요.

 어쩌면 자신이 나쁜남자에게 끌리는 타입의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도요.

 스스로 저주를 걸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그래도 여전히 당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지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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