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전서구로부터 받은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돌아갈 때까지 잠들지 말고 기다려줬으면 한다. 조금 늦어질지도 모르니 방에 있도록 해라. 갑자기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어쨌든 나는 방에서 집안일을 하며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깊은밤이 되어 데이다라는 아지트로 돌아왔다. 그의 웃는 얼굴이 평소보다 밝았지만 그만큼 지쳐보이기도 했다. 그는 방의 문을 열고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들어보였다. 가방 안에 든 것은 지난 날 오빠와 시간을 보내며 한번 씩 접해본 적이 있는 술들이었다. 데이다라는 술을 싫어하고 내가 마시는 것 또한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어딘가 경치 좋은 곳에 가서 같이 마시자는 그의 말에 놀라며, 나는 주방에서 간단히 먹을 것을 챙겨 그를 따라나섰다. 그로부터 잠시 후 도착한 곳은 고요하고 한적한 밤의 숲. 달빛 아래 차가운 계곡물이 흐르는가 하면 딱 경치를 구경하기 좋을 만치 커다랗고 납작한 바위가 근처에 놓여 있었다. 바위에 나란히 앉아 술을 나눠 마시며 오랜만에 웃고 떠들다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데이다라와 편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은 딱히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이런 것은 상당히 오랜만인 것 같다. "아, 기분 좋다. 왠지 데이트하는 것 같아." 달뜬 목소리로 사근거리며 데이다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술기운으로 뜨거워진 얼굴에 차가운 코트가 닿으니 더할나위 없이 마음이 편안하다. "술은 더 필요없냐? 여기 스트로베리 붐붐이라는 이름의 재밌는 녀석도 있다만. 음." 데이다라가 아직 개봉하지 않은 핑크빛의 술을 살며시 뺨으로 가져가며 내게 권한다. 여자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작은 병을 쥐고 있으니 과연 마음이 혹한달까, 미인의 애인을 둔 자신에게 뿌듯해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맛이 궁금하지만 여기서 더 마시면 취할 것 같아. 나는 머리가 멍해지는 순간부터 딱 그만 마시는 게 좋다고 오빠가 그랬거든. 나는 착한 동생이니까 오빠의 말을 잘 들어야지." "역시 나리는 철저하군. 덕분에 곤란하게 됐어. 난 너를 취하게 만들 생각으로 술을 준비한 것인데, 어쩔 수 없나. 음." 그가 아쉬운 듯 스크류베리 봉봉(?)을 가방 안에 돌려놓는다. 솔직히 맛이 궁금하기도 하고 더 마시고 싶은데 그러다 행여 데이다라의 앞에서 흉한 꼴을 보이게 될까 두렵다. 예를 들어 술기운을 빌어 그에게 매달렸던 때와 같은. "나를 취하게 만들 생각으로? 어째서? 데이다라 넌 내 술주정의 가장 큰 피해자잖아." 그때 내가 그런 식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우리 관계는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누나와 동생처럼 지냈을 것이고, 그랬다면 데이다라의 마음이 지금보다는 한결 편안했을 것이다. 나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술이 깬 다음에는 네가 기억하지 못했으면 하거든. 음." "뭔진 몰라도 중요한 말 같네. 웬만하면 정신이 멀쩡할 때 해줘." "……." 데이다라도 나 만큼은 아니지만 본래 술이 약하다. 그래서 별로 마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살짝 붉어진 얼굴에 나른함이 비치고 있다. 침묵과 함께 마른 웃음을 짓는가 하면 고개를 정면으로 되돌린다. 피곤한 듯, 그가 두 팔을 무릎에 걸친 채 어깨를 늘어뜨린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내가 널 아주 많이 사랑한다." 그의 말을 기다리는 동안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기억하지 못했으면 하는걸까. 혹시 내가 상처받을까봐 그 동안 속으로 감추어왔던 것을 얘기하려는 것인가. 내 얼굴이 늙었다든지, 가슴이 너무 납작해서 매력을 못 느끼겠다든지. 설령 그렇다고 해도 화를 낼 이유는 없고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잖이 가슴이 아플 텐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런 저런 상상을 했던 것에 비해 그가 실제로 내뱉은 말이 너무 귀여운 것이라, 저도 모르게 순간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하핫, 뭐야 그게." 데이다라도 나를 따라 피식 웃음을 내뱉더니 더 이상 말이 없다. 그래서 내가 자연스레 틈을 파고들었다. "그러고보니 갑자기 생각났는데, 우리 예전에 같이 축제에 가서 불꽃놀이 구경하기로 약속했었잖아." "아아, 그랬었지. 음." 사실 스쳐지나가는 얘기처럼 꺼낸 말이었기에 약속이라 하기엔 조금 애매하다. 그래서 어쩌면 잊어버렸을지 모른다 생각했는데, 데이다라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거, 지킬 생각이 있긴 한 거야?" 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더니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단지 내 시선을 피하며 머쓱한 듯 쓴웃음을 지을 뿐이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으휴." "미안하다……." "됐어, 흥." 이것도 저것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장난스레 토라진 척을 하며, 다만 씁쓸한 기분을 느낀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 나뭇잎이 서로 부딪치며 스산한 분위기가 맴도는 가운데, 데이다라가 살며시 내 손을 붙잡는다. 밤은 차갑지만 그의 손은 따뜻하다. "이해해줬으면 한다. 나한테는 너밖에 없다는 거 알잖냐. 음."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손을 빼버렸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속으로 그를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솔직히 나밖에 없는 것은 아니잖아. 거의 대부분의 시간 너는 내가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있잖아. 또 다시 그러한 원망의 말을 삼킨다. 무릎을 끌어안고 지면 위를 바라보고 있는데, 데이다라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아서 계속 침묵이 맴돈다. 이래선 안 되겠단 생각에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 내가 아니면 누가 널 이해하겠어. 오늘 같이 나와서 바람쐬게 해줬으니까 봐줄게." 그리고 다만, 가슴에 남은 씁쓸함을 가볍게 털어놓는다. "하지만 가끔은 정말 답답해……." 문득 슬픈 기분이 드는 것은 어떡해야 하는 걸까. 아까 데이다라가 가방 안에 넣어두었던 술병을 꺼내, 과감히 뚜껑을 딴다. "에이, 모처럼이니까 그냥 취할 때까지 마시자." 벌컥벌컥 들이키는 나를 말릴 법도 한데, 데이다라는 단지 조금 전의 나처럼 지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차라리 내게 솔직하게 말하지 그러냐. 음."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마시던 것을 멈추고 조용히 술병을 내린다.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이것도 진심인가. 머리가 생각하기 전 가슴이 먼저 아려온다. "실은 알고 있다. 이런 나를 이해하기엔 네가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거. 아니까 감출 필요 없어."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침묵하자 다시 한 번 그의 목소리가 의식을 깨운다. "너도 평범한 여자들처럼 살고 싶을 거다. 함께 있는 것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긴 이런 관계 말고, 언제나 네 곁에서 의지가 되고 힘이 되어주는 그런 관계를 원할 거야." 그의 말이 맞다.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감추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에게 뭐라고 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고민하는 것 조차 괴로워서 고개를 떨어뜨린다. "말해." 문득 데이다라 손이 나의 양팔을 붙잡고 그 힘에 저절로 고개가 들어진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그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말해라, 원한다고. 같이 떠나자고." 그의 말에 짧은 시간 정말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왜 그러냐?" "그냥 머리가 멍해져서. 미안, 취했나봐." 다시 긴 침묵이 맴돈다. 어느덧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거리가 생겼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이어져 있다는 것을 내 마음은 알고 있다. "사랑한다, ." 데이다라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들려온다. "사랑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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