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태어나 처음으로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얼핏 들으면 별 것 아닌 일 같지만 내게 있어서는 굉장한 사건이었다.

 이제 와서 새삼 예기치 않은 인연이 찾아온 것이 아니다. 평범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서 쉬고 있던 중, 나의 어린 애인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데이트 보다는 짧은 여행이라고 해야 맞겠군. 처음에는 반나절 정도 근처에 나갔다가 돌아오려 했는데, 요즘 날씨도 쌀쌀하고 해서 말야. 아예 1박2일로 따뜻한 남부지방에 다녀오는 계획을 해 봤다만, 어떻게 생각하냐? 음?"

 나는 멍하니 데이다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남서부로 임무를 떠났다가 잠시 들러 가져온 듯한 꽃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오면서 시들어 버렸지만 형상은 그대로 남아 한창 아름답게 피어 있을 때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거긴 벌써 꽃이 피었구나. 멋진 생각이야."

 하지만 그동안 임무를 쉬어도 괜찮은 거야? 내가 그렇게 묻기 전에, 데이다라는 기쁜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행이다. 실은 이미 숙소를 예약해 두고 왔거든. 조용한 마을이지만 밤이 되면 작은 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축제?"

 "그래, 우리 같이 불꽃놀이를 보러 가기로 했잖냐. 이번에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데이다라는 얘기를 하면서 자기도 기대된다는 얼굴빛을 띠었다. 식사하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그는 식기를 내려놓고 대신 내 손을 감싸 쥐었다. 따뜻한 체온이었다. 식탁 위의 꽃은 미약하지만 달큰한 향기가 났다.

 데이트 보다는 여행이라고 해야 맞나. 보통의 연인들이 데이트 보다 여행을 먼저 가나. 애당초 데이트 보다 잠자리를 먼저 가진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문득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비록 많이 늦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기뻤다. 1박2일의 일정이었기에 정말 필요한 것들만 챙겨 우리는 남부로 떠났다.

 숙소 근처에 도착했을 때 나는 몸에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확실히 북부나 중부에 비해서 따뜻한 기후였다. 바람이 서늘해 봄이라기엔 조금 이른 감이 있었고, 아지트에 있을 때 느꼈던 가을과 비슷했다.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이미 몇 번을 되뇌이고도 같은 생각이 들 만큼 몽롱한 기분이다. 날씨, 경치, 맛있는 음식,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하루를 보냈다. 그동안 여행은 하물며 데이트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는데.

 전통 찻집 앞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마루에 걸터앉아서 노을진 하늘을 올려다 본다. 조금 전까지 즐겁게 얘기를 나누다가 잠시 한숨 돌리며 여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뺨에 홍조를 띠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지금 내 모습은 누가 봐도 행복한 여자겠지.

 데이다라도 나와 같은 기분일까. 부디 그러길 바라며 옆을 돌아보았다. 편안한 사복차림과 금발의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내린 모습에 또 가슴이 설렌다.

 그런데 왠지 데이다라의 표정이 딱딱하다. 마치 화가 난 것 같다. 그의 시선을 조용히 따라가 보니, 맞은편 가게 앞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불의 나라 전통 복장인 품이 넓은 옷을 현대식으로 간소화시킨 형태의 옷을 즐겨 입는데 저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냥 평범한 20대 중후반의 남자라는 느낌이다.

 "왜 그래, 데이다라?"

 "저 새끼가 아까부터 대놓고 널 쳐다보잖냐. 내가 옆에 버젓이 있는데도 말야."

 주변의 경치를 구경하느라 남자의 시선을 깨닫지 못했다. 정말 보고 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걸까. 우리는 외부인이니까 어쩌면 그냥 궁금한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 전까지 분위기 좋았는데 불필요한 다툼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다.

 하지만 데이다라의 기분도 이해가 된다. 낯선 얼굴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단정지어 버리기엔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다. 내게 다가올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내가 먼저 다가오길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나도 신경쓰여서 무시할 수 없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능청스레 말을 건넨다.

 "축제 구경하러 온 거야? 우리 마을에는 그것 말고도 재밌는 게 많은데 괜찮다면 내가 구경시켜줄게. 귀여운 누나."

 낯선 이의 접근에 대한 거부감에 약간 두렵기도 해서 무심코 데이다라에게 바짝 붙었다. 이런 상황은 화류가 같은 곳에서도 빈번히 일어나지만 애인의 앞이다보니 더 당황스럽고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일단 정중히 거절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귀여운 누나라니. 그렇게 말해주는 것은 조금 기쁘려나. 흠흠.

 "고맙지만 저는 이미 일행이 있어요."

 애인이라고 말하긴 조금 부끄러워서 조용히 데이다라에게 팔짱을 꼈다. 내 수줍은 미소를 본다면 누구라도 그가 내 애인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알아. 아까부터 같이 있었잖아. 옆에 있는 금발 아가씨도 같이 가자."

 아. 가. 씨. 설마하니 자기를 여자라고 생각했을 거라고는 데이다라도 상상 조차 못했을 것이다. 남자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듣고 어이를 상실한 듯하더니 빠직 하고 머리에 피가 쏠린 듯 험악한 얼굴이 되었다.

 이거 위험한데. 말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난 데이다라가 남자와 똑바로 마주선다. 이렇게 보니 두 남자의 체격이 비슷하다. 생각보다 키가 커서 놀랐는지 남자가 흠칫 하고 뒷걸음질을 친다. 그리고 다음, 내 애인이 입을 연다.

 "형씨, 눈에 문제가 있구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잠깐 같이 갈까? 음?"

 남자의 시선이 데이다라의 얼굴과 가슴 사이에서 이리저리 방황한다. 그야 그렇겠지. 방금 전에는 나도 놀랐지만 솔직히 데이다라의 생김새는 여자로 오해 받는다 해도 딱히 이상할 게 없다. 저 날카로운 눈매와 하늘색 눈동자는 남자의 시선으로 봐도 매력적일 것이다. 데이다라가 눈을 가늘게 뜨면 혹시 나를 유혹하는 건가 하는 착각이 종종 들곤 한다. 아까 노려봤을 때 남자의 눈에는 그런 식으로 비쳤을 수도 있다.

 애인으로서는 중성적인 느낌의 외모가 데이다라의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시선을 조금만 밑으로 내리면 도저히 여자라고 생각할 수 없는 납작한 가슴팍이 있다. 입을 여는 순간 분위기를 싹 가라앉히는 중저음의 목소리와 걸걸한 말투에 대해서는 말이 필요 없다.

 "나, 남자였…? 죄송합니다…!"

 어쨌든 나쁜 녀석은 아니었는지 남자가 꾸벅 허리를 숙여 사과하고는 냅다 도망친다. 휘청 하고 넘어질 뻔했다가 뛰어가는 모양새가 피식 웃음을 자아낸다. 가까이 서니 더 어려 보이던데. 좀 안쓰럽기도 하지만 애당초 S급 수배범이 뿜어대는 살기를 닌자도 뭣도 아닌 일반인이 견뎌내는 건 무리가 아닐까 싶다.

 " 너, 아까 잠깐 망설였지."

 "에?"

 생각 없이 웃고 있다가 데이다라의 일침에 움찔했다.

 "오늘 처음 보는 녀석이 누나라고 살갑게 불러주니 좋더냐? 음?"

 이거야 원. 달달했던 분위기는 어찌 된 건지, 아까 그 남자 때문에 괜히 나한테 불똥이 튈 것 같은 분위기다.

 "뭐… 좋긴 하지……."

 "하?"

 다시 말해보라는 듯 그가 고개를 까딱인다.

 "아니… 그렇잖아… 예전부터 아지트의 가사일은 내가 전부 도맡아 했는데 히단한테도 데이다라한테도 누나라고 불린 적은 없었으니까… 한 번쯤은 나도 '누나-' 하고 애교스럽게 불러주는 귀여운 남동생을 보고 싶었어."

 "나이가 조금 많다고 유난을 떨더니 뒤에서 어린 남자를 밝히고 있었단 말이냐. 이제 알았다. 넌 아주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나를 꼬신 거야. 지금부터는 어림 없다. 앞으로도 쭉 널 그렇게 불러 줄 녀석은 나타나지 않을 테니 꿈 깨라. 연하킬러의 희생자는 나 하나만으로 족하다고. 음."

 연하킬러라니, 내가 그렇게 능력 있는 여자였던가. 데이다라는 딱히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겠지만 아까 '귀여운 누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보다 더 기쁘다. 왠지 모를 승리감과 도취감에 기분이 짜릿하달까. 후후.

 "난 엄마 같은 따스함과 누나 같은 편안함으로 어린 남자들을 감싸안을 수 있는 여자야. 딱히 유혹하는 게 아니라구. 뭐 그중에 나의 포근함에 이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남자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이, 유부녀 주제 무얼 멋대로 남에게 품을 내어주고 있어. 남편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잖아, 이 아줌마가. 아아?"

 빠직. 또 한 번 혈압이 솟은 듯 험악한 얼굴의 데이다라가 분노의 오오라를 뿜어댄다. 아무리 뭐래도 아줌마라니. 일순간 같이 빠직 하려다 참았다. 오늘은 질투하는 게 귀여웠으니까 한 번 봐준다. 우이쒸.

 투닥거리는 것도 좋긴 하지만 어린 남편과의 달달한 분위기가 슬슬 그리워지던 참이다. 얼른 이 상황을 마무리하고 오늘 만큼은 나도 마음껏 응석부리고 싶다. 데이다라에게 안겨 그의 가슴에 뺨을 부비적거리는 상상으로 점점 애가 탄다.

 "곧 날이 어두워질 것 같은데. 우리 다음엔 어디 갈까?"

 "불꽃이 잘 보일 만한 곳을 미리 봐두었다. 일단 저녁을 먹은 다음 천천히 올라가자. 음."

 방금 전까지 투닥거렸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같은 차분한 대화가 오간다. 데이다라도 나도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기 때문에 단 한순간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있잖아, 밤이 되면… 불꽃놀이가 끝나면 근처의 가게나 숙소에서 가볍게 술 한 잔 할래?"

 아직 미성년자인 청소년에게는 원래 술을 권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뭐어, 이럴 때 만큼은 특별히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둘 다 술에 약해서 어차피 몇 잔 마시다 지쳐 버릴 테고, 그러다 기분 좋게 잠들면 더할나위 없을 것 같다.

 "딱히 상관 없다만, 괜찮을지 모르겠다. 내… 피곤해지면 제대로 반응 안 할지도 모르는데… 모처럼 여기까지 와서 그러면… 으음……."

 "술 좀 마신다고 열아홉 혈기가 어디 가겠어. 만에 하나 반응 안 하면 나한테 맡겨. 누나는 너의 약점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단다."

 -라고 여유로운 연상의 여자를 흉내내고 있지만, 속으로는 밖에서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민망해하고 있다.

 오늘은 데이다라도 이것저것 신경쓰느라 피곤했겠지. 여행을 왔다고 해서 딱히 잠들기 전까지 특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전혀 무리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얘기가 나오니 벌써부터 가슴이 막 두근거린다.

 (…)

 피융─. 펑──.

 밤하늘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무리. 폭발 예술가라면 이런 광경을 보며 한껏 들떠 있을 법도 하건만 어째선지 내 남자는 옆에서 조용히 그 빛나는 광경을 감상하고 있다.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아까부터 말을 붙이지도 못했다.

 데이다라에게는 난생 처음 마주하는 광경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넋을 놓고 바라보는 거겠지. 예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지만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다. 그때 내가 준비했던 것은 뭐였나 싶을 정도로 마을의 밤축제는 화려했다.

 형형색색 반짝이는 거리를 걸으며 재밌는 구경을 했고, 맛있는 것도 먹었고, 짧게나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낮에만 해도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비로소 실감이 되었다. 아아, 이런 게 진짜 행복이구나.

 펑──.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이 번진다. 그런 하늘을 계속 바라보면서, 데이다라가 내 손을 살며시 붙잡는다. 왠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는 것 같아 나도 꼭 마주잡는다. 그러자 뜻밖에 애처로운 얼굴을 하며 그가 낮게 중얼거린다.

 "너만은 저렇게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불꽃이 터지는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내 가슴에 분명하게 전해져 왔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데이다라가 살아온 삶을 이젠 나도 이해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전쟁을 겪어야 했던 그는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며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허무함. 애틋함. 그것이 데이다라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안식이 아니었을까. 진짜 행복 따윈 느낄 틈도 없었고 생각할 여유 조차 없었겠지. 그 후로도 줄곧 그랬겠지.

 (…)

 축제가 막을 내린 뒤 안주거리를 사고 이번에는 술을 사러 왔다.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주점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단촐한 느낌이다. 데이다라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친근한 모습의 주인 아주머니께서 두 사람을 맞아주신다.

 데이다라가 가게 안을 구경하는 동안 나는 진지한 얼굴로 아주머니의 얘기를 들으며 두 사람에게 맞을 법한 술을 찾았다. 도수가 낮은 것들 중 달달하면서도 향긋한 것이 내 감각을 확 자극하는 게 있다. 좀 더 가까이서 향을 맡아 보려고 병에 살며시 손을 뻗자 아주머니께서 슬쩍 다가와 내게 물으신다.

 "처자, 저 총각이 처자의 낭군인가?"

 "네…? 네에… 뭐어……."

 요즘도 어르신들께서는 낭군이라는 말을 쓰시는구나. 들어 보니 어감이 괜찮은데 앞으로는 종종 그렇게 부를까. 속으로 생각하고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낭군이 아주 잘생겼구먼. 보아하니 고생 좀 하겠어."

 혹시 내 남자가 바람둥이 같은 것으로 오해 받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하지만 고생하겠다는 말에는 딱히 부정할 수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바람을 피던 안 피던 어쨌든 나 보다 11살이나 어리고 잘생긴 것도 사실이니까.

 "그것도 좋지만 이걸 가져가 보게나, 처자."

 아주머니께서도 문득 진지한 얼굴이 되어 내게 병 하나를 건네 주신다. 겉보기엔 다른 것들과 비슷한데 뚜껑을 살짝 열어 보니 짙은 꽃향기가 확 하고 올라온다. 도수가 꽤 높은 것 같고 냄새만으로도 뭐랄까 꽃무더기에 푹 빠졌다 나온 것처럼 아찔하다.

 "사내 놈들은 결국 다 제 면상값을 하지. 처자가 꽉 붙잡아 놔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이게 올해 처음 핀 꽃으로 담근 술인데…"

 아주머니께서 뒤편의 데이다라를 슥 보시더니 문득 몸을 약간 숙여서 내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신다.

"이게 아주 달달하니 모르는 새 훅 가버리거든. 그러니까 이참에 말이여. 아주 확 말이여. 어. 알겠지. 힘내라고 처자."

 아주머니의 한 마디에 함축되어 있는 너무나도 깊은 뜻을 나는 싫어도 이해했다. 그러자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까짓꺼 승부수 한 번 던져보지 뭐.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냉큼 사서 룰루랄라 숙소로 돌아왔다.

 쪼르르 술을 따르자 향긋함이 물씬 올라온다. 데이다라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멋대로 고른 것인데 다행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달큰하면서도 부드럽게 넘어가니 경계심 없이 따라주는 족족 받아 마신다.

 둘이서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아직 얼굴에 웃음기가 어려 있었는데, 문득 데이다라가 눈썹을 찌푸리며 집게손가락으로 미간을 짚는다. 슬슬 술기운이 도는 것 같다. 과연 아주머니께서 추천해주신 술이다. 음료처럼 마시다가 조용히, 은밀하게 취한다. 그리고 왠지 술 이상의 달뜬 기분이 든다.

 얼굴이 뜨겁고 숨이 약간 거칠어졌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겉으로는 취한 척하면서 이참에 데이다라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생각이었다. 예전부터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왜 나와 사귀기로 마음 먹은 건지, 정말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리고… 아… 안 되겠다.

 "미안, 데이다라.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데이다라가 내 팔을 덥석 붙잡는다. 살며시 손을 뻗어 만져 보니 얼굴이 뜨겁지 않다. 분명 취한 것 같은데 별로 붉어지지도 않았고 나처럼 몸이 은근히 옆으로 기울지도 않는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그저 내게 유혹적인 시선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

 "매일 밤… 눈 감을 때… 네가 곁에 없으면… 불안하고… 매일 아침… 여전히 네가 없으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마침내 너와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오랜만에 네가 웃는 것을 보면… 굉장히… 기쁘고… 뿌듯하고… 하지만… 다시… 그리워지고… 그래서 더는… 더는……."

 일어나려는 나를 보고 불안함을 느꼈던 걸까. 힘겨운 듯한 데이다라의 손을 감싸며 쓴웃음을 짓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역시 취하긴 했구나. 두서 없는 말이긴 해도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다. 대부분이 내가 듣고 싶었던 대답들이다.

"더는… 못 참겠다… 이제 더는… 싫다… ……."

 내 가슴에 기대어오는 데이다라를 두 팔로 안아 보니 새삼 야위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껏하면 끼니를 거르는데다 밤에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는 토비의 말을 떠올리면 더욱 가슴이 아프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우는 아이 달래듯 데이다라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지며 내 마음이 그에게 닿도록 조용히 위로한다. 오늘과 같은 하루가 계속된다면 좋을 텐데. 평소에는 이렇게 마음 놓고 그를 바라보지 못한다. 만지지도 못한다. 생각하자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데이다라를 살며시 떼어놓고 조금 서두르는 느낌으로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에 목소리가 떨리는 듯했는데 그래도 진정되었는지 이번에는 나를 붙잡지 않는다. 문을 향해 걸어가다 털썩 하는 소리가 나기에 돌아보니 조금 전 모습 그대로 쓰러져서는 나를 보고 있다. 설마하니 저대로 계속 기다릴 셈인가.

 어쨌든 밖에 나가 바람을 쐬면서 적당히 취기를 물리쳐낸 뒤에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남부라 해도 밤에는 아직 춥구나. 킁- 코를 마시며 신발을 벗는데 문득 작은 체구의 익숙한 소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영문도 모르면서 반가운 마음에 무심코 환한 웃음을 지었다.

 내게 등을 보인 채 누워 있기에 잠들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다가갔다. 정말 작은, 꼬꼬마 시절의 데이다라다. 얼굴을 보고 싶어서 슬쩍 이쪽을 돌아보게 했다. 그런데, 갑자기 퐁- 하고 연기가 눈앞을 가리더니 데이다라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나를 확 덮친다.

 "걸렸다-."

 한껏 달뜬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당황할 틈도 주지 않고 내 귀와 목에 입을 맞춘다. 뜨거운 숨결. 낮은 웃음소리.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감각에 온몸이 저릿하다. 방금 전의 꼬마 모습은 나를 다가오게 하기 위한 덫이었던 건가. 주정뱅이에게 완전히 잡혀 버렸으니 이젠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교활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나의 '낭군'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 너는, 언제나 네가 날 기다린다고만 생각하지. 근데, 그동안 부끄러워서 말 안 했는데, 사실 나는 너보다 더 오랫동안 기다렸다. 이렇게 널 내 품안에 가둬두고, 만지고, 키스하고, 안을 수 있게 되는 날을 말야. 기분이 끝내준다! 이제 나는 널 내려다볼 수 있어. 그뿐이냐! 널 맘대로 벗길 수 있고, 가슴도 만지고, H도 할 수 있어. 넌 내 여자야! 음!"

 처음 봤다. 데이다라의 술주정. 왠지 귀여운 주벽인 것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나올 뻔했는데, '내 여자'라는 말에 심장이 쿵 하더니 두근두근 빠르게 뛰어댄다. 그의 흥분과 고조된 목소리가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한때 신장이 내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꼬마였건만. 데이다라는 실로 성장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먹이인 나를 눈앞에 두고 그 순간의 희열을 즐기는 어엿한 '짐승'이 되었다.

 이런 이런. 지금부터 벌어질 일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제 내 옷을 벗기고 가슴을 만지겠구나. 그리고 남은 일은 하나밖에 없구나. 뭐랄까, 그럴 리 없는데도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되어 있었다는 듯한 상황이 되었다. 마치 한편의 드라마처럼. 이것이 데이트의 마지막 파트다. 어느덧 멋드러지게 성장한 남자의 몸이 유연하고 빠른 움직임으로 나를 휘어잡는다.

 내가 데이다라를 가졌다고 느꼈을 때 그랬듯이,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승리감을 안겨줄 차례다. 두 팔로 데이다라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며 달뜬 목소리를 숨김없이 토해낸다. 지난 날의 두 사람, 사이 좋은 남매의 모습이 문득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9년 전, 6년 전, 3년 전. 그때였다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뜨거움이 두 사람을 애워싸고 있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 이 앞으로는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어도 되는 걸까. 데이다라가 원하면 언제든 보내주자고 마음먹은 나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결말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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