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 것을 시작으로 하루 종일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좀처럼 입맛이 없어 식사도 거르고 이불속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잠들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여기가 어디지. 분명하지 않지만 몇 번인가 왔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때 훈련을 하다가 지치면 종종 이곳에 와서 쉬곤 했다. 거친 숨이 가라앉을 때까지, 심장의 고동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러다 이따금씩 기분 좋게 낮잠을 자기도 했다. 좋아하는 아이의 얼굴을 그리면서. 하늘을 향해 뻗어난 가지와 잎사귀들이 바람에 따라 일제히 춤을 춘다. 녹음의 그림자가 흔들리며 다양하게 모습을 바꾼다. 순진무구했던 시절 소녀의 마음을 진하게 물들였던 색, 그의 머리카락과 같은 검푸른색 형상이 눈에 아른거린다. "……." 잠에서 깨어나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어느새 열이 나고 땀을 흘려 이불이 흠뻑 젖어 있었다. 데이다라가 보면 걱정할 텐데. 평소처럼 일어나 외투를 받아 줘야 하는데. 얼마 전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오늘만은 꼭 하고 싶다. 하지만 이런 상태로 내 진심이 전해질까. 근심이 독이 되어 바보같이 몸살에 걸려 버렸다. 조금 쉬면 괜찮으려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머리가 멍해서 남편의 기척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데이다라가 바닥에 주저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다. 금발의 머리카락이 내려앉은 어깨에 힘이 없다. 안색은 말할 것도 없이 창백하다. "내가 너무 늦었나? 미안해, 여보-. 그치만 대장이 술을 마시자는데 부하인 내가 매번 거절할 수는 없잖아. 마누라가 걱정한다는 핑계는 이제 질렸을 테니까 말야. 계속 같은 말로 둘러대면 당신이 속 좁은 여자라는 오해를 받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어." 영주의 호위부대니까 다른 곳보다 기강이 엄격하게 잡혀 있음은 보지 않아도 안다. 호위부대의 대장은 명망이 높은 사람이지만 지독한 애주가여서 부하들이 애를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데이다라는 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따금씩 입장이 곤란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갑자기 이렇게 무리를 하다니. "이기지도 못할 술을 왜 마셔." "그러게-. 내가 올해 들어 좀 이상해.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한두 번 한 게 아니야. 누나처럼 따랐던 여자한테 손을 대질 않나, 바람맞고 울질 않나, 이렇게 훌륭한 곳에 살면서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몇 겹이나 걸쳐 입고, 권력에 빌붙어 껏하면 머리 조아리고… 지긋지긋하다 정말. 당신도 나한테 정 떨어졌지?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 "……." "말해 봐, 또 그 새끼 생각했어? 당신 하나만 보고 절절 매는 내가 등신 같아? 그래, 여보-?" "오늘은 너무 취했으니까 그만 자자." "아무리 망가져도 나는 나야. 자유롭게 날아다니면서 맘에 안 드는 것들은 죄다 부숴버리던 그때의 나라고.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해. 당신이 내 유일한 위안이야. 그러니까… 내가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당신을 안을 수 있게 해줘." 말릴 틈도 없이 데이다라가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억지로 옷을 잡아내리고 차갑게 얼어붙은 손으로 부드러운 가슴을 움켜쥐었다. 술 때문에 자제력을 잃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어르고 달래봐도, 밀어내봐도, 멈추지 않았다. "데이다라… 그만해…!" "나는 남편의 의무를 다했잖아. 당신도 할 일은 해야지." "몸이 안 좋아서 그래… 도저히 못하겠…" "우리 여보는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어. 내 심장이 타들어가는 건 전혀 모르나 봐?" 이불 위로 엎어져 그대로 신음을 토해냈다. 푸른 달빛이 방안까지 새어들어왔다. 데이다라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애타는 마음에 일부러 문을 닫아 두지 않았다. 가뜩이나 열이 나는 몸으로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고 바들바들 떨면서도 꽃과 나무들을 곁에 두고 싶었다. 둘만의 작은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들이 마치 지난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기다림이 고단하지 않았고 때로는 설레기도 했다. 영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지난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 데이다라가 없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다. 여전히 이겨내지 못한 상처가 남아 있긴 하지만 데이다라가 곁에 있기에 행복하다는 사실만은 변함없다. '나는 당신이 괜찮은 줄 알았어.' '내가 바보였구나.' 그때의 말을 곱씹을수록 가슴이 아팠다. 데이다라가 느꼈던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다. 왜냐면 나는 진심으로 행복했으니까. 그리고 데이다라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했다. 착각이라면 오히려 내가 하고 있던 거다. 데이다라는 자신이 내린 결정에 조금도 후회가 없을 거라고. 하지만 누나이면서 먼저 연정을 품은 것은 나였다. 데이다라를 불안하게 만든 것도, 그의 날개를 꺾어 버린 것도… 나였다. 바위마을을 떠났을 때 그랬듯이 아카츠키에 등을 돌렸을 때도 어딘가에는 분명히 미련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때로는 견딜 수 없이 답답하기도 하겠지.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자신의 사랑을 과신해 왔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데이다라의 마음은 지나치게 가벼이 여겼다. 데이다라가 나를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그동안 전부 지켜봤으면서. "… 여보……." 괴로움에 신음하는 듯한 숨소리.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차마 떨리는 입술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물에 젖은 뺨을 기대었다. 아픔을 안고 있으면서도 무엇보다 깊고 뜨거운 자신의 마음을, 애정을, 어떤 말보다 전하고 싶었다. "사랑해……." "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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