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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다라?!” 아침을 먹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오늘은 날씨가 화창해서 화단에 물을 주러 밖으로 나왔다. 물을 다 주고 아지트로 돌아가려는데, 문득 나를 부르는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데이다라가 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전서구를 통해 보낸 편지에는 이틀은 더 걸릴 거라고 했잖아.” “그 일은 이제 됐다. 네가 보고 싶어서 서둘러 돌아왔다. 음.” “사소리 오빠는? 혼자 왔어?” “언제나와 같이 부하를 만나러 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음.” “날씨도 좋은데 오빠가 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는 게 어때?” “조금 있으면 알아서 돌아올 텐데 뭐가 걱정이냐. 난 지금 막 임무로부터 돌아와서 피곤하다고. 음.” “그래…? 알았어…….” 터벅터벅-. 데이다라와 함께 복도 위를 걸으며 그의 옆모습을 흘깃 쳐다본다. 오늘은 왠지 분위기가 조금 다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금쯤이면 자신이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없었는지 등을 내게 물어봐야 하는데, 그런 말 하나 없이 그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며 주방에 이르니, 문득 지난 날 데이다라가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나는 사소리 나리가 돌아오면 같이 들어갈 테니 먼저 가서 자고 있어라.’ ‘아니, 히단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그런 데이다라라면 굳이 내가 먼저 기다리자는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을 텐데, 조금 전의 그는 너무나도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오빠가 돌아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딱히 이상하달 것까지는 없지만 데이다라답지 않다. “배고프지? 오늘은 돈부리를 만들 생각인데 위에 뭘 얹으면 좋을까?” “글쎄, 평범하게 고기면 되는 거 아니냐. 음.” “고기? 알았어.” 데이다라에게 등을 보인 채 요리의 준비를 하노라면 긴장감이 맴돈다. 그는 지금 식탁 앞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자, 이제 어떡할까. 그가 고개를 모로 돌린 사이 조용히 그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데이다라.” “음?” 퍼억-!!! 전력으로 펀치를 날린다. “쿠허어억-!” 기본적으로 내게는 건장한 성인 남성을 쓰러뜨릴만한 힘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아녀자의 앞이라고 해도 방심은 금물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나가떨어지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험상궂은 얼굴로 묻는다. “너 누구야? 여기 뭐 하러 왔어? 응?”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나다, 음.” “닥쳐. 말끝에 음만 붙인다고 다 되는 줄 알아? 변신을 할 거면 제대로 알아보고 해.” 홱 하니 멱살을 흔드니, 그가 커헉! 하고 곡소리를 내며 내 손을 붙잡는다. “잘 들어, 우리 데이다라는 자기 파트너를 두고 먼저 쉬지 않아. 피곤하다고 투정부리지도 않아. 그리고 우리 데이다라는…!” 꽈악-.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다시 한 번 주먹을 높이 들어 올린다. “채식주의자라서 생선은 먹어도 육류는 절대 먹지 않는다고-!!!” 퍼어억-!!! 이런, 내 나름대로 전력을 가한 펀치였는데 애먼 바닥만 부숴뜨렸다. 약싹빠른 놈, 내 주먹을 피한 녀석이 갑자기 표정을 180도 바꾸더니 자신의 멱살을 붙잡고 있던 내 손을 떼어내어 홱 끌어당긴다. 조금 전에는 방심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역시 남자의 힘은 당해낼 수가 없다. “꺄!” 털썩-. 나를 바닥에 넘어뜨린 남자가 내 양쪽 손목을 꽉 붙잡는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일순간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여전히 데이다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웃음은 너무나도 낯설다. 적의 입장으로 데이다라를 바라본다면 이런 기분일까. 무섭다. “빈 둥지인 줄 알고 실망했는데, 설마하니 이런 귀여운 암컷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을 줄이야.” “무슨 짓이야! 이거 놔!” “아무도 없다면 서두를 필요도 없고 딱 좋아. 실컷 가지고 논 다음 죽여주지.” “싫어! 내 몸에 손대지 마!” 꽈아악-. 남자가 천천히 상체를 숙여 내 목을 핥는다. 그에게 머리채를 붙잡혀서 피할 방법이 없다. 금발의 머리카락, 뺨에 스치는 감각이 거칠다. 데이다라의 머리카락은 이렇지 않은데, 어째서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했던 걸까. 무력감에, 수치심에, 두려움에,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도망칠 수 없다면 차라리 죽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싫어… 싫어…….” “널 위해 일부러 변신을 풀지 않고 있는 거다. 너 이 녀석을 좋아하잖아? 처음 보자마자 알았지. 기분 좋게 해주면 목숨만은 살려줄 테니까, 나를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즐기라고. 음?” 핥짝-. 남자의 혀가 귓등을 지나가며 소름이 쫙 끼치고, 음흉한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의 손이 하반신을 타고 올라오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힘이 없다고, 부끄럽다고, 무섭다고,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런 녀석에게 순결을 잃는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절대 있어선 안 된다. “싫어!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그런 차가운 말 하지 마라. 너 내 타입이라고. 뭐지, 이거. 첫눈에 반한 건가? 이미 좋아하게 되었는데 싫다든가 하는 말을 들으면 상처받잖아. 뭐, 흥분되지만.” “싫어! 싫어! 싫어어어어!!!” 저항이 무색하게도 그는 너무나 여유롭다. 차갑게 웃으며 내 옷을 무릎까지 내린다. 속옷을 보이는 것 따윈 이제 아무래도 좋다. 만지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마. 그런 생각으로 가득해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이 남자에게 내가 뭘 할 수 있지. 두 눈을 질끈 감고 안간힘을 쓰며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고 있는데, 갑자기 퍼억!!!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더니 속박으로부터 몸이 자유로워진다. 믿기지 않지만 조금 전 히단이 남자의 머리를 엄청난 위력으로 걷어찼다. 한손에 과자봉지를 들고 입을 오물거리며 그가 유유히 다리를 내린다. “뭐 하는 짓이야, 새끼야. 아무리 남자친구라도 레이프는 하면 안 되는 거잖아, 엉?” “히단! 그 녀석은 데이다라가 아니야! 데이다라로 변신한 침입자야!” “어라? 그러고보니 뭔가 다른 것 같은…….” 식탁에 머리를 박아 이중으로 충격을 받은 남자가 변신술이 풀림과 동시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히단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가 씨익 웃으니 그것은 그것대로 사악하기 이를 데 없다. “외간 여자를 강간하려고 했다면 머리에 한 대 날려주는 것만으로는 봐줄 수가 없지.” “크으윽…!” 히단이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 한쪽으로 끌어내더니 가차없이 그를 바닥에 내팽겨친다. 얼핏 보면 조금 전 내가 당했던 일을 그대로 갚아주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내가 아는 히단은 그런 것에 조금도 흥미가 없다. 그저 임무로부터 돌아와서 심심하던 찰나 마침 딱 좋은 장난감을 찾아서 지금 신나게 가지고 놀고 있는 것 뿐이다. “지옥의 마차가 아지트의 앞에 있습니다-♪ 지옥의 마차가 복도에 있습니다-♪ 지옥의 마차가 주방에 있습니다-♪ 지옥의 마차가 네 앞에 있습니다-♪” 히단… 오늘 기분 좋은가보구나……. 남자의 목(정확히 목젖)을 밟아가며 리듬을 타는 모습이 정말 지옥에서 온 사자 같다. 솔직히 이젠 어느 쪽이 더 나쁜 놈인지 모르겠다……. “크윽…!” 툭-. 옷을 추스리는 사이 남자가 히단에게 무언가를 던지고, 그것이 정확히 히단의 목에 꽂힌다. 수리검이다. 이윽고 살았다는 듯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가 씨익 웃는다. 그러나 히단이 누구인가. 꿈틀-. “!” “제법이잖아.” 너무나도 태연하게 목에서 수리검을 빼내고는 히단이 남자에게 다가간다. 무릎 한 쪽을 남자의 오른 팔에, 또 다른 한 쪽을 남자의 왼팔에. 그렇게 남자를 깔고 앉은 뒤, 겁에 질린 그의 얼굴에 거칠게 손을 내지른다. “사신님-, 어느 게 좋으신가요-? 눈-? 혀-? 아니면 이빨을 하나하나 천천히 뽑아 버릴까요-? 아-, 역시 전부 다군요-. 저도 같은 생각이예요-. 하하하하핫-!” 스위치가 켜졌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무서워서 도저히 못봐주겠다……. “아아아아아아악-!!!” 두 눈을 질끈 감으니 남자의 비명소리가 주방을 뒤흔든다. 늘 습관처럼 카쿠즈에게 혼나는 히단, 내게 매달려서 투정을 부리는 히단, 툭하면 엉뚱한 소리로 주변의 웃음을 자아내는 히단. 그런 히단이 이렇게 변할 때 마다, 심장이 깜짝 놀라 벌렁거린다. 만약 내가 적이었다면 데이다라보다도 히단을 절대 만나고 싶지 않다. 데이다라의 기폭점토라면 한순간에 끝나겠지만 히단에게 걸리면… 싹둑싹둑……. 으으… 상상 조차 하기 싫다. (…) 그날, 히단은 주방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카쿠즈에게 꿀밤을 맞고 머리에 혹을 단 채 나와 청소를 했다. 히단과 카쿠즈의 앞에서는 참았지만 방으로 돌아가서 혼자 남게 되니 비로소 긴장이 풀리며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왜 하필이면 데이다라의 모습이었을까. 침입자 놈이 원망스럽고 데이다라가 너무 보고 싶어서 남은 이틀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며칠 후. 내 몸에는 녀석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질 않아서 이렇게 따뜻한 날씨에 본의 아니게 목이 달린 셔츠를 입게 되었다. 데이다라는 칩임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내게 괜찮냐고 물었을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녀석이 히단에게 죽어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도 조금은 위로를 받고 싶었는데. 이번 일은 납치를 당한다든지 고문을 당한다든지 그런 것과는 다르다. 여자로서의 존엄성이 위태로웠던 순간이었기에 몸보다는 마음에 받은 상처가 더 크다. 사소리 오빠는 원래 무뚝뚝하니 그렇다 쳐도 데이다라라면 조금 더 나를 걱정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무사했으면 그걸로 된 건가? 남자들에게 이 정도는 별 것 아닌 일인가?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이 데이다라에게 그것밖에 안 되는 존재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똑똑똑-. 하마터면 뺨을 타고 흘러내릴 뻔한 눈물을 노크 소리가 멎게 했다. 서둘러 소매로 눈을 닦고 대답하니 덜컥 하고 문이 열린다. "몸은 괜찮냐?" "히단이구나. 그때는 고마웠어." "별 말씀을. 그보다 사소리랑 데이다라 녀석 방금 전에 다시 임무를 떠났어. 이걸 너한테 전해주래."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내게 건네준다. "뭐야?"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약이라고 하던데." 그러고보니 사소리 오빠는 독약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지… 알고 있었음에도 신기함을 느끼는 자신이 스스로도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한다. "데이다라는 무슨 말 없었어?" "데이다라? 딱히 없었는데." "그래…?" 오빠와는 조금 전까지 같이 있었지만, 데이다라는 아침을 먹을 때 빼고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다못해 인사만이라도 하고 가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떨어뜨리니 자연스레 어깨도 축 처지고 기분도 우울해진다. "아, 그러고보니." "?" "자기 얼굴을 보면 네가 나쁜 기억을 떠올릴지도 모르니까, 당분간 너와 마주치지 않도록 피해다니겠다고 했어." "……." 나를 위해서인가. 데이다라로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난 역시… 그와 함께 있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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