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동안 아지트에서 가사일을 해온 나지만 아무리 익숙해져 있다 해도 그것은 늘 힘들고 지루하다. 물론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나름 뿌듯하고 가끔 즐거운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잘 마른 빨래를 품에 가득 안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드르륵 문을 열자 TV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히단과 데이다라의 모습이 보인다. 내가 들어오든 말든 서로 자기가 원하는 방송을 보기 위해 투닥거리고 있다. 한 명은 내 애인이고 한 명은 친구지만 한편으로는 어릴 때부터 내가 직접 먹이고 재운 '귀여운 동생들'이라고 하는 또 다른 감정이 있다. 이럴 때는 정말 아이들을 보는 것 같아서 소리 없이 웃음 짓곤 한다. "나는 아까 그 액션 영화가 보고 싶다고! 음!" "맨날 임무에서 보는 거랑 별반 다를 것 없잖어! 아지트에서까지 질리지도 않냐! 적어도 집에 있을 때는 나도 마음의 힐링을 받고 싶단 말여! 그러니까 예쁜 여자들을 보자고!" 다소곳이 앉아 멤버들의 옷을 차곡차곡 개어 놓는다. 이렇게 해서 각자의 방으로 가져가 침대 위에 살며시 놓아 두면 된다. 히단의 옷은 늘 자주 찢어져서 수선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끔 이렇게 따로 빼 둔다. 그을림이 많은 데이다라의 옷도 마찬가지다. "봐, 귀엽지? 이번에 새로 데뷔했다고! 삼촌으로서 막 응원해 주고 싶지 않냐? 엉?" "완전 애기구만! 어린이 방송인 줄 알았다! 넌 저런 걸 보고 여자라는 생각이 드냐! 음!" 너도 나한테 있어서는 애기야. 속으로 중얼거리자 마침 히단이 데이다라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저래 봬도 엄연히 성인이거든. 얼굴은 앳되지만 가슴이 크잖어. 그 갭이 좋은 거여." "뭐, 뭐야 저거? 진짜냐? 믿을 수 없어… 음…;;" 얼굴만 나오던 여자 연예인의 전신이 비쳐지자 전혀 관심 없는 것 같았던 데이다라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화면에 집중한다. 진짜인가 가짜인가 나름 판별해 보고, 점점 진실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쪽으로 변해, 이제는 그 육감적인 실루엣 자체에 빠져들어가는 모양새다. "……." 아랫 입술을 깨물고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남아 있는 빨래를 마저 갠다. 내 존재는 머릿속에서 깨끗이 사라진 듯 히단도 데이다라도 TV 속 여자에 대해 주거니 받거니 떠들고 있다. 가슴이 어쩌고 다리가 어쩌고… 방금 전의 아이 같았던 모습은 대체 뭐였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야… 야…!;;;(툭툭)" "너도 의외로 보는 눈이 있었… 음…?;;;" 옷을 전부 개어 다시 품에 안고서 조용히 일어나 방을 나간다. 언제나 의젓한 누나의 모습만 보이고 싶지만 지금은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다. 미간이 좁혀진 채 입을 꾹 닫고 있으니 이것은 어떻게 봐도 화가 난 얼굴, 아니 삐친 얼굴이다. 히단은 애인이 없으니 외로워서 그렇다 쳐도 데이다라 마저 똑같은 반응이라니. 알고는 있었지만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던 굳은 믿음이 깨진 듯한 기분이다. 납작쿵인 나를 사랑해주는 데이다라니까 그래도 조금은 다를 줄 알았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내 가슴을 볼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들까. 아니, 아니지. 지난 번에 말했듯이 애당초 보지를 않겠지. 그러면서 다이어트는 왜 그만두라고 해… 칼로리 깡패들을 왜 먹여… 그날 이후로 내 몸무게가 얼마나 늘었는데… 흑……. (…) 히단 : 야, 너 가서 기분 풀어줘야 되는 거 아녀? 데이다라 : 어떻게 하면 기분이 풀릴까. 내가 뭐라고 해도 듣질 않잖아. 내 말은 전부 어린 혈기에 내뱉은 실없는 소리라고 생각하겠지. 이제 더는 모르겠으니까 멋대로 하라고 해. 어차피 오해도 아니고 변명할 것도 없다고. 음. 히단 :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완전 울 것 같은 얼굴 하고 있거든 지금 너. '망했다'는 표정이라고. 도저히 영화나 보고 있을 상태가 아니란 말여. 스스로도 너무 당혹스러워서 사고가 이상하게 뒤틀려 버린 거 아녀? 괜찮은 거냐?;;(착착) 데이다라 : 아… 아얏… 내가 방금 뭐라고 말했지…? 히단 : 나도 잘 모르겠지만 대충 요약하자면 '가 당장 헤어지자고 해도 전혀 상관없다'였던 것 같어. 엉. 데이다라 :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아… 아아…! 다다다─. 드르륵─. 쾅─. 히단 : 문 부서져 야! ────. 히단 : 에효, 귀여운 것들. 히단 : 너네야 말로 천년 만년 죽지 말고 깨볶으며 살아라. (…) 방에서 혼자 책이나 읽으며 기분전환을 하려고 했는데 좀처럼 집중을 할 수가 없다. 데이다라가 내 무릎을 베고 누워서 머리를 부비적거리며 마치 토비처럼 응석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건 읽을 필요 없다고 했잖냐. 그만 읽어라." 내가 요즘 청소년들의 심리에 대해 공부 좀 하겠다는데 어째서 방해를 하는 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무시하자 데이다라가 책을 슬쩍 치우고는 휙 돌아 누워서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반짝반짝 빛나는 하늘색 눈동자가 생각보다 강해서 굳어 있던 마음을 녹인다. 게다가 평소에는 손발이 오그라들어 좀처럼 하지 못하는 애교까지 부리고 있다. "-. 기분 풀어라, 음?" 경직되어 있던 얼굴을 부드럽게 하는 대신 약간 씁쓸함이 담긴 눈빛으로 데이다라를 응시한다. 어린 애인이 이렇게 애쓰고 있는데 계속 삐쳐 있기 뭐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데이다라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나 생각하면 안타까움과 동시에 도리어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란 건 알지만 데이다라가 항상 나만 바라봤으면 좋겠어." "왜 욕심이라고 생각하냐? 나는 너의 남자다. 그게 당연한 거잖아. 음." 데이다라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배를 살살 간질인다. 언제나 자신의 자리라고 말하는 그 안의 나 마저 위로하는 것 같다. 애인이기 전에 엄마이기도 하고 누나이기도 한 나에게로 향해진 복합적인 감정. 어쩌면 그런 이유로 데이다라의 사랑은 육체적인 면 보다 정신적인 면이 더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그렇게 결론지으면 편해질까. 애인으로서는 나도 꽤나 복잡한 마음이다. "적어도 냠냠이만은 내 가슴을 좋아하게 해줘." "애정이 이상한 방향으로 새는군." 새침한 표정을 짓다가도 불현듯 장난기 어린 얼굴을 하고는 데이다라가 내 가슴을 움켜쥔다. 저도 모르게 신음하며 그의 손을 붙잡는다. 좀 더 해달라고 애원하듯이. 그러자 이번에는 옷을 헤집고 들어온다. 손바닥에서 혀가 나와 가장 민감한 곳을 핥는다. 너무 의도한대로 반응하면 아까 TV속 여자에게 푹 빠져 있던 모습이 떠올라 괜히 울컥할 것 같은데, 의외로 짓궂기 보다는 부드럽고 상냥한 손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몸이 뜨거워졌다. "말해두지만 너무 이 녀석에게 집중하지 마라. 그러면 당분간 키스는 여기 있는 입으로만 할 거다." 다른 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은근히 살벌한 협박을 하더니, 그가 일어나 앉아서 내게 입을 맞춰온다. 이 키스는 조금 전과 같이 내 가슴을 달달함에 젖게 한다. 그리고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그 안의 사랑 마저도 더 뜨겁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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