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다라에게 과일을 가져다 주려고 복도를 걷고 있노라면 거실로부터 TV 소리가 들려 온다. 뭔가 떠들썩하기에 이번에도 액션영화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문을 열어 보니 뜻밖에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의 재방송이 하고 있다.

 "(지그시)"

 "데이다라, 과일 먹어."

 "그래, 고맙다."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하더니 또 다시 화면에 비치는 영상을 지그시 쳐다본다. 아무리 중요한 장면이라지만 이토록 드라마에 집중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특별히 재미난 것도 아니고 소위 '욕하면서 본다'고 하는 치정 드라마다.

 짝─!

 날카로운 사운드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헉 놀라며 데이다라가 제 손을 입으로 가져간다. 착하고 순진한 성격으로 보기만 해도 답답한 주인공이 과감히 내연녀의 뺨에 따귀를 날렸다.

 「넌 언제든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겠지만 나한테는 그 남자가 전부였어! 너의 욕심이 한 사람의 가정을 망치고, 인생을 망친 거야!」

 여자주인공의 대사는 드라마의 시청자인 안방주인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본다. 일반적으로 감정이입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뺨을 때리는 게 해결책은 아니지 않냐. 음."

 「그 사람이 날 사랑하는 게 내 탓이니? 너랑 사는 게 얼마나 갑갑했으면 날 다시 찾아왔겠어? 어차피 그 사람 마음 너한테서 완전히 떠났어. 괜히 시간 끌지 말고 그만 놔줘!」

 그런데 너무 몰입한 탓인지, 내연녀의 태도에 기가 막힌 것인지, 내 남자가 마치 제 일인 양 분노하고 있다.

 "아니, 역시 네가 옳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다시는 허튼 수작 부리지 못하게 한 대 더 때려라. 이판사판이다! 음!"

 이렇게 안방주인들이 열렬한 응원을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뻔한 클리셰의 주인공은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는다.

 "울지 마, 지금 당장 일어나서 옆에 있는 컵을 집어 들어! 물을 확 끼얹으라고! 음!"

 지난번 까페에서 주스를 끼얹을 때 심정이 이러했을까. 그때의 상황과 드라마의 상황을 비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묘한 죄책감이 든다.

 "데이다라, 여보."

 "음?"

 "과일 드세요."

 "네-."

 그래도 여보라는 부름에는 거의 자동적으로 나를 돌아보게 되나 보다. 배시시 웃으며 공손하게 대답하고는 내가 내민 멜론을 받아먹는다. 마침 ad 타임이 되었는데 끝나면 다시 드라마에 집중할 테니 이참에 조금이라도 더 먹여야겠다. 파인애플을 하나 집어서 입에 넣어 주니 달콤하니 맛있나 보다. 나른한 얼굴이 되어 우물우물 맛을 음미하고 있다.

 "별일이네, 데이다라는 드라마 같은 거 안 좋아했잖아."

 "아아, 왠지 모르게 보기 시작했는데 멈출 수가 없더라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의 뺨을 쓰다듬는다. 우물우물 우물우물. 부풀어 있던 볼이 빠르게 줄어들더니 뽀뽀해 달라는 듯이 입술을 내민다. 귀여워서 좀 더 보고 싶기도 하지만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점점 깊숙이 파고든다. 입술을 깨물듯이 포개고는 혀를 얽어 온다.

 그 사이 드라마가 시작됐다. 하지만 상관없다는 듯 데이다라는 나를 쓰러뜨리고 키스를 계속했다. 방이었다면 기뻤겠지만 다같이 쓰는 장소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토비가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지. 괴로움을 호소하며 어깨를 밀어내자 이내 만족한 듯 떨어진다. 그러나 아주 멀어지지는 않고 몸이 겹쳐진 채 움직일 수 없는 나를 내려다 보며 묻는다.

 "너는 나를 져버리지 않겠지?"

 대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다. 내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으면서 무얼 새삼스레 묻는 걸까. 역으로 내가 묻고 싶다.

 "나를 못 믿겠어?"

 "난 현재의 관계에 만족할 수 없다. 널 믿지만 왠지 마음이 놓이질 않아. 지금보다 강한 무언가를 원해."

 데이다라가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내 안에도 한 가지 바람이 존재하긴 한다.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해."

 이룰 수 없기에 더욱 간절한 것. 어떻게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좋을까. 지금까지 그것은 금기처럼 입에 담아선 안 되는 말이었기에 여전히 망설이게 된다.

 "데이다라와 나…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기는 거야. 마지막 말은 그의 손을 이끄는 것으로 대신한다. 언제나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는 특별한 장소에 내려 놓는다. 그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걸까. 아니면 아직 어린 나이에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그의 반응이 묘하다. 반기는 건지 꺼리는 건지 모르겠다. 내 기분탓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왠지 후자가 더 강하게 느껴져서 불안하다.

 "그건 안 돼."

 나지막이 말하고는 내게서 멀어진다. 조금 전의 반응으로 예상할 수 있었으면서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현실에 저항해 봤자 나만 힘들어질 뿐이다. 자신의 입으로 필요 없다고 단언도 하지 않았던가. 그랬는데,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의 입으로 듣고 나니 허무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난 너의 사랑이 반으로 나눠지는 걸 원치 않아. 왜냐면 잃은 만큼 나를 멀리하게 될 테니까. 언젠가 내가 사라지면 나에 대해서는 원망만 남을 게 뻔해. 넌 아이를 볼 때마다 날 떠올리겠지. 그러다 원망이 커지고, 더 커지고…"

 "나한테 원망받는 게 두려우면 날 사랑하지도 말았어야지. 필요없다고 말한 건 나였지만 적어도 고민은 해 줄 수 있잖아. 아니, 고민하는 게 정상…"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은 정상이 아냐! 너도 알고 있잖냐! 이런 신분으로 어떻게… 안 돼, 그거야말로 용서받지 못할 짓이야."

 "네 말을 들으니까 벌써부터 원망스러워지려고 해. 문득 생각이 나네, 뭐라 해도 너 할 때는 참 기분 좋은 얼굴 하고 있더라."

 "뭐?"

 차가운 목소리만으로 등골이 오싹해질 지경인데 일어나려는 순간 팔을 붙잡혀서 거의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바닥에 부딪힌 것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붙잡힌 곳이 너무 아파서 무심코 아픔을 호소했다.

 "미, 미안…"

 스스로도 놀랐는지 서둘러 놓으면서도 손끝이 바들바들 떨린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어쩌면 이미 내 안에 있을지도 몰라… 혹시 모르니까 살살 다뤄… 너 때문에 아이를 잃게 되면 그때야말로 죽을 때까지 널 원망할 거야."

 "그러지 마……."

 데이다라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비치지 않지만 하늘색 눈동자가 동요하고 있다.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런 말은 해선 안 된다. 어쨌든 앞날은 아무도 알 수 없지 않은가.

 "바보, 나 갈 거야."

 "아… 미안… 미안해……."

 뒤에서 꼬옥 끌어안으며 매달린다. 지금 당장 천재지변이 일어난대도 절대 놓지 않을 기세다.

 "사랑합니까?"

 "사랑합니다."

 착한 아이처럼 예의바르게 대답하기에 이 정도면 용서해 줄만 하다고 생각했다. 애당초 데이다라에게는 잘못이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그것이 현실이고, 어찌 보면 고집부리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끈했던 것은 적어도 데이다라가 나와 함께 끊임없이 고민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다소곳이 앉아 데이다라의 손을 잡는다. 조금 전에 나를 아프게 했던 것 때문인지 아직도 조금 떨리고 있다. 그러나 무의식중 손에 힘이 들어간 것 정도로 새삼 무엇이 변할까.

 "언젠가 사라진다는 말은 하지 마. 네가 임무를 떠날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있다고 해서 정말 괜찮은 게 아니야."

 "나도 좋아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널 사랑해서 안았던 거야. 어떻게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그래, 나도 미안해."

 기분 좋은 얼굴이라고 아무렇게나 내뱉어 버렸지만 실제로 그가 내비치는 감정에는 언제나 괴로움이 뒤따른다. 즐거울 때도, 행복할 때도, 가슴 한편에는 미해결 과제가 남아 있다. ​그것을 남편으로서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이 본인도 적잖이 답답하고 괴로울 것이다.

 ​"붉어졌네… 멍들겠다…"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자신이 붙잡았던 곳을 쓰담쓰담 어루만진다. 은근히 아리지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적에게는 가차없으면서 아내에게는 어쩜 이리도 상냥할까.

 반대로 공격받을 때도 여러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가끔은 누가 악당인지 헷갈릴 때가 있는데, 그러던지 말던지 덤덤하게 적을 처리하는 냉혈한이 내 말 한 마디에 울먹이는 모습을 볼 때면─.

 이렇게 말하기 뭐하지만, 참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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