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닷새마다 찾아오는 휴일에는 도련님 시중을 드는 대신 내 마음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늦잠을 자도 되고, 책을 읽어도 되고, 마땅한 적수를 찾는다면 장기를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해오름이 시작되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딱히 책을 읽거나 장기를 둘 기분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집에만 있으려니 답답하고… 아무튼, 괜히 울적한 기분이 들 때, 나는 민들레와 뒷산으로 산책을 간다. 민들레는 우리 집 근처를 떠도는 들개의 이름이다. 노란색 털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지어 주었다. 들레야 하고 부르면 발바리처럼 따라오며 좋은 길동무가 되어 준다. 들레가 분주히 돌아다니며 자신의 표식을 남기는 동안 들판에 몸을 눕히고 기다리기로 했다. 생각 없이 돌아다니는 것 같아도 들레에게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깨끗한 하늘을 바라볼 때는 자연스레 사색에 잠기게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머니께서 종종 들려 주시곤 하는 아버지와의 연애담이 생각난다. 몇 번 씩이나 반복해 들었더니 마치 내 일처럼 눈앞에 생생하다. 생각보다는 평범하지만 흥미롭긴 하다. 아버지의 과거는 잘 몰라도 센쥬의 일족 안에서 어머니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주의 손녀로 태어나신 어머니께서는 어렸을 적부터 남다른 사랑을 받으며 자라셨다. 부츠마 님과는 3종형제… 쉽게 말해, 증조부로부터 내려오는 팔촌지간이 되는 셈이다. 그 말은 즉 내가 하시라마 토비라마와 먼 친척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고 실감한 적은 없었다. 혈계한계 능력을 외부로부터 지키기 위해 육촌 팔촌끼리도 결혼하는 마당에 먼 친척이 대수랴. 아버지와 어머니의 첫만남은 철저한 이해관계 속에 이루어졌다. 어쩌면 그것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두 일족의 관계가 심각하게 훼손되기 전, 그때까지만 해도 협상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 지금은 믿기 어려운 얘기가 되었지만 나름 교류도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결과는 처참했다. 전쟁의 그림자가 짙어지자 아버지께서는 형제들과 함께 싸우는 대신 어머니를 택하셨다. 듣기만 해도 지겨운 이름, '배신자'가 된 것이다. 설령 그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물려받게 된다 해도 나는 끝까지 아버지의 선택을 존중하리라 다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어찌 원망할 수 있겠는가. 결과가 어찌 됐든 간에 이미 혼인은 치른 뒤였고, 어머니께서는 나를 임신한 상태였다. 만약 그때 남편을 잃었다면 어머니께서는 견뎌내지 못하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어느 쪽에게도 원하던 결말이 아니었지만 전쟁은 시작되었다.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힌 어느날 아버지께서는 센쥬에 충성을 맹세하셨다. 갓난아기인 나를 품에 안은 채 적장에게 머리를 조아리던 순간 아버지의 심정은 눈물 없이 헤아릴 수 없다. …그리고 다음날, 센쥬와의 전투에서 수많은 우치하 일족이 목숨을 잃었다. 아마도 내 육신 어딘가에 아버지께서 흘리신 눈물이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다. 어른들에게 이와 같은 사정이 있었기에, 나는 '우치하'가 되지 못하고 어머니의 성을 따라 '센쥬'가 되었다. 나로서는 뭐든 감사히 받을 뿐 가릴 처지가 아니다. 예를 들어 등에는 우치하의 문양을 수놓고 이마에는 센쥬의 머리띠를 두른다고 가정해 보자. 혼혈아가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양다리의 권한을 부여받는다 치면 어느 쪽에게든 얻어맞아 죽는 건 덤이다. 다다다─. 나는 비교적 운명에 순종하는 편이다. 그러나 뭐라 말해도 내 몸의 반쪽이 우치하라는 건 감출 수 없는데다, 성질까지 더러워서 모욕을 당하면 참지 못할 때가 더 많다. 땅바닥이 울릴 정도로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릴 때면 자연히 미간을 찌푸리게 된다. "여기 있다! 푸르죽죽한 우치하 계집애!" "사륜안은 없냐? 꺼내봐, 꺼내봐! 하하하!" "야, 그만 둬. 사륜안으로 너를 유혹하려고 할걸?" "게다가 가죽을 벗기면 안에서 추녀가 나올 거야." 아 놔. 자식들이 도대체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듣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우치하의 여자는 어릴 때부터 특별한 교육을 받아서 불리해지면 적에게 다리를 벌린다느니 어쩌니. 내가 보기에는 명백하게 외모로는 우치하의 유전자가 우위에 있는데, 아니, 그냥 딱 봐도 저쪽 여자애들이 더 예쁘니까 배가 아픈 거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보인 건지 앞에서는 욕하고 뒤에서는 힐끔거리고, 하여간 남자들이란… 하아-. "뭐야, 왜 한숨을 쉬는 거지?" "기분 나빠. 눈빛도 마음에 안 들어." "건방진 계집애. 무릎을 꿇게 만들어 줄까?" "어차피 우치하 년들은 전부 죽을 거야. 너도 살려달라고 빌어!" 그래, 일단 너부터 패고 어떻게 되는지 보자. 퍽-. 퍽-. 퍽퍽-. (…) 결국에는 엉엉 울면서 엄마한테 달려갈 것들이 질리지도 않고 까불어요. 탁탁 손을 털고 나니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한숨을 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녀석들의 덩치가 나보다 작을 때는 힘으로 응수할 수 있지만 지금보다 머리가 더 커지면 어찌 해야 좋을지 막막하다. 내가 일찍이 신체를 단련하기 시작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서 붓과 칼을 번갈아 쥘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웬만하면 칼보다는 붓과 세치혀로 싸우고 싶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내게 깝쭉거리는 남자애들을 마음껏 팰 수 있다는 것에 더 희열을 느낀다. 가만히 누워서 사색에 잠겨 있노라면 누군가 언덕을 올라 내게로 걸어왔다. 터벅터벅. 터벅터벅. 미간을 찌푸렸던 조금 전과 달리,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졌다. 상당히 귀에 익은 발소리랄까. "토비라마 님."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그의 이름을 불렀다. 휴일에는 만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니 갑자기 마주치면 놀랍기야 하겠지만, 그보다는 스스로도 의아할 만큼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하시라마를 제외하고는 또래 중 유일하게 곁을 내어주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지쳐 있었던 걸까. 뭐,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거지만 아까 그 놈들과 토비라마는 다르다. 머리의 수준도, 내 마음 속에서 지니고 있는 가치도 천지차이다. "오면서 사내놈들의 얼굴을 보니 하나같이 푸르죽죽하더구나." "놈들이 먼저 제 머리카락을 푸르죽죽하다고 놀렸습니다." 사실 그건 내가 당한 모욕의 일할에 불과하지만 나머지 구할은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하시라마와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모욕적이든 울먹이며 도움을 청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유는 아마도 두 사람의 '강함'에 있을 것이다. 하시라마가 내게 웃음을 잃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는 한편, 토비라마는 냉정함을 잃지 않는 법을 가르쳐 준다. 바보 하시라마든 도련님이든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을 닮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혼자서 뭘 하고 있었냐?"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있었어요." "녀석들이 때를 잘못 맞췄군." "맞아요." 내가 모욕을 당하면서도 운명에 순종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다름아닌 그것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몇 번인가 사내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던 적은 있지만, 내 운명은 아버지의 피눈물로 맺어진 결실이기도 하다. 내가 그러한 마음을 되새김질하고 있을 때 나를 건드린 것은 분명히 녀석들의 실수였다. "토비라마 님은 이상한 소문 따위 믿지 않으시죠?" "소문이란 기본적으로 사람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히 재밌는 이야기지. 하지만 우치하의 여인이 사륜안으로 사내를 유혹한다는 소리는 확실히 황당하더구나. 그건 사람이 아니라 요괴잖아." "놈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래도 좋아요. 제가 신경 쓰이는 건 토비라마 님이라구요. 왜냐면… 왜냐면… 저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분이시니까요. 그것도 아주, 눈물겨울 정도로요." "너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나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네가 내 시동이 되지 않았다면 솔직히 나도 너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을 거다. 나는 내 사람과 그밖의 부류들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성격이라서 말야.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너는 내게 의미가 없다. 하지만 내 사람이 되면… 네가 바라는만큼 얼마든지 아껴 줄 수 있지. 그걸 분명히 알아 두어라." "그래서 제가 토비라마 님을 좋아하는 거예요. 기브 앤 테이크, 거래가 확실하잖아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하시라마를 더 좋아하긴 해요. 하시라마는 제가 빈털털이가 되어도, 머리가 이상해져도, 심지어 적의 편이 되어도 저를 계속 좋아하겠다고 하늘에 맹세했거든요." "…훌륭하군, 아주." 이윽고 토비라가 실소를 터뜨렸다. 본인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내가 하시라마를 휘어잡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한 걸까. 으음, 하시라마는 원래 바보니까, 방금 전의 대화에 딱히 위화감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 뭐라 말해도 부츠마 님의 아들이다. 하시라마는 차기 당주가 되어서 전쟁을 끝내고 싶어한다. 그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불의 나라 통합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쩌면 우치하의 피를 가진 나를 포용하는 것으로 첫발을 내딛으려는 건지도 모른다. 하시라마가 내게 화를 내지 않는 이유, 단순히 바보라서가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내가 바보 하시라마를 더 좋아해서 자신의 예감을 무시했을 뿐. "하시라마는 적의 여자라도 사랑할 수 있대요. 우리 아버지처럼요." "그러고도 남지." "뭐, 지금은 우즈마키 일족인지 뭔지 하는 듣보잡 계집애의 약혼자가 되었지만요." "네가 그 일에 유감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토비라마 님이라서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니까 소문내지 마세요." "그래." "저는… 예전에 잠깐, 하시라마랑 결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아, 저기, 그게, 진지하게 좋아한 건 절대 아니고요. 아시다시피, 하시라마는… 저한테 있어서…" "유일하게 편견을 갖지 않고, 적어도 받는 만큼은 돌려주면서, 어쩌면 사랑까지도 해줄 수 있는 존재… 더 이상 형님을 괴롭힐 수 없게 되면, 그때부터는 나를 괴롭히려 할지도 모르겠군. 미리 각오를 해 두어야 할까?" "……." 부정하고 싶어도 그밖에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분하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어째서 얼굴이 뜨거워지는 거지. 영문을 모르겠다. 하시라마랑 있을 때는 한 번도 이랬던 적 없는데. "토비라마 님은… 저를 사랑할 수 있으세요…?"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사내놈들은 구태여, 힘들게, 경쟁자와 싸워 가며 쟁취하는 걸 좋아해. 아마도. 내가 보기에 너는 그 놈들을 전부 이용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한 녀석이다." "알아요… 바보 같아 보이죠…?" "아니, 바보 같다고 하지는 않았어. 나에게 기대를 건다면 그것도 네 선택이지. 단지 괴롭힘을 당하더라도 '그밖에 선택사항이 없어서'라는 이유보다는 '그 중에 제일 마음에 들어서'라는 이유로 당하고 싶은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그러고보니 나는 지금까지 어머니에게 자신을 대입해 본 적은 있어도 아버지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만약 내가 우치하 일족이고 센쥬 일족의 사내와 결혼해야 한다면, 내 약혼자가 딱 이런 사람이라면… 그래, 할 수 있지. 할 수 있고 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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