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지금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처럼 평화로운 날에도 사람은 종종 곤란에 처하게 되지만 보통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 그래,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공중에 떠 있다든지, 머리가 바닥을 향하고 있다든지, 온 세상이 거꾸로 보인다든지… 톡 까놓고 말해서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든지. 내가 방심했던 탓도 있지만 솔직히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한 함정이었다. 기만전술이 특기인 11살 소년은 실제 임무에서도 몇 번인가 이런 식으로 적에게 골탕을 먹였을 것이다. 머리에 피가 쏠려서 어지럽다. 그런 와중에 치마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움켜쥐어야 한다. 차라리 확 놔 버릴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일단 소년의 자비심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너 정말 학습력이 떨어지는구나. 어떻게 매번 똑같은 함정에 걸리냐? 바-보-!" 크윽, 저 얄미운 꼬맹이. 아니, 아니다. 여기에는 절대적인 사정이 있다. 그러니까 지금 사건의 전초를… 우욱, 토할 것 같다. 하지만 내 남자의 행동에 대해 제대로 변명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으로는 지금 가장 큰 곤란에 처해 있는 사람이니까. (…) 나도 토비에게 들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사건은 데이다라와 이타치의 휴일이 우연히 겹친 것으로 시작한다. 데이다라는 어린 시절 이타치에 의해 아카츠키에 입단하게 됐다. 아마 그때부터 우치하의 동술인 사륜안에 경쟁의식을 갖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무신경한 이타치는 좀처럼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데이다라로서는 자존심이 상하고 오히려 더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 당일의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간단히 말해서 데이다라가 이타치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다. 처음에 이타치는 늘 그렇듯 개의치 않았다. 문제가 생긴 것은 사스케의 얘기가 나온 시점부터다. 사스케는 이타치의 하나뿐인 동생으로, 말하자면 그의 아킬레스건 같은 존재다. 내가 감히 형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동생에 대한 험담을 들었을 때는 침착한 성격의 이타치도 일순간 분노가 치밀었을 것이다. '어이, 아무리 뭐래도 아군인 나를 갑자기 공격하는 건 비겁하지 않냐!' '너와 싸울 생각은 없다만 나에게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지금 사륜안을 꺼내서 뭘 어쩔 셈이야! 설마하니 지난번처럼 내 기억을 들쑤셔 놓으려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너는 나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타치는 데이다라에게 손을 뻗었고, 같은 순간 데이다라는 이타치의 사륜안을 보았다. 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몸이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분노 어린 붉은색 눈동자였다. 그리고 같은 저녁 데이다라는 자신의 방에서 깨어났다. 배고픔을 느낀 그는 곧장 침대에서 내려가 이렇게 외치며 거실로 달려갔다. "아줌마, 나 배고파! 밥 줘!" (…) 이야기가 이렇게 된 것이다. 아니, 가장 중요한 말을 빼먹었나. 결론적으로 지금 데이다라는… 우욱, 안 되겠다. 일단 내려가서 생각하지 않으면. "데이다라… 나,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 "그러게 누가 바보 같이 함정에 걸리래?" "부탁이야, 그만 내려줘." "재주껏 내려와." 농담이 아니다. 정말 토할 것 같다. 자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함정에 대해 좀 더 얘기하자면, 밧줄을 고리 모양으로 엮어서… 나무에 도르래처럼… 우우욱! 긴 말 필요없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밟는 순간 몸이 거꾸로 쑤우욱, 그거다, 그거. 아까 데이다라가 말했듯이 과거에도 나는 이런 식으로 여러번 함정에 걸렸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다. 부탁하지 않아도 조금 있으면 데이다라가 먼저 질렸다는 듯 밧줄을 끊겠지. 그때까지 놀림 당하는 것정도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내 몸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정말 안 내려 줄 거야?" "너 하는 거 봐서." 이제는 나도 나이가 있는지라, 화가 난다기 보다는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다. 입술을 깨물고 치맛단을 붙잡은 손에 살며시 힘을 뺀다. 그리고 아예 확 놔 버렸다. "우, 워, 워, 워, 넛, 너, 너 뭐 하는 거야!" "이제 더는 무리야. 팔도 끊어질 것 같아." 어차피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다. 남편 앞인데 뭐 어떠랴. 지금은 꼬맹이라지만 이보다 더한 것도 보이지 않았던가. 애당초 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같이 목욕도 했다. 재밌는 점은 지금 데이다라에게 아직 거기까지의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당황하며 홱 돌아서더니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가린다. "부, 부끄럽지도 않냐! 이래서 아줌마는!" "내려 줘." "나, 나, 나는 딱히, 네 팬티 따위 흥미 없지만! 그, 그러니까, 보, 보, 보기 싫어서 내려 주는 거야! 바, 바보 아줌마!" "빨리 내려 줘." 어떻게든 보지 않으려고 끝까지 시야를 차단하는 게 귀엽기도 하지만 지금은 긴장을 놓으면 안 된다. 넋을 놓고 있다가 그대로 땅에 머리를 박는 수가 있다. 다행히 남아 있는 힘으로 안전하게 도약했다. 그런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바닥으로 풀썩 쓰러져 소리 없이 아픔을 삼킨다. 한편으로는 고소하기도 하다. 그래봤자 꼬맹이는 꼬맹이구나. 그런데 끝이 아니다. 데이다라가 잘린 밧줄을 집어서 손에 돌돌 말아 꼭 움켜쥐더니 천연덕스레 웃으며 말한다. "나한테 잡혔으니까, 너는 오늘 하룻동안 내 종이야. 어디 가지 말고 내 말만 들어. 그럼 풀어줄게." 네, 네. 잊어 버릴 뻔했는데 이 또한 잘 알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데이다라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까짓거 직접 풀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하겠지만 이 매듭을 푸는 법은 데이다라만 알고 있다. 탈출하려면 무언가 날카로운 것으로 밧줄을 끊는 수밖에 없는데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처럼 의기양양한 데이다라가 그렇게 눈에 띄는 행동을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다. "이제 슬슬 저녁준비 해야 해." "생각 없어. 아까 잔뜩 먹었는걸." "데이다라는 늦잠을 잤으니 그렇겠지만 다른 멤버들도 있잖아. 맛있는 거라도 만들어서 이타치 기분 풀어 줘야지." 그래야 잃어버린 기억을 다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찰나, 데이다라가 밧줄을 확 잡아당긴다. "내 허락없이 다른 녀석 심부름 하지 마!" 어제까지는 화내고 짜증내기만 하더니 오늘은 난데없이 괴롭힘이 시작됐다. 예전과 마차가지로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대체 뭐가 맘에 안 드는 건지. 이타치는 몸이 안 좋아서 자신의 방에 있다. 다음 임무가 떨어질 때까지 푹 쉬어야 할 것 같다. 뭐라도 해서 빨리 기운을 차리게 하고 싶은데, 기억을 잃은 후로 데이다라가 좀처럼 내 말을 들어 주지 않는다. 처음에는 데이다라에게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19살의 모습이 어색하다고 일부러 변신술을 써서 11살의 모습이 되어 있는 마당에, 말해봤자 혼란만 더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데이다라 본인에게 심각성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었다. 어린아이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법적으로 이어진 건 아니지만 실제적으로 부부'라는 이야기는 구태여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라는 것, 딱 그 정도로만 이해시키려 애썼다. 그리고 실패. 11살의 아이에게는 다름 아닌 그것이 무엇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었나 보다. '내가 널 좋아한다고? 말도 안 돼!' 그는 콧방귀를 뀌며 더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오랫동안 19살의 그에게 익숙해진 나도 그런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좀처럼 믿지 않아서 나중에 토비의 증언까지 보태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다시 한 번, 오늘도 데이다라를 설득한다. 흥미 없다는 눈빛을 하고 있는 아이에게 '너는 날 좋아해'라고 계속 말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이 이제는 처량하게 느껴진다. 서서히 민망함이 밀려오더니 낯이 뜨거워졌다. 변함없이 퉁명스러운 데이다라의 반응도 은근히 아프다. "바보 취급하는 데도 정도가 있지, 시덥잖은 농담 집어치워. 내가 19이면 넌 벌써 30이란 소리인데, 결혼만 안 했을 뿐이지 그냥 아줌마잖아." "……." "애당초 너는 11살이나 어린 남자를 보고 그런 마음이 생기는 거냐? 아니면 뭔가 다른 걸 기대하고 있는 거야? 상냥한 누나의 얼굴을 하고선 말야." "……." "어쩐지, 처음부터 이상하다 했어. 진짜 동생도 아닌 나한테 아무 이유없이 친절할 리가 없잖아.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 "……." "뭐, 그렇지만 너 같은 바보한테 놀아날 내가 아니니까, 그리고 평생 집안일만 하다가 늙는 건 불쌍하니까, 앞으로 내 말을 잘 듣겠다고 하면 생각해 볼게. 일단 오늘부터 다른 녀석들은 전부 무시하고 나한테만…" 듣자듣자 하니까 이 꼬맹이가. 그냥 흘러들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남편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나오니 역시 아프다. 전부 지난 일이라지만 데이다라는 나에 대해 진심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렇다면 언제까지였을까. 오빠의 말대로 자신의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를 선택한 건 아닐까. 아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데이다라는 스스로 '나의 것'을 자처했다. 이제 와서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래, 지금은 네 마음대로 생각해. 데이다라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으니 이제 나도 모르겠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라도 해보는 수밖에 없다. "꿍꿍이 같은 거 없어. 데이다라는 입단할 때부터 워낙 어렸으니까, 낯선 곳의 생활이 힘들 것 같아서 도와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뒷바라지하는 것은 다른 멤버들에게도 마찬가지였고 특별히 데이다라에게 더 잘해 준 것은 없지만, 어쨌든 나는 그의 애인이 되기 전에 진심으로 좋은 누나가 되고 싶었다. "나도 연하 별로 안 좋아해. 맨날 어리광부리는 남자보다는 어른스럽고, 자상하고, 내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남자가 좋아. 11살 차이라니, 솔직히 부담스러워." "……." "실은 알고 있어. 데이다라는 내가 편한 것뿐이지 좋아하는 것과 다르다는 걸. 어차피 얼마 못 가 질려서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니까 내가 왜 참아야 하나 싶어." "……." "지금 데이다라는 11살까지의 기억밖에 없으니까 이렇게 말해도 이해할 수 없겠지. 차라리 잘 됐어. 이참에 헤어지자. 더는 시간낭비 하고 싶지 않아. 너도 장난은 그만두고 너한테 진짜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 이제 끝이야." 데이다라의 포켓에서 수리검을 꺼내 밧줄을 힘껏 자른다. 이어져 있던 것이 끊어지는 순간 내 마음도 함께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지만 데이다라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냉정하게 돌아서는 게,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냥, 괴롭다. (…) 평범하게 설득하는 편이 좋았다. 답답한 마음에 저질러 버리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기억을 되찾을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나중에 내 말이 떠올라 정말 상처받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탁탁탁, 야채를 썰던 손이 멈추고 한숨을 내쉰다. 이제 어떡한다. 방에서 점토를 만지고 있는지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않는다. 그래도 다행히 이타치는 휴식을 취하고 나서 몸도 마음도 한결 편안해진 것 같다. "자, 이것도 먹어봐." 금방 완성된 요리를 그릇에 담아 이타치에게 내어 준다. 정성을 봐서라도 용서해줘. 내 속마음이다. 누나로서는 당연히 병약한 동생을 걱정할 수밖에 없지만, 지금 나에게는 무엇보다 간절한 것이 있다. "이타치…" 속을 알 수 없는 그에게 조심스레 손을 뻗어 검푸른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이타치가 기억을 지웠으니 되살리는 것도 오로지 이타치만이 할 수 있다. 누나한테 왜 그래. 이제는 원망스런 마음도 든다. 데이다라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무슨 죄란 말인가.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기분이다. "이타치… 부탁이야… 나를… 날 좀 생각해 줘." "……." 이타치가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 놓더니 거실 쪽을 돌아본다. 마음이 착잡해서 깨닫지 못했다. 모퉁이 뒤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데이다라가 후다닥 모습을 감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달려가 보지만 이미 방으로 돌아간 듯하다. 어쩌면 좋지. 데이다라가, 내 남편이, 터무니없는 오해를, 아아- 가슴이 턱 막힌다. 낮에 나눴던 두 사람의 대화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뒤죽박죽 얽히고 설켜 있다. 그가 했던 말, 내가 했던 말. 정신차리자. 지금은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얼른 쫓아가야 한다. 이타치가 기억을 되살려 주기만 하면 해결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불안하다. 좀 더 서두르고 싶은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 생각해보니 일단은 마음을 조금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아서, 언제나와 같이 따뜻한 밀크티를 준비해 왔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간다. 점토를 만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불을 켜지 않았다. 캄캄한 방에 적막이 맴돈다. 혹시 잠든 것일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쟁반을 내려놓고 침대에 오른다. 벽을 향해 누워 있는 데이다라. 이불속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이쪽을 돌아보게 했다.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의 눈이 빨갛게 부어 있다. 애써 참고 있지만 나를 보자마자 다시 북받쳐 오르는지 하늘색 눈동자에 눈물이 아른거린다. "남편…." 무심코 중얼거리며 그의 뺨을 어루만진다.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지만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들인다. 시야가 흐릿할 것 같아 눈물을 훔쳐내자 이제는 묘하게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린아이의 감정선은 참으로 다양하다. "내 말 잘 들어요… 낮에 했던 말은 진심이 아니에요… 아까 본 것도…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이 여기 있는 한… 난 당신 것이에요…." "……." 점점 호기심이 짙어진다. 완전히 관찰을 당하고 있다.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 것 같지만 조용히 지켜본다. 작은 손으로 내 눈, 코, 입, 차례로 만져 보고는 어쩐지 얼굴이 빨개졌다. 다시 이불 속으로 손을 쏙 집어넣는다. 그리고 나지막이 내게 말한다. "난 그냥… 내가 어리다고 놀리는 건 줄 알고… 아이 취급 받기 싫어서……." 놀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어떻게 봐도 지금 데이다라는 아이가 맞다. 처음부터 나는 좀 더 그의 입장에서 생각했어야 했다. 아무리 남편이라지만 8년이나 과거로 돌아간 상태인데 평소처럼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단 말인가. 이렇게 부운 눈을 보니 자책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말을 듣고… 부정하지 않으면… 모두 내가 널 좋아한다고 생각할 거 아냐… 너무… 부끄러워서……." "데이다라는 지금 나를 좋아하지 않는구나." "다, 다, 당연하지…! 으, 으음… 시, 싫어하지는 않지만… 조, 좋아하는지… 그것까지는… 아아… 몰라…!" 서둘러 이불을 끌어 올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춘다. 이번에야말로 육성으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가 간신히 참았다. 잠시 기다리자 이불 밖으로 눈만 빼꼼 내밀고서 나를 지그시 쳐다본다. "아까… 함정… 미안……." 그러고보니 궁금했었다. 왜 나를 계속 함정에 빠뜨리는 건지. 데이다라가 딱 이만한 때부터 14살쯤 될 때까지, 과거의 나는 이유도 모른 채 그에게 괴롭힘을 당해야만 했다. "네가 다른 녀석들의 심부름을 하면… 왠지 열받아… 그래서 너를… 내 종으로 만들고 싶어……." "나는 심부름이 아니라 봉사를 하고 있는 거야. 모두 임무가 끝나고 돌아오면 피곤하고 배가 고프잖아. 정식멤버는 아니지만 어쨌든 나도 이곳 식구니까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그뿐이야." 종이라니, 어린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 아니다. 여기서는 아이의 순수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쩌면 데이다라는 단지 내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일도 함정 쳐 놔도 돼…?" 지금 뭐라고… 푸핫-, 그걸 나한테 물어 보면 어떡해. 나로서는 안 된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잖아. 평범하게 생각하면 그래야겠지만, 아아, 내가 졌다. "응, 쳐 놔도 돼." 귀여운 남편의 그 정도 장난쯤은 받아줄 수 있지. 하지만 일단 기억을 되찾고 나서 생각하자. 원래대로 돌아가고 나서도 그런 장난이 치고 싶다면야. "헤헷-…" 내가 함정에 걸리는 생각만으로 흐뭇한 거냐. 정말 귀여워서 볼을 꼬집어 주고 싶다. 그래도 가만히 있었더니 데이다라가 이불 밖으로 완전히 나와서 나를 똑바로 마주본다. "너, 정말 내 애인이구나." "그렇다니까." 이제 나를 믿는 모양이다. 대답을 듣고서 베시시 웃더니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시선을 모로 돌린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의 태연한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애인이니까, 섹스도 했겠네?" 어렸을 때부터 섹스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었구나. 여지없이 당황하면서도 이제는 내가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는 걸까,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걸까, 생각을 사뭇 달리 하게 된다. "으, 응." 소년은 어른의 영역이 신기하다. 앳된 얼굴에 환하게 생명력이 이는가 하면 보석 같은 하늘색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거린다. "그럼 내 찌찌 짚어봐." 콕. "헉, 진짜냐." 까짓 거 식은 죽 먹기지. 잠옷에 가려진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몇 번을 봤다고 생각하는가. 단지 보기만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큰 오산이다. 지금이라면 눈을 감고 짚어 보라고 해도 자신 있다. 콕콕. "그, 그만해…////" 알아, 너 거기 약한 거. 약점을 들켜 버린 데이다라가 자신의 몸을 감싸안는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겨드랑이를 간지럽히자 고맙게도 곧바로 반응이 온다. 꺄르르 웃으며 발버둥치다가─. "나 너 좋아."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도 놀랐는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당황스러워한다. "아, 아, 아니, 너가 아니라… 너, 너, 너의 손이 좋아!" 처음 듣는 말인걸. 그래, 지금은 그거면 됐어. 기분이 좋아서 어린 데이다라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준다. "밀크티 만들어 왔는데 마실래?" "나 우유 안 먹어…" "어렸을 때는 그랬지. 근데 어른이 된 지금의 데이다라는 자주 마셔. 이상하면 뱉어도 되니까 일단 한 모금 마셔 봐. 몸이 따뜻해져서 잠이 잘 올 거야." 아까 침대 옆에 쟁반을 올려 놓았다. 데이다라가 주로 작업할 때 사용하는 커다란 머그컵에 달콤한 밀크티. 살며시 손을 대어 본다. "응, 뜨겁지 않고 딱 마시기 좋아." 반신반의하며 머그컵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시더니 머리 위에 작은 폭죽이 퐁퐁 터진다. 맛있구나.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축 늘어지는 모습이 그렇게 또 귀여울 수가 없다. "." 기억을 잃은 뒤로 데이다라는 한 번도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요 며칠간 나의 호칭은 '바보' 아니면 '아줌마'였다. 그렇기 때문에 씁쓸함과 감동이 동시에 밀려 온다. "내일 재수탱ㅇ… 이타치한테 사과할게… 그러니까 헤어지자고 하지 마……." "당연하지. 누가 내 목에 칼을 들이댄대도 이제 절대 그런 말 안 해." 비유가 조금 이상한 것 같지만 실제로 나는 언제나 머릿속에 상기하고 있다. 데이다라는 나의 것.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다.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가 아닌가. 스스로 버린다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근데… 기억을 되찾으면… '지금의 나'는 다시 과거로 사라지겠지…?" 어린 아이의 생각 같지 않아서 사뭇 놀랍다. 데이다라는 또래의 아이들이 점토를 던지고 놀 때 그것으로 새와 곤충을 만들었으니 그의 예술적 재능에 놀라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감수성이라든지 사고 자체가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던 것 같다. "모처럼 미래에 오게 됐는데… 내일이면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하니까… 슬퍼……." "……." 순간의 미를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여기는 데이다라는 자신이 평소에 아끼던 사물이나 머물렀던 장소에 미련을 갖지 않는다. 유일하게 가진 것이 있다면 부끄럽지만 그것은 '나'일 것이다. 그런데 방금 사라지는 것이 '슬프다'고 말했다. 얼마나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지 깊숙이 와닿아서 나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사라지는 게 아니야.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지. 거기서는 또 다른 내가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하지만 내가 아는 너는… 날 안 좋아해… 친절하긴 하지만… 모두에게 마찬가지야……." 당시의 내게는 물론 데이다라에 대해 이성적인 감정이 없었다. 그저 늦지 않도록 깨워 주고, 맛있는 밥을 해 주고, 춥지 않게, 덥지 않게, 아프지 않게, 좋은 누나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 뭐라 해도 겨우 11살이 아닌가. 이미 20대에 접어든 나로서는 동생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내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지면 그냥 말하면 돼. 네가 뭐라고 말하든 나는 기쁠 거야." 다시 한 번 그때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언젠가 여자가 필요하게 되면…' 보다는 조금 더 로맨틱했으면 좋겠지만. 지금까지도 가슴에 간직한 말들을 되새길 때마다 나는 아이처럼 기대와 설렘을 느낀다. 앞으로 1년 뒤의 일이지만 12살 남자아이에게 프로포즈를 받는 것이 어디 흔한 일이던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비록 어려졌어도 데이다라는 이미 여자를 설레게 만들 줄 아는 녀석이다. "솔직히… 너는 나보다 이타치를 더 좋아해……." "으음, 예전에 잠깐 그럴 뻔했던 적이 있지만 신경 안 써도 돼." 이타치는 같이 있다 보면 누구라도 호감을 느낄 것이다. 잘생겼고, 강하고, 무뚝뚝하지만 은근히 상냥하고, 데이다라 이상으로 조숙해서 예전부터 아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더 좋았다는 게 아니라, 푸훗, 어쨌든 나는 가끔 나를 함정에 빠뜨리기도 하는 어린 데이다라가 좋았다. 그리고 지금은 사랑하고 있다. "저기… 나, 그냥 이대로 있으면 안 돼? 이타치한테 사과는 할게." "에?" "난 지금 여기가 더 좋아. 돌아가기 싫어." "……." "부탁이야." 하늘색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린다. 생각할 것도 없이 용납되지 못할 일이지만 거기에 비친 간절함을 보고 생각해 보았다. 8년이란 시간을 잊은 채 살아간다는 것. 나는 둘째치더라도 나의 19살 남편은 어찌 될까. 물론 나는 어느 한쪽도 잃고 싶지 않다. 하지만─. "미안, 데이다라." "……." 실망한 듯 고개를 떨어뜨린다. 그러나 예상하고 있었던 대답인가 보다. 머잖아 사랑스런 웃음을 되찾으며 데이다라가 나를 바라본다. 조금 올려다본다. 커다란 호기심과 희망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 아주 먼 곳까지 뻗어 있다. 그리고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19살의 데이다라에게도 같은 것이 보였다. 목소리가 아닌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너랑 매일 같이 놀 수 있는 거지-. 기대된다-." 말투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의미는 그대로 내게 전해졌다. 나의 가슴을 따뜻하고 행복한 감정으로 물들였다. '매일 같이',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재의 두 사람에게도 그것은 여전히 '꿈'으로 남아 있다. 뭐가 어쨌든 나는 기대하고 싶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기대를 거는 것 정도는 지금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나 금방 돌아올게-. 다른 녀석이랑 결혼하면 안 돼-." 금방은 무리일 것 같은데. 너무 오래는 못 기다려. 은근히 짓궂은 생각을 하기도 하며 데이다라의 뺨을 장난스레 꼬집는다. 간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리는가 싶더니 불현듯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갑자기 불쑥 올라와 입을 맞춘다. 남편과 키스하는 것은 좋지만─ 지금 남편은─ 이럴 때는 어떡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누구나 그렇겠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으니 데이다라가 두 팔로 내 목을 끌어안는다. 저도 모르게 마주안았다. 금발의 머리카락이 작은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다. 스르르. 부드럽게 쓸어넘기자 입술이 떨어진다. 대신 뺨을 타고 내려오는 손에 키스하고 그대로 살며시 기댄다. 나를 향해 고정되어 있는 하늘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난다. 아마도 내 착각이겠지만 묘하게 유혹적인 눈빛이다. "계속 하고 싶어?" "응." "나는 여기까지밖에 모르지롱." 장난꾸러기답게 웃으며 내 손에 뺨을 부비적거린다. 모른다면서 아까 아무렇지 않게 말했던 건 뭐였냐. 나를 놀리고 있음에 분명하지만 11살의 소년이 어른의 세계에 대해 그리 깊숙이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내일 나랑 얘기해." "알았어." 작은 몸을 감싸안고 조심스레 침대에 눕힌다. 입장이 반대로 되었기 때문인지 무심코 평소의 데이다라를 흉내내게 된다. 한손으로 상냥하게 머리를 받치고 있다가 베개에 내려놓는 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점, 끝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점, 뺨에 키스, 입술에 키스, 하나하나… 그러자 데이다라의 얼굴에 더할나위 없는 평온함이 비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넌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거지." 그렇게 주고받고는 웃음을 터뜨린다. 솔직하게 언제나 네가 이렇게 하고 있다고 말해 볼까. 재밌을 것 같지만 그의 눈이 스르르 감긴다. 이대로 기분 좋은 꿈을 꿀 수 있게 놔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퐁- 변신술이 풀린다. 잘생긴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가슴이 쿵 뛰었다. 아까 데이다라가 했던 것과 같이 이마, 눈썹, 코, 입술을 차례로 만져 본다. 분에 넘치는 행운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이렇게 어른이 된 그는 내게 기쁨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안겨 준다. 무엇이든 생각만으로 아찔해서 몸에 긴장이 들어간다. 하지만 내일까지 기다려야겠지. 하루가 아니라 일 년, 십 년이 걸린대도 기다릴 수 있다. "잘 자요… 돌아갈 수는 없지만… 항상 그곳에 있는… 내 사랑……." (…) 다음 날 아침 데이다라는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기억을 되찾았다. 잘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일정기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리는 술법이었던 것 같다. 이타치의 말로는 실제로 기억을 지우는 경우 온전히 되살려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덧붙여 아무리 화가 날지언정 자신의 동료에게 그런 짓을 하겠냐며 안심하라는 말도 했다. 기억을 잃고 여러 가지로 수모를 겪은 데이다라는 여전히 이타치에게 불만이 있는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타치는 임무를 떠났다. 결국 내가 그렸던 훈훈한 모습은 없었고 이번에도 찬바람 쌩쌩이었지만 그게 언제나의 일이다 보니 그냥 웃음이 나온다. "데이다라, 오늘은 어디에 함정 쳐 놨어?" "그만 놀려라." 질렸다는 듯 말하고 있지만 변함없이 재밌는 반응을 보인다.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물론 뾰로퉁한 표정을 짓는 게 너무 귀여워서 놀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그동안 내가 크게 착각했던 것이 있는데,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11살의 데이다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여기, 내 남편의 얼굴에, 눈동자에, 그대로 보이고 있다. "나는 오늘 하루 데이다라의 종이 되어도 상관없는데." "아아, 이타치는 떠났고 토비도 외출했다." 끄덕끄덕 하면서도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음표를 띄웠다. 데이다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유히 내게 걸어온다. 어제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어른의 손이 허리를 끌어당긴다. 몸이 밀착되고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나머지는 나랑 얘기하기로 했었지." 위험하다. 언뜻 보면 달달한 상황 같지만 본능적으로 뭔가 엄청난 게 온다는 것을 느꼈다. 데이다라가 천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의 시선이 한쪽 얼굴에 꽂힌다. 아니나 다를까 차갑다. 아프다. "다시 한 번 말해봐." "뭐, 뭐를…" "더는 시간낭비하기 싫다고?" "……." 이미 충분히 밀착되어 있는데도 점점 가까워진다. 움츠리고 움츠리다 쭈굴이가 되어 어깨를 바들바들 떤다. 아무 말도 없기에 그냥 넘어가나 보다 했는데 어쩐지 평소와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싶었다. 그땐 11살이었지만 만약 19살의 데이다라가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면… 어쩌지, 무섭다. "어제도 말했다시피… 그건 진심이……." "아니, 너는 그런 말들을 떠올리는 즉시 내뱉을 수 있을 만큼 대담한 녀석이 아니다. 분명히 훨씬 전부터 생각했을 거다." "……." 한 번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생각했지만, 불안했지만, 지금이라면 데이다라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귀기 시작한 뒤 힘든 일도 많았지만 데이다라는 내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헌신을 했다. 내 말을 듣고 그러한 노력들이 모두 헛수고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겠지. "한 번만 더 같은 이유로 헤어지자는 말을 해 봐라. 그땐…" 데이다라가 나를 때릴 리 없지만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 그렇지. 이제 안전하다는 생각에 눈을 뜨려다가, 뜨려, 뜨, 뜨헉! 그가 내 귀를 콱 물었다. 무는 힘도 힘이거니와 오늘따라 짐승처럼 날카롭다. 처량한 비명과 함께 아픔을 호소하자 비로소 떨어진다. 그런데 자기가 물었던 부위를 보니 새삼 안쓰럽기라도 했던 건지, 천천히, 야릇하게 키스를 하고 핥는다. 매끈한 혀가 지나가며 아픔과 쾌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또 걸렸구나. 바보."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중저음의 목소리. 멍 하니 있다가 그대로 붙잡혔다. "오늘 하루 종이 되어도 좋다고 네 입으로 말했다."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민감해진 귀를 괴롭히고 싶은지 연달아 같은 곳에 키스한다. 쪽, 쪽, 입술과 혀로 일부러 더 예리하게 자극한다. 힘이 풀려 스르르 미끄러지는 찰나, 다리 사이로 단단한 허벅지가 들어온다. "내가 하는 말은 뭐든지 듣겠다는 거지." 밑에서 스치는 것만으로 쾌감에 몸서리가 쳐진다. 나는 바보다. 이렇게 금방 민감해지면서, 다음을 바라면서, 어떻게 헤어질 수 있단 말인가. "뭐부터 시켜줄까." 어젯밤에는 귀여웠는데. 그때 데이다라의 부탁을 그냥 들어줄걸 그랬나 보다. 하지만 오늘도 내일도 키스까지밖에 못한다고 생각하면 역시 이쪽이 낫다. 이쪽이 아니면 안 된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었겠지만 지금은 곤란하다. "일단 방으로 가면 안 돼…?" "글쎄, 너 하는 거 봐서." 어제와 같은 말. 내게 일부러임을 알게 하듯이 입꼬리가 올라간다. 내가 무슨 말을 내뱉는다 한들 아무 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데이다라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11살 꼬마는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게 즐거운가 보다. 괴롭히는 방식이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을 뿐. "상냥한 누나의 얼굴을 하고서, 야하구만." "그만 놀려…!" 잠깐 사이에 입장이 바뀌어 버렸다. 어째서 내가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지. 나직한 웃음소리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나이가 많아지든 적어지든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데이다라를 당해낼 수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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