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국 다시 나타난 건가. 친구인지 뭔지 멋대로 떠들어대면서 너는 단 한 번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군."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가아라 너 그때 나루토에게 입은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았잖아. 억지로 병원에 있으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오늘부터 나한테 맡겨. 내가 마저 치료해줄게." "……." 끔찍한 살기. 소리없이 다가오는 바람처럼 모래가 나의 목숨을 위협해온다. 그러나 이 정도로 겁먹고 물러날 것이었다면 애당초 녀석을 만날 생각 따윈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람의 나라에 돌아갈 때까지만. 내가 꼴보기 싫어도 그때까지만 참아. 뭣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 숨소리도 내지 않을 테니까." "너의 존재 자체가 거슬린다. 쓸데없는 짓 그만두고 꺼져라." "치료가 끝나면 꺼져줄게. 일단 상태가 어떤지 좀 보자. 모래 마을쪽 의료반에 물어봐도 기밀이라면서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더라. 나루토에게 대략 얘기를 듣긴 했지만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는 직접 봐야 알수 있… 으윽!" 망설임없이 성큼성큼 가아라를 향해 나아가다가 눈 깜짝할 사이 모래에 휩싸여 온몸을 속박당한다. 엄청난 압력. 정말 봐주기가 없구나. 이번에야말로 나의 직감이 죽음을 예상한다.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실패인 것 같다. 시험이 그렇게 끝나 버리고 우여곡절 끝에 마을의 복원작업이 시작되었을 때,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나는 틈이 날 때 마다 바람의 나라 사람들에게 가아라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걱정만 늘리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병원에서 나루토와 시카마루를 만난 나는 그들로부터 가아라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나 외로웠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녀석이 사람의 애정을 거부했던 이유, 녀석 안에 존재하는 수학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소중한 친구이니까 멈추게하고 싶었다. 어째서 소중한 건지, 그 이유는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가아라를 설득하는데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그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는 그 소중함의 이유가 생겼다. 가아라가 이렇게나 괴로워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을 책임지는 교사로서도 녀석의 친구로서도 자격이 없다. 이제는 정말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다. 가아라가 어디에서 왔건, 무슨 짓을 했건, 그것은 상관없다. 어찌보면 가아라도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피해자다. 모래 마을 측에서 책임을 지는 것으로 사태가 마무리 되었으니, 더 이상 탓할 것도 미워할 것도 없다. 그저 모두가 그렇듯이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 모래의 압력에 의식이 완전히 끊어졌다. 머리가 멍해서 판단이 흐려졌지만 죽기일보직전까지 갔던 것만은 확실하다. 의식이 돌아오고나서 보니 의외로 고통은 없다. 오히려 한숨 자다 일어난 것 같이 개운한 기분이 든다. 가아라는? 정신을 차리고나서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주변을 둘러보는 일. 다행히 녀석의 모습을 찾았다. 녀석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지붕 끝에 걸터앉아 있다. 불어오는 바람에 가아라의 하얀 옷자락이 가볍게 휘날린다. 그 모습과 더불어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언제나와 같은 이색적인 향기가 코끝에 아른거린다. "나 지금 손이 조금 얼어 있거든? 차갑겠지만 조금만 참아." 내게 닿아도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때의 내 행동이 아주 쓸모없지는 않았다는 뜻일까. 아니, 그렇게 따지면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 부터가 그렇다. 어째서 가아라가 나를 죽이지 않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뭐가 어쨌든 이제는 곁에 있어도 된다는 거겠지. 손바닥에 차크라를 모아 고도의 집중력과 섬세한 컨트롤을 유지하며 상처를 치료한다. 수학 덕분에 웬만한 것은 이미 나았지만 내부에 아직 잔상이 남아 있다. 의료반 내에서도 웬만한 경력이 쌓여 있지 않으면 캐치할 수 없는 내상. 지금까지 의료 닌자로서의 자신의 재능은 평범 그 자체였고, 이따금씩 실수를 저지를 때면 그 이하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애정의 힘인지 뭔지 지금은 보인다. 그리고 잡힌다.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깊은 안도감에 잠시 정신이 흐트러진다. 안 된다. 지금 다른 생각은 하면 안 된다. "정말 얼어 있는 거냐." "응?" "네 손… 전혀 차갑지 않다. 오히려 따뜻하다." 가아라의 말에 약 5초간 멍- 하니 넋을 놓았다. 따뜻하다니 무슨 뜻이지? 혹시 성공한 건가. 그때 내 마음이 제대로 전해졌던 건가. 기쁨에 눈물이라도 뿌리고 싶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의료 닌자로서 일하는 도중에 감상에 젖어드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약점이고,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앞으로는 좀 더 프로페셔널해져야만 한다. (…) 이것으로 끝인가. 어쩌면 아직 잔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내가 캐치할 수 있는 부분은 전부 치료해두었다. 애당초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나루토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으니, 이 정도면 딱히 후유증은 없을 것이다. 기쁜 마음에 치료가 끝나갈 때 마음을 안정시키는 술법까지 사용했는데, 가아라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그저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 듯 아까보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다. "있잖아, 가아라. 저기, 이런 질문 바보같이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네가 바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말해봐라." 울컥, 그러나 아랫입술을 깨물며 참는다. 꺼지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었더니 이제 바보 정도는 그냥저냥 참을 수 있다. "수학은 괜찮은 거야? 다치면 스스로 치료할 수 있어? 못한다면 내가 도울 수 있을까?" "너… 수학에게 사심이라도 있는 거냐… 아무리 뭐래도 그 녀석까지 걱정할 필요는……." "있어, 있어. 필요 있어.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내가 가아라와 같이 있을 때는 수학도 항상 거기 있었던 거잖아. 수학도 가아라와 마찬가지로 내 친구야." 정직하게 말해서 나루토와 구미의 경우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생각이지만. 수학에게는 한 번 목숨을 빚진 일도 있다. 저쪽에서 호의를 보인다면 거부할 이유도 무시할 이유도 없다. "너니까 보나마나 이상한 망상이라도 하고 있겠지… 수학은 인간이 아닐 뿐더러 네가 좋아하는 꽃미남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녀석이다… 성격도 거의 막장 수준이라… 실제로 보게 되면 깜짝 놀랄 거다." "가아라에게 어떤 말을 들어도 직접 만나서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거야. 의외로 나랑 죽이 잘 맞을지도 모르지. 딱히 잘생기지 않아도 상관없어. 처음엔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라구." 낮은 한숨 소리. 고개를 정면으로 되돌리며 가아라가 두 눈을 지그시 감는다. 내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표정. 그래, 나는 가아라의 이 표정이 보고 싶었다. "만나고 싶으냐?" "누구?" "수학 말이다." "만날 수 있어? 실은 나루토도 봤는데 나는 못봤다는 게 조금 많이 분했거든." "원한다면 만나게 해주겠다. 단, 책임은 지지 않는다." "나도 수학도 어른이니까 책임 정도는 스스로 질 거야. 걱정 마." 또 다시 길게 이어지는 낮은 한숨 소리. 조금 재밌어지려고 한다. 수학을 만나는 것도, 가아라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려고 하는 이 상황도. 기쁘고, 신기하고, 설레인다. (…) "마음의 준비는 됐나?" "응, 언제든지." 마을 외곽의 넓은 초원으로 장소를 옮겼다. 달빛에 물든 풀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고요함 속에 풀벌레 우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인법, 거짓 수면술!(狸寝入りの術)" 가아라가 인을 맺고서 외치자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하얀 옷자락이 나풀거리다 바람과 함께 스르르 가라앉는다. 그리고 털썩, 녀석이 풀밭 위로 쓰러진다. 짙은 적막감. 묘한 기운이 나를 그곳으로 이끈다. "가아라?" 잠들어 있다. 뺨을 때려도 절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얼굴로 아주 깊이 잠들어 있다. 혹시 죽은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상체를 숙이고는 가아라의 숨소리를 들어본다. 이것은 어떻게 봐도 거짓 수면이 아니라 진짜 수면이다. 지금이라면 못된 장난을 쳐도 전혀 모를 것 같은데. 문득 솟아오르는 장난기에 씨익 웃으며 가아라의 얼굴을 내려다 본다. 이 녀석을 어떻게 골려줄까.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안녕, 예쁜 누나?" "!" 번뜩 하고 갑자기 가아라가 눈을 떴다. 아니, 다르다. 이전과는 분위기가 180도 다르다. 가아라의 입에서 예쁜 누나라니 있을 수없다.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녀석의 표정과 눈빛이 너무나도 낯설다. "누나가 위인 거야? 나 여성 상위는 싫은데-."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려는데, 가아라가 내 앞섬을 덥석 붙잡는다. 뭐지, 이 눈빛은. 순응적인 듯하면서도 굉장히 날카롭다. 상대방을 이끌어 가까이 다가오면 그대로 베어 버릴 것 같은 눈. 무섭다. 원래의 가아라도 충분히 무서운데, 이런 분위기까지 풍겨대니 등골이 오싹해진다. "에, 그러니까… 수, 수학 씨…?" "꼬맹이랑 노는 거 지루하지 않아? 지금부터는 내가 상대해줄게-." "에, 엣, 자, 잠ㄲ…!" 가아라의 표정 변화가 하도 신기해서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갑자기 묘한 손길이 허벅지를 스윽 타고 올라오며 소름이 쫙 끼친다. 이건 가아라가 아니다. 절대로 가아라일 수가 없다. 수치스러움에 서둘러 그의 손을 저지해보지만 어떻게 되먹은 힘인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대로 계속 내 옷속을 파고들어온다. "왜 그래? 싫어? 하하핫 귀여워-." 차가운 손이 허리에 닿는 순간 움찔- 하고 작게 경련을 일으킨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반대쪽 손이 움직인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초면으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 버린다. 찌릿, 하고 아픔이 온다. 그 이상의 수치심이 느껴진다. 가슴을 만지다니. 그냥 만지는 것도 아니고 움켜쥐다니. 뭐지, 이 대담함은. 뭐지, 이 뻔뻔함은. 너무 놀랍고 당황스럽고 무섭고… 그 밖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과연 가아라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말을 할만 했구나. 최악이다. 그야말로 최악의 첫만남이다. "부드러워-. 먹고 싶어-. 잘 먹겠습니다-." 그가 나를 홱 잡아당기고는 그대로 내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믿을 수가 없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이지. 이 얼토당토 않은 힘은 뭐지. "먹는 게 아니… 그, 그만둬!" 꽈악-. 이번에는 그의 두 팔이 내 허리를 감싸안는다. 마치 가아라의 모래와 같은 압력. 도저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수, 수학 씨, 나한테 흥미를 가져주는 건 기쁘지만 아직 이런 건 빠르다고 생각ㅎ…아!" 힘으로 안 된다면 이성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리석었다. 내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다. 멈추기는 커녕 오히려 점점 밀착의 강도가 세진다. 내 몸을 여기저기 만지면서 완전히 가지고놀고 있다. "그만둬! 그만두라고!" "아흣…! 누나, 가만히 있어…! 그렇게 날뛰면 나와 버려-…!" "나오다니, 뭐가 나오는 거야!" "아아아, 나와-…!" 야밤에 들판에서 이게 대체 뭔 짓인지. 마치 옛날 19금 에로 비디오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아, 결국에는 나도 갈때까지 가는 건가. 오늘 처음 본 남자와, 그것도 야외에서, 끝까지 해 버리는 건가. 모르겠다. 이젠 될대로 되라. 뾰롱-. 나오는 건가! -하고 생각한 순간, 가아라… 아니 수학의 정수리에서 정말로 무언가 튀어나왔다. 영상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듯 일순간 의식이 정지한다. 그 만큼 엄청난 위화감이다. 이게 뭐지. 딱 봐도 동물의 귀라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정확히 어떤 동물인지는… 개? 고양이? 너구리? 일단 모양은 너구리에 제일 가깝지만 털이 없고 마치 단단한 모래처럼 보인다. "아아, 숨기려고 했는데 나와 버렸잖아-. 부끄러워-. 누나 그 얼빠진 얼굴은 뭐야-? 혹시 야한 상상했어-? 변태-." "그, 그 상황에서 나올만한 건 보통 하나잖아!!! 갑자기 귀가 튀어나온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못할 거라고!!! 지금 이 상황에서 변태는 누가 봐도 당신이야!!!" 버럭 소리를 질러보지만, 수학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씨익 웃고는, 나를 홱- 하니 잡아당긴다. 당황하는 찰나 순식간에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어 버렸다. "언제까지 거기 앉아서 우쭐대고 있을 거야? 말했지, 여성 상위는 싫다고." 여전히 능글맞은 목소리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들려온다. 지금까지는 전부 장난이었다. 지금부터가 진짜다. 그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다. "자, 잠깐! 잠깐! 잠깐!" 내게 키스를 하려는 듯 가까이 다가오는 녀석. 분위기가 바뀐 탓인지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진다. 성격도 표정도 말투도 모든 게 다 다르지만 그래도 얼굴은 내가 알고 있는 가아라다. 바람의 나라에서 온 적발의 미남. 이런 상황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며 뒤늦게 자신을 다그쳐본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어차피 더는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수학은 친구라고 자신의 입으로 말했다. 보통 친구끼리 키스 같은 건 하지 않지만 딱히 못할 것도 없다. 게다가 어차피 몸은 가아라의 것이다. 가아라와 하는 거라면 참을 수 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 체념하고 두 눈을 감는 순간, 무언가 나의 뇌리를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가아라의 거짓 수면술은 잠들어 있는 가아라를 깨우면 풀린다니깐요.' 그렇지. 그때 나루토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가아라는 지금 수학에게 의식을 넘긴 채 잠들어 있는 상태. 그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면 의식의 주인은 다시 가아라로 바뀐다. "수학 씨." "응?" 내 부름에 잠시 움직임을 멈추는 수학. 조금만 더 다가오면 입술이 닿을 것 같은 아찔한 상황이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인다.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요." "뭐야?" "당신이 없었다면 저는 가아라와 친구가 될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 점 고맙고… 앞으로 다시 만날 때도 웬만하면 제 공격 그냥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공격이라고 해도 전부 장난이고… 그게 유일한 구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가아라에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딱히 상관없지만 그런 진지한 말 나는 싫어하니까 가아라가 깨어 있을 때 하라고. 나는 빨리 당신의 야한 얼굴이 보고 싶어." "기다리세요. 본론은 지금부터예요. 그리고 말이죠… 다음에 저를 유혹할 땐, 부디 신사다운 방법으로 해주세요." "하아? 신사아?" "안 그럼, 전력으로 때릴 겁니다!" 퍼억-. 수학이 방심하는 틈을 타, 그의 얼굴에 말 그대로 전력의 펀치를 날린다. 맞았다기보단 맞아준 느낌. 역시 변태인 점을 제외하면 그리 나쁜 녀석은 아니다. 털썩, 술법이 풀리면서 가아라가 내 위로 힘없이 쓰러진다. 조심스레 바닥에 눕힌 뒤 안색을 살피고 있노라면 이내 미간이 꿈틀거리고 녀석이 눈을 뜬다. "가아라, 괜찮아?" "……." 밤하늘을 향한 채 움직이지 않는 시선. 그대로 아무런 말이 없다. 수학과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이미 다 예상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봐서는. "먹혔나?" "다행히 아직 먹히지 않았습니다." "하아-…(안도) 이제 너도 알았겠지. 수학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 따윈 이제…" "다음에 만나게 될 날이 기대된다-." "뭐라고!" 흠칫 놀라는 가아라. 이런 표정은 또 처음 본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다크서클이 너무 귀엽다. 모두에겐 컴플렉스이지만 가아라에게 있어서 만큼은 가장 큰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가아라의 성격이 180도 바뀌는 게 너무 재밌어. 가아라 변태 아저씨 버전. 하하하하핫-." "그런 걸 재밌어하면 어쩌자는 거냐! " "그치만 가아라는 그쪽에 엄청 무딜 것 같은 성격이잖아. 수학이랑은 일사천리로 진도가 팍팍 나갈 수 있으니까." "무슨 진도를 말하는 거야! 멋대로 관계를 진전시키려 하지 마! 자연의 순리를 따라라!" "자연의 순리 따위를 따랐다간 평생 노처녀인 채로 늙어 죽을지도 모른다구." "몸을 공유하고 있어도 수학과 나는 전혀 다른 존재다! 그걸 잊지 마라!" "네, 네. 잊지 않겠습니다. 안심해, 둘 다 좋아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가아라 쪽이 훨씬 더 좋아." 녀석의 코끝을 장난스레 톡- 건드리고는 상냥하게 웃어보인다. 우와, 얼굴이 빨개졌다. 그 가아라가 부끄러워하고 있다. 올해 들어 내가 본 것중에 가장 레어한 장면이다. 과연 이 표정을 다시 보게 될 날이 또 올 것인가. 분명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한 번 뿐으로는 너무 아까울 만큼 귀여우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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