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어진 커다란 학당이 있다. 근처에 학습기관이 몰려 있어서 서적을 사거나 빌릴 수 있는 가게들도 많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밑에서 수학했기 때문에 학당에 다니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책벌레라는 별명을 가진 만큼, 원하는 서적을 구하기 위해 이 거리를 제 집 앞마당처럼 드나들곤 했다.

 "야, 저기 좀 봐. 푸르죽죽한 우치하 계집애가 지나간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 이제는 듣기만 해도 미간이 찌푸려지는 녀석들과 마주쳐 버렸다. 이쯤되면 슬슬 질릴 법도 하건만. 어찌나 내게 관심이 많은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내가 아무리 책을 좋아한다 해도… 이러니까, 거리가 아이들로 북적이는 시간에는 웬만하면 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은 토비라마의 심부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책을 가지러 다녀와야 했다. 가끔은 싫어도 마주칠 수 밖에 없다.

 "계집애가 공부해 봤자지. 하하하."

 "주제도 모르고 설치지 마라, 우치하 년아."

 내가 지금은 좀 바쁘거든.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저번처럼 쥐어터지고 싶지 않으면.

 …이렇게 말하고 싶은 정도의 분노를 얼마나 오랫동안 억눌러 왔는지, 입술을 꽉 깨물고 참느라 피가 날 지경이다.

 그나마 이제는 담담해진 덕분에 입 아프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대신 깔끔히 무시하는 것으로, 내가 당한 모욕감을 보다 간편히 녀석들에게 돌려줄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다 뭐냐?"

 "무슨 책이냐니까?"

 내 앞에서 만큼은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 녀석들에게 ‘무관심’이란 어찌 보면 가장 모욕적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소란을 일으켜 봤자 이 중에서 피해를 볼 사람은 나다.

 지금까지의 경험이 없었더라도, 그런 뻔한 전개를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

 "이 기지배가, 자꾸 무시할래?"

 "대답하지 않으면 후회할걸?"

 "재수없는 년. 에잇!"

 이번에는 적잖이 약이 올랐는지, 갑자기 내가 안고 있던 책들을 탁 치고는 후다닥 달아났다. 거기까지는 지금까지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니 어렵지 않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녀석들 중 하나가 책을 가져갔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그냥 넘어가려 해도, 이번에는 도가 지나쳤다. 왜냐면 저 책은…

"이런 ㅆ… 내 책 내놔!!!"

"가져가 봐라! 꺄하하!"

 다다다다다─.

 토비라마가 부탁했던 책. 기다리고 있을 텐데.

 녀석들을 쫓는 데 낭비할 시간을 생각하면, 어쩌면 토비라마는 내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참고, 새책을 사오지 그랬냐고.

 하지만… 그것과는 관계 없이, 참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너네, 진짜 죽을 줄 알아!"

"으악, 계집애가 화났다!"

 어떤 경우에도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 냉정하지 못한 결과는, 바보같이 엎어지는 것뿐이다.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녀석들도 이런 쪽으로는 꽤나 머리가 좋다는 것을.

 뻔한 함정이었는데도 보기 좋게 넘어졌다. 재밌다고 웃는 녀석들을 이 악 물고 쫓아갔다.

 다행히 책을 되찾아 올 수 있었다. 발목을 삐긴 했지만 녀석들의 표정이 무슨 괴물이라도 본 것 같았다. 당분간 조용하겠지.

 "다녀왔습니다."

 절뚝거리며 방으로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토비라마가 미간을 좁혔다. 물어보지 않아도 대충 무슨 일인지 알 것이고, 거기에 냉정하게 대처하지 못한 내가 못마땅해 보였을 것이다.

 "어찌 된 일이냐?"

 "넘어졌어요."

 내 목소리에는 여전히 분기가 섞여 있었다. 나도 딱히 다정한 위로 따위는 바라지 않았다. 물론, 거짓말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토비라마가 믿든 믿지 않든 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러니까, 짐이 많아서 눈 앞의 돌부리를 보지 못했던 것뿐이다.

 "걸음걸이를 보니 의원에게 보여야겠군."

 "그럴 필요 없어요. 이 정도 가지고 무슨…"

 나는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

 아픔을 눌러참고 있으니, 토비라마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일어났다.

 터벅터벅─.

 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 자세를 낮추었다. 내 발목을 살짝 비틀어보고, 내가 아픔을 호소하자, 그의 눈빛이 평소와는 사뭇 다르게 변했다. 말하자면… 좀 더 부드러운, 다정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고집부리지 마라. 오해니까."

 "네?"

 나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평상시의 깐깐한 도련님에게 익숙해져 있는 내게, 그런 모습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내 사람을 아낀다. 딱하게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특히 너는… 글쎄, 네게 덤벼든 사내놈들이 더 딱하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다. 단지, 나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아. 오늘 너에게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면 이렇게 다칠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나빴구나."

 "……."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하시라마와 같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형제라 해도 생김새는 다르고 성격도 정반대라고 말할 정도인데, 알고 보니 제법 많았다. 묘하게 닮은 부분이.

 그것을 하나씩 발견해 나갈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 가슴이 떨린다. 더 이상한 점은 이런 감정을 느끼면서 대체 누가 내 마음을 움직이는 건지 알 수 없다는 거다.

 역시 나도 아직은 어쩔 수 없는 꼬맹이인 걸까. 아마도 그런 거겠지.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분명해지겠지.

 나도 참, 벌써부터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 없잖아. 괜히 쑥스럽게. 어휴, 더워.

 "걸을 수 있겠냐?"

 "모르겠어요."

 "도와줄까?"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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