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씨가 쌀쌀하니 요즘엔 텃밭을 일구는 일을 제외하고는 아지트 밖으로 나가는 일이 좀처럼 없다. 온종일 집안에만 있자니 심심하고, 그러다 보니 책을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장을 보러 간 김에 서점에 들러 책을 두 권 샀다. 하나는 공부를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심풀이를 위한 잡지다. 재밌는 잡지도 좋지만 일단 공부를 먼저 해두는 편이 좋겠지. 오면서 대충 훑어보니 '누군가의 심리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방이 어떤 풍경으로 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내조자로서 나의 애인이 쓰는 방은 어디에 뭐가 있는지 이미 세세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살펴볼까 하고 문을 열어 보았다. 누군가 데이다라의 작업대 앞에 앉아 있다. 익숙한 금발의 뒤통수를 보고 그가 돌아왔나 생각했지만 곧바로 위화감을 느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기척을 느끼고 잠시 당황하는 듯하던 금발의 남자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마주선다. 뒤통수만 봤을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맑은 하늘색의 눈동자를 보고 확신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남자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가까워진 만큼 지금은 고개를 뒤로 젖혀야지만 그와 시선을 맞출 수 있다. 키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야?" "근처에 왔다가 잠깐 들렀다. 음." 대답을 듣고 나니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말끝 마다 붙는 이 '음'이야말로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데이다라만의 치명적인 매력이 아니겠는가. 후훗. "지금 모습은?" "아… 이건……." 너무나도 익숙한 내 남자의 느낌이라 처음에는 그다지 의식하지 못했는데, 가까이, 자세히 보면 볼수록 감탄사가 나온다. 오늘이 무슨 기념일이었던가? 생일도 아닌데 엄청난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네가 열아홉이 되긴 싫다고 하니까… 내가 서른이 되어 보는 건 어떨까 하고……." 진짜 어른이 된 데이다라의 모습이라니. 이미 충분히 사랑스러운 내 애인의 얼굴에 중후한 멋이 생겼다. 다른 한편으로 은근히 충격적인 것은 그의 머리카락 기장이 짧아졌다는 것이다. 우와, 설레는 마음으로 쫑쫑 걸음을 옮겨 뒷모습을 살펴본다. 마치 늑대의 뒷덜미 같은, 흔히들 '울프컷'이라고 하는 머리 모양으로, 윗부분은 짧고 아랫부분은 어깨에 닿는 정도다. 이전과 같이 얼굴 한쪽을 가리고 있는 긴 앞머리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서클렛의 회색천이 모양을 딱 잡아주고 있어서 굉장히 터프한 닌자의 느낌이 난다. 뭐라 형용하기 어렵지만 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내 맘에 쏙 든다. "이렇게 보니 아버님이랑 똑같네." "사진을 보고 여러 가지로 참고했으니까…. 뭐… 그렇겠지… 음……." 데이다라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고 하는 그의 부친은 비록 사진 속 모습으로밖에 뵌 적이 없지만 전형적인 금발의 미남이라 딱 한 번 보고도 기억할 수 있었다. 지금 데이다라의 머리모양도 아버님을 따라한 것이다. " 너는 어디에 다녀온 거냐?" "나…? 나는… 장보러……." 아차,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손에 쥐고 있던 책을 숨기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휘이 돌아서 자신의 방으로 가려고 하자,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데이다라가 내 어깨를 덥석 붙잡는다. 멈칫 하고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마주서게 되었다. 어떻게든 표지를 가려 보려 하지만 데이다라가 그런 내 손을 치우려 하고, 파르르 떨린다. 안 돼, 보면 안 돼, 네 심정만 괜히 복잡해질 거야. 제발. 크윽. 더는 버틸 수 없어 체념함과 동시에 데이다라가 책을 홱 가로채고,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그의 눈썹이 움찔 떨린다. 책에는 유독 크고 선명하게 이런 제목이 새겨져 있다. 「청소년 심리학」. 부제목으로 '초보 학부형을 위한'이라는 문구도 깨알같이 보인다. 후덜덜. "……." (…) 설마하니 들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좋겠는데.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데이다라는 지금 이불속에서 홀로 속상한 마음을 삭히고 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자책감이 마구 밀려온다. "데이다라." "미안, 혼자 있고 싶다." 나를 외면한 채 누워 있는 데이다라의 등에 대고 말을 건네 봤자 돌아오는 것은 무덤덤한 대답뿐이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침대 위로 올라가서 능청스레 다시 대화를 시도한다. "데이다라, 나 좀 봐 봐." 부비적 부비적 되도 않는 애교까지 부려가며 애쓰는 것이 가상했는지 비로소 데이다라가 몸의 방향을 바꾸어 눕는다.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보다 충격이 컸던 것인지 넋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다. "자신이 너무 바보처럼 느껴진다. 나는 무슨 기대를 하고 있었던 거지. 그래봤자 너는 속으로 나를 아들의 또래 정도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음." 그런 게 아니야. 난 그냥 너를 이해하고 싶어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네가 나랑 있을 때 세대차이를 느끼면 어떡하나, 지루해하면 어떡하나, 걱정되어서 공부하려고 했던 거야. 심리학뿐만 아니라 최신 유머라든지 신조어라든지 전부터 이거저것 공부하고 있었다고. 나 요즘 애들이 쓰는 말 많이 외웠어. 네가 이러고 있으면 나는 가슴이 찢어져! 슴가찢이야! 흑흑.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건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고 속으로 아무리 외쳐 봤자 나의 어린 애인에게는 전해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기왕 아지트에 들렀으니 밥만이라도 먹여 보내야지. 킁 하고 코를 삼키며 침대에서 내려가려는데 갑자기 데이다라가 일어나서 내 허리를 끌어안는다. 그리고 내 등에 머리를 기대며 작게 중얼거린다. "난 어린애가 아니다." 그야 물론 나도 애인인 데이다라를 마냥 어리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런저런 짓을 하지는 못했을 거고, 애당초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맞아, 데이다라는 어린애가 아니야." 하지만 나보다 11살이나 아래인 것은 사실이니까, 그가 내 나이에 무리하게 어울리도록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연상인 내가 조금씩 그에게 맞추어 나가는 것이 옳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온종일 아지트에서 생활하는 내게 노력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해봤자 책을 읽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내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거냐? 나는 나름대로 어른스럽게 행동하려고 했는데. 무의식중에 유치한 면이 드러난다든지 하는 거라면 말해라. 고치겠다. 음." 유치하다기 보다는 귀여운 면이겠지. 조숙해도 아직 어린 데이다라니까 이따금씩 내게는 귀엽게 느껴진다. 그 편이 자연스러우며 당연한 것이다. 무의식 중 드러나는 여린 부분들이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것인데 고친다니, 그래서는 안 된다. "난 지금 내 앞에 있는 데이다라가 좋아." 솔직히 말해 아까 성장한 데이다라를 보고 잠깐 혹하긴 했다. 구태여 덧붙이자면 그 모습이 내 이상형에 좀 더 가깝긴 하다. 그러니까 지금의 데이다라가 좋은지 어떤지와는 전혀 별개로, 뭐랄까,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좋아, 해 보자. 이럴 때는 넌지시 말 꺼내 보기! 그리고 안 되면 말구 전법을 사용하는 거야! 뭐라고 해도 상대는 내 애인인데 뭐 어떠랴. 나도 사람이고, 텅 빈 아지트에서 홀로 애인을 기다리다 보면 여러 가지로 욕망이 쌓인다. 별 수 없지 않은가. "근데… 한 번 쯤은 이벤트성으로… 그런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흠흠……." "……." 내 말을 듣고 멍한 표정이 되어 있던 데이다라가 조용히 인을 맺는다. 푸핫, 내가 생각해도 좀 어처구니가 없어서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 보았던 성숙한 모습의 그가, '이제 어떻게 할까' 하고 묻듯이 나를 바라본다. 이렇게 되면 '역시 어린 모습의 나는 싫은가' 하는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한데… 내색하지도 않고 언제나처럼 어른인 나의 응석을 받아준다. 어쩌면 그만큼 나와 동등한 입장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 내가 데이다라의 코트를 벗기는 것은 일상적인 일인데 사뭇 어색한 기분이 든다. 툭, 툭, 세 번째 단추를 풀려는 순간 그가 내 손을 저지한다. 고개를 숙인 채 살며시 내게 기대는가 하면 나를 붙잡은 그의 손에 약간 긴장이 들어간다. "왜 그래?" 스르르 멀어지는 손을 이번에는 나로부터 붙잡았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그를 올려다본다. "무리할 필요는 없어." "……." 그가 자신의 얼굴로 손을 가져가 더듬더듬 만져 본다. 지금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데이다라도 마찬가진가 보다. 그런데 어째선지 그의 얼굴이 점점 빨갛게 물든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건만 이상하리 만큼 부끄러워하고 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는지 아예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런 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괜스레 걱정이… 이런 모습의 내게 안기면… 앞으로는 원래의 나에게 만족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닐까 하고…" 혹시라도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해서 싫었던 거라면 너무 미안해지니까,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이건 이것대로 당혹스럽다. 지난번과 반대, 어쩌다 보니 그와 내 입장이 뒤바뀌었다. 열아홉이 되었다가 다시 서른으로 돌아가면 내 얼굴이 더 나이들어 보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지금 데이다라와 비슷한 걱정을 했었다.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때 데이다라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렇게 좋아하는데, 푹 빠져 있는데, 무얼 시덥잖은 걱정을 하는 거야. 겨우 그런 일로 내 마음이 변할 리 없잖아.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만 부끄러워서 입 밖에 내지는 못하겠다. 정말 의지가 되지 못하는 누나구나. 자괴감에 쓴웃음을 짓고는 조용히 일어나 심호흡을 한다. 내 애인은 아직 어리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내가 그에게 맞추자. 이제 어떤 입장이 된다고 해도 딱히 상관없다. 데이다라가 상대라면 어떤 모습이든지 두근거릴 테니까. 퐁─.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드는 데이다라. 변신한 내 모습에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라더니 아까처럼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묘하게 애틋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약간 안도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 전까지 알게 모르게 경직되어 있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긴장도 누그러들었는지 그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 보인다. 자기와 같은 열아홉의 모습이 된 내가 편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야 뭐라 해도 연상 보다는 동갑이 편하겠지. 당연한 것인데, 데이다라의 눈빛에 나도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언제나 어른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나의 애인. 잠시나마 그런 부담을 내려 놓을 수 있도록 진작 이렇게 하는 편이 좋았던 걸까. 소원이라고까지 말하는데, 깊이 생각지 않고 시덥잖은 이유로 거절했던 것이 후회된다. 조금 부끄럽고 걱정되기도 하지만 데이다라는 늘 그렇듯 웃어 주겠지. 그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다. 모처럼 변했으니 이번 만큼은 애인으로서 데이다라를 확실히 즐겁게 해주자. "안녕, 난 라고 해." 그런데 이 어색함을 어찌하면 좋을까. 요즘 청춘 드라마를 보면 애들은 이렇게 인사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좀 더 가벼운 느낌으로 하는 편이 좋으려나. 어쨌든 나로서는 이게 한계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이대로 가면 지금보다 더 어색해질 것 같다. 마음을 내려놓고 나도 이 상황을 즐기자. "나랑 같이 놀래?" 그렇다고 해도 나이에 안 어울리는 말을 계속 하자니 손발이 막 오그라드는구나. 이 정도면 푸훕 하고 웃음이 터질 법도 한데 조용히 미소 지으며 지켜봐 주는 내 애인은 천사다. "어려져도 네가 내 여자라는 건 변함없다. 이리 와라." 그가 살며시 두 팔을 벌리며 내게 말한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가슴이 쿵 뛰었다. 이런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괜시리 더 그런 것 같다. 부끄럽지만 한편으로는 응석부리고 싶기도 하다. 에라 모르겠다. 이미 나이가 30대에 접어들었지만 나도 여자라고. 아이처럼 쪼르르 달려가 데이다라의 품에 안긴다. 열아홉이면 거의 발육이 끝난 상태라서 몸은 평소와 그닥 다를 바 없지만 왠지 모르게 포옥 하고 들어가는 느낌이 좋다. 몸의 긴장이 풀리며 바닥으로 스르르 흘러내리는 나를 데이다라가 가볍게 안아올려 자기 무릎에 앉힌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본다. 부끄러워 시선을 모로 돌리면서도 슬쩍 그의 목에 팔을 두른다. 그러자 평소보다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그가 묻는다. "지난번에는 싫다고 하더니, 어째서 갑자기 변덕이 생긴 것이지? 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잖아. 데이다라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나도 내 여자의 이상형이 어떤 것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 너는 이 모습이 더 마음에 들잖아. 네 말대로 한 번 쯤은 분위기를 바꿔 보는 것도 좋지. 어차피 안쪽이 나라는 건 변함없는데 뭐 어떠냐." 툭, 나머지 한 개의 단추는 데이다라가 스스로 풀었다. 앞섬이 벌어지며 코트 안쪽이 드러나자 말 그대로 내 이상형, 근육이 정갈하게 잡힌 느낌의 실루엣이 보인다. 아버님은 몸매도 약간 샤프한 느낌이었는데 지금 데이다라의 몸은, 뭐랄까, 아버님보다는 토비와 더 비슷한 것 같다. 설마하니 일부러?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저도 모르게 옷을 벗으려는 데이다라의 손을 저지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지금 데이다라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고나니 뜻밖에 이질적인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내가 반한 건 데이다라의 본래 모습이다. 강하지만 때로는 여리고, 나로 하여금 따스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귀여운 애인. 평생 공주님처럼 떠받들며 살아도 좋을 만큼 사랑스러운 애인. 평소와 같은 있는 그대로의 데이다라가 보고 싶다. 간질간질간질─. "ㅍ핫…! 아하하하핫…! 가, 갑자기 뭐하는…" 퐁─. 차크라의 흐름이 뒤틀리며 변신술이 풀림과 동시에 데이다라와 그를 끌어안은 내 몸이 함께 쓰러진다. 금발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시트 위로 흩어져 반짝반짝 빛난다. 분명 내 이상형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떤 세상에서 만나든 나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그에게 반할 것이다. 어찌 탐나지 않을 수 있을까. 데이다라는 '진심이라면 오히려 손댈 수 없다'고 말했지만, 처음부터 그가 마음만 먹으면 애인을 만들지 못할 이유 따윈 없었다. 갓의 천으로 가리지 않으면 곱상한 외모 탓에 남녀불문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가끔 대놓고 작업을 걸어오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굳이 나이도 많고 누나 같은 나와의 관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데이다라의 사랑에서 '희생'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를 테면 그는 나를 위해 자신의 '젊음'을 희생하고 있다. 아무리 사랑해도 짓궂은 욕망은 더 젊고 아름다운 것을 쫓겠지. 그래서 가끔은 답답하고 괴롭기도 하겠지. 결코 인정할 수는 없지만 나는 가끔 이런 생각까지 한다. 데이다라는 엄마 또는 여자형제에 대한 빈자리를 나에게서 채우려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제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닐까. "……." 데이다라의 낮은 목소리가 귀를 야릇하게 간질인다. 아아, 하지만 이제 더는 어쩔 수 없다. 머리로는 여전히 여러 가지 걱정을 하고 있는데, 몸은 그와 밀착되어 민감하게 반응한다. 강한 긴장감으로 바짝 움츠러들며 그를 놓지않으려 꽉 붙잡는다. 금방이라도 시작될 것처럼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가슴이 빠르게 뛴다. "… 나……." "알고 있어… 닿고 있으니까……." 무덤덤하게 주거니 받거니 하고는 둘 다 뒤늦게 웃음이 터져서 서로에게 감춘답시고 숨죽여 큭큭 웃는다. 겹쳐져 누워 있으니 보이지 않는다 해도 몸이 떨려서 알 수 있다. 예전에는 매번 놀라고 솔직히 조금 부담스러웠는데 이젠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남자의 몸은 정말 솔직하다니까. 가끔은 좀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전히 납작쿵이지만 열아홉이면 나도 나름 화끈하지?" 팔을 앞으로 모아 갖잖은 섹시미를 뽐낸다. "아아……." 어느덧 약간 거칠어진 숨소리. 이제 하자는 느낌으로 데이다라가 내 손을 잡아끈다. "원래 오늘 같은 경우는 하면 안 되지만 오늘만 특별히 봐줄게." 아직 임무가 끝나지 않았으니 이런 일에 기운을 빼면 안 된다. 다만 오늘은 데이다라에게 미안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어째서 '오늘만 특별히'인 거냐…?" "데이다라가 침울해져 있으면 내 가슴이 찢어지니까. 슴가찢이야." "그래…가 아니라, 지금 뭐라고?" "슴가찢이라고." "……." 잠시 멍해져 있던 데이다라가 문득 눈을 얄쌍하게 뜨더니 어째선지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슴가찢? 그게 무슨 뜻이지? 나는 처음 듣는데?" "슴가는 가슴을 거꾸로 말하는 거고 '찢'은 말 그대로 찢어진다는 뜻이야. 데이다라도 참, 이제 열아홉이면서 어떻게 나보다 모를 수가 있어? 시대에 너무 뒤쳐지는 거 아냐?" "굉장하군. 나도 뒤쳐지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해야겠어." 웃음기 어린 얼굴이 아이처럼 귀여우면서도 굉장히 매혹적이다.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따뜻한 손이 뒤통수를 감싸온다. 이윽고 부드럽게 입술이 겹쳐져 의식을 빼앗기며 기분이 몽롱해진다. 그런데 내가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나? 뭔가 좀 이상한 거 같은데… 에이, 나중에 다시 찾아 보지 뭐. 어쨌든 뜻은 일맥상통하잖아. 쪽 하는 순간 이성이 날아가서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연상의 여자로서는 부끄럽지만 나의 어린 애인에게 완전히 빠져들게 된다. "크흑… ㅍ흐……." 키스를 하다 말고 갑자기 얼굴을 감추더니, 그의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데이다라, 왜 그래?" 혹시 지금 웃음을 참고 있는 건가? 어째서 이런 상황에? "ㅅ가…ㅉ… 큭… 흡……." 귀까지 빨개져서는, 정말 뭐지? "하기 싫은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잠깐 1분만…" "데이다라의… 이미 의지를 상실한 것 같은데…?" "그런 건 네 손이 닿으면 금방 다시 살아난다. 아, 이제 됐다. 하자. 음." 하-, 작게 숨을 토해내고는 데이다라가 내 허리를 천천히 쓸어내린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야릇한 긴장감이 밀려온다. 웃음을 얼마나 참은 건지 그의 눈에 눈물까지 고였다. 뭔가 속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데이다라의 천진난만한 웃음은 또 다른 방향으로 나의 욕망을 자극한다. 내 몸도 마음도 점점 조급해져 간다. 어서 그와 이어지고 싶다. "여러 가지 의미로 정말 사랑한다, ." "응…? 나, 나도… 여러 가지 의미로 데이다라를 사랑해……."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그리는 찰나 데이다라가 조금 전과 같이 키스를 해온다. 이제 정말 할 거니까 집중해. 내게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다시 분위기는 변한다. 달달하면서도 아찔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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